세계의 명화

마네-<<상의를 벗은 금발여인>>

문성식 2011. 1. 23. 00:09


<<상의를 벗은 금발여인>>


마네 (Edouard Manet 1832.1.23∼1883.4.30)

마네는 1832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법무부의 고위 관리였던 아버지와 외교관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순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학창시절은 훌륭한 학생이 되기 위해 전념하기보다는 공책에 그림을 그리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러한 그의 미술적 소질을 알아차린 사람은 바로 그의 외삼촌이었다. 대단한 예술 애호가였던 외삼촌은 일찍부터 어린 마네를 정기적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데리고 다니거나 함께 그림을 그리곤 했던 것이다.

마네의 부모님은 생각보다 개방적이고 관대한 분들이었지만 어린 마네가 법률가나 해군 같은 당시 더욱 전통적인 직업을 갖기를 원했다. 그러한 부모님의 바램으로 16살의 마네는 견습선원으로 6개월간 리오 데 자네이로로 항해 길에 올랐으나 이 항해를 통해 마네는 화가의 꿈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되었다. 마네는 귀국하여 자신의 생애를 화가의 길로 정하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그림을 시작했다.

아카데믹한 순수미술학교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였던 그는 토마스 쿠튀르의 화실에서 가르침을 받기로 결심하였는데, 당시 쿠튀르는 살롱전에 출품하여 성공한 화가로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통하고 아카데믹한 순수미술학교의 틀에 박힌 수업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네는 1850년부터 1856년까지 쿠튀르의 화실에서 6년이나 머물러 있으면서 거의 아무런 작품을 남기지 않았고, 화실에서 까다롭고 거만함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쿠튀르와도 잦은 갈등을 빚었다.

1856년 마네는 쿠튀르를 떠나 라부아지에에 스튜디오를 마련하여 작업을 시작하고 1859년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을 살롱전에 출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파리의 사교계인사들이 모이는 카페에 거의 매일 드나들며 복잡한 도시생활을 즐겼던 마네는 이를 평생 그가 그릴 주제로 삼고 사회 모든 계층을 그림에 담아내려고 했다. 또한 1859년경까지 마네는 많은 여행을 했다. 특히 네덜란드 여행 중 네덜란드 회화의 전통적인 사실주의를 발견하고 데생과 역사화를 우선하는 당시의 풍조에서 그리스, 로마의 화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본보기로 느끼게 되었다. 그는 렘브란트와 할스의 작품에 열광하였고, 유럽의 훌륭한 여러 미술관들을 둘러보는 여행을 계속하며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등과 같은 작품을 직접 모사하였고, 루브르 박물관은 그에게 있어 '진정한 화실'이었다.

이처럼 젊은 마네는 여행과 모사작업을 통해 고전적인 훈련을 하였고 그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옛 명화들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 많았고 때로 옛 명화들의 배경을 완전히 새롭고 엉뚱한 현대적인 것으로 바꿔놓은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낭만주의 문학의 영향으로 새롭게 다가온 스페인은 마네가 스페인적인 주제에 몰두하게 했고 벨라스케스의 발견을 바탕으로 1861년에는 [스페인 가수]라는 그림으로 살롱전에서 수상하게 되었다. 이 같은 성공은 마네를 젊은 사실주의그룹의 선두에 서게 했다.

1863년 개최된 살롱전에서는 400여 점의 그림들이 낙선되자 화가들은 심사에 불만을 품고 진정서를 제출하여 「낙선작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마네는 이 전시회에 참가하여 [풀밭 위의 점심]을 포함한 세 점을 전시하였다. 역사화나 신화적인 주제의 그림만 전시되던 살롱전에 벌거벗은 여자가 나오는 한적한 시골의 피크닉 장면은 대중을 놀라게 했지만 그 그림은 충격적이면서 흥미로운 것이었고 현대예술의 신기원을 이룬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근대 회화사에 있어 아카데믹한 경향과 도미에, 쿠르베, 마네가 속해있던 현대주의적인 경향사이의 분열이 끝을 맺게 된다.

같은 해 마네는 [올랭피아]를 그려서 1865년의 살롱전에 선보인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수정하여 그린 작품이지만 [올랭피아]는 순식간에 도전적인 모든 현대성에 불을 붙이는 영웅이자 새로운 회화의 충격이 되었다. 이 두 작품을 통해 마네는 파리의 상류층 부르주아의 매혹적이며 현실 순응적인 모습을 벗어 던지고 질서의 파괴자, 전복자가 되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수록 멋져 보였고 배척 당하지만 거만하고, 비판받지만 인정받는 자가 되었다.

마네는 평생 줄곧 일년에 두 세 점의 작품을 살롱에 전시하려고 애썼다. 대부분이 화실에서 그려진 초상화나 현대적 생활상들을 그린 그림들이었고, 인상파의 그룹전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거나 그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꺼렸으나, 1875년에는 [아르장퇴이유]를 출품함으로써 인상주의를 구사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가장 고전적인 작품 [올랭피아]의 파문이후 두 번째의 심각한 파문이었다.

한편 인상파의 화가들은 일찍이 마네를 알고 감탄하던 사람들로, 그를 그들의 선구자로 여겼고, 자유로우면서 거의 생략에 가까운 기법과 사물을 보고 그리는 새로운 화법, 자립심과 용기를 지닌 인간 모델을 배웠다. 마네는 이름이 비슷하여 젊은 화가 모네와 자신을 혼동하는 것을 불쾌해 했지만 결국 좋은친구가 되었으며, 인상주의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마네의 색감은 점점 더 밝게 변해갔고 현대생활을 보다 덜 의도적인 모습으로 그리게 되었다.

흔히 마네는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여겨 왔으나 그는 위대한 고전미술과 현대성 사이에서 천재적인 중개역을 맡고 있는 화가였고 발표하는 작품마다 비난과 야유를 받았지만 들라크루아, 드가, 모네 등과 같은 당시의 거장들로부터는 지지를 받은 화가였다. 그는 도시와 도시의 밤, 도시가 주는 모든 새로운 광경에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고, 매력을 끄는 인물로 외적으로는 여유와 자신감이 가득한 인상을 보였지만 반대로는 늘 자기회의에 젖어 '사람들이 내게 온갖 악평을 퍼붓고 있다. 분명히 뭔가 잘못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1878년부터 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에 시달렸고 51세의 한창의 나이로 아깝게 생애를 마쳤다.


 

 

출처 :너와집 나그네 원문보기   글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