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심(吳光心 1910~1976) 선생은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던 해인 1910년 3월 15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신부면(新府面) 용건동(龍建洞)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선생은 부모를 따라 남만주로 이주하였다. 남만주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에 있는 화흥중학(化興中學) 부설 사범과에 입학하였다. 화흥학교는 1927년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 의해 설립된 학교로 학생들에게 철저한 민족주의교육을 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 학교에서 남다른 민족의식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 |
만주에서 교편 잡고 민족교육에 전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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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조선혁명당과 군이 창설되던 1929년 화흥학교를 졸업하고 정규 교사가 되었다. 이때 선생의 나이 20세 때였다. 1930년 통화현(通化縣) 반납배(半拉背)에 있는 초등학교인 배달학교(倍達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이 학교는 남만주의 한인 자치단체이자 독립운동기관이었던 한족회(韓族會)에서 설립한 민족주의 학교였다. 1931년에는 재만 항일근거지인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있는 동명중학(東明中學) 부설 여자국민학교로 옮겨 2세 여학생들의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동명중학도 화흥학교와 마찬가지로 한인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행하는 정의부 소속 학교였다.
선생은 배달학교 교사 시절인 1930년부터 조선혁명당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정세가 매우 급하게 돌아가자 교직을 접고 오로지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에 가담, 처음에는 사령부 군수처(軍需處)에서 복무했고 나아가 유격대 및 한중연합 항일전에도 참여하여 주로 지하연락 활동을 맡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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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을 접고 독립운동에 종사하면서 일생의 배필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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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도중, 남편인 김학규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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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연락 활동 중 조선혁명군 참모장인 백파(白波) 김학규(金學奎)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후 선생은 김학규의 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참모이자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1900년 평남 평원군(平原郡)에서 태어난 김학규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속성과를 졸업하고, 1929년 동명중학교 교원 및 교장을 역임하다가 선생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교직을 접었다. 선생이 김학규와 결혼할 무렵은 김학규가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의 참모장이자 맹장으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가운데 1932년 4월 29일 상해(上海)에서 경천동지할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 폭탄의거가 발발하였다. 홍구공원 의거 이후 임시정부의 김구(金九) 주석과 중국국민당 장개석(蔣介石) 위원장의 합작으로 하남성 낙양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관학교 설립이 결정됐다. 김구 주석은 만주에서 악전고투하는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 등 독립군의 관내지역 이동을 요청했고. 이에 호응하여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의 일부 장령들은 후일을 기약하며 1933년 말 관내지역으로 이동했다. 애초 조선혁명군은 관내지역으로의 완전한 이동보다는 이 지역 독립운동세력의 도움을 받아 만주에서 항전을 계속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래서 조선혁명군 사령부에서는 부족한 인력∙물자를 보충받기 위해 대표를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원조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대표로 김학규가 선발되어 남경(南京)에 파견됐고, 선생도 동행하게 되었다. | |
임시정부를 찾아 남경으로 가는 험난한 과정을 노래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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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험난한 과정에서 ‘님 찾아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지어 비장한 심경의 일단을 토로하였다.
님 찾아가는 길
비바람 세차고 눈보라 쌓여도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어두운 밤길에 준령을 넘으며 님 찾아 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님 찾아 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험난한 세파에 괴로움 많아도 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이 노랫말 속의 ‘님’은 임시정부이자 나아가 조국광복을 의미하였다. 어떤 고난도 극복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끝까지 투쟁한다는 선생의 굳건한 결의가 엿보이고 있다. | |
남경에서 만주까지, 위험한 전령의 소임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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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과 김학규가 남경에 도착할 무렵 남경에는 이미 남경 중앙군관학교와 낙양군관학교에서 한인 청년들에 대한 군사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의열단(義烈團)∙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 등이 효과적인 항일운동을 위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라는 전선통일을 위한 기구를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김학규로서는 관내지역 독립운동단체 간의 통일이 이루어지면 보다 효과적으로 만주의 독립군을 지원해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런 만큼 남경 등 관내지역의 제반 상황을 만주의 조선혁명당 본부에 신속하게 보고해야만 하였다. 김학규는 본부에 제출할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를 가지고 만주의 당 본부에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이 임무는 선생이 수행하기로 하였다. 김학규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보고서를 휴대한 채 다시 만주로 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선생은 아예 이 보고서를 통째로 외운 다음 1934년 7월 15일 남경에서 출발하여 만주로 향했다.
만주의 조선혁명당 본부는 선생의 구술 보고에 대단히 만족하였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당 본부에서는 당 간부 몇 명이 흥경현 왕청문 이도구(二道溝)의 한 한인의 집에서 남경에 보낼 비밀 지령문을 작성하였다. 그때 변절자의 방화로 가옥이 불타면서 겨우 3명만이 살아나왔는데 선생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선생은 천행으로 살아남았지만 심한 화상으로 3개월 동안 만주 산간의 바위굴에서 치료했다. 1935년 1월 선생은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몸을 이끌고 다시 남경으로 가 조선혁명당과 군이 남경에서 추진하는 단일당 조직운동에 대한 당과 군의 비준서를 전달하였다.
이로써 조선혁명당 대표 김학규와 최동오(崔東吾)는 한국독립당(대표 金枓奉, 趙素昻)∙의열단(대표 石正, 陳義櫓)∙한국독립당(대표 尹琦燮, 이청천) 및 미주 대한인독립단(대표 金奎植, 申翼熙)의 통일전선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로 1935년 7월 4일 단일대당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설됐다. 김학규는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고 그의 참모이자 동지로서 적지 않은 구실을 한 선생은 민족혁명당에서 부녀부 차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은 결성 직후 한국독립당 계열과 이청천, 최동오 등 만주세력이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 계열의 ‘전횡’에 반발, 탈당하면서 좌파적 성격을 띠게 되자 선생은 부녀부에서의 활동을 더는 지속할 수 없었다. | |
임시정부를 따라 광서성 유주로 가, 청년공작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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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7월 중일전쟁의 발발은 한국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중일전쟁의 개전과 더불어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본격적인 대일전을 수행하였다. 중일전쟁에서 중국의 패색이 짙어졌고, 남경이 일본군에 점령되기 직전인 1937년 11월에 중국 정부의 이동과 함께 임시정부도 호북성(湖北省) 한구(漢口)를 거쳐, 그 이듬해 2월에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로 옮겨갔다. 그리고 장사 지역 역시 일본군의 침공 위협을 받게 되자 임시정부는 7월에 다시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로 이동하였다. 뒤이어 일본군이 광동 지역에 상륙하여 광주를 위협하게 됨에 따라 10월에 서쪽으로 철수하여 남해(南海)를 거쳐 11월에 광서성(廣西省) 유주(柳州)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는 1939년 2월 광서성 유주에 머무는 동안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를 조직하였다. 청년공작대의 대장은 고운기(高雲起)였다. 대원 총수는 34명이고 남자 대원들은 대개 낙양군관학교 출신의 청년 군사간부들 위주였다. 그리고 대원의 1/3에 해당하는 11명이 여자였는데 대개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구성한 3당의 부인들과 여식들이었다. 이 가운데 선생은 다른 여자 대원들과는 달리 조선혁명당 당원으로서 이미 만주에서 5년간의 항일전투 경험이 있었고, 남경에서 추진되었던 전선통일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역전의 투사로서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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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징모처 제6분처의 대원으로 활동한 오광심 선생과 남편인 김학규 선생, 그리고 서파. |
그러나 유주도 임시정부가 안주할만한 곳이 되지 못하였다. 임시정부 대가족은 1939년 5월에 사천성(四川省) 남부의 기강(綦江), 이어 1940년에는 중국의 전시수도인 중경(重慶)에 최종적으로 안착하게 되었다. 1932년 4월 윤봉길의거 이후 일제의 체포 위협을 피해 중국 내지를 전전하면서 자체 무력단체 창설을 준비해왔던 임시정부는 중경에서 마침내 꿈에 그리던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사무 및 선전사업의 임무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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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9월 17일 이른 새벽 중경의 가릉빈관(嘉陵濱館)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다. 가릉빈관은 중경시를 끼고 흐르는 가릉강(嘉陵江) 기슭에 있는 호텔로 연합국의 중경주재 서방 기자들이 활동하던 일종의 프레스센터였다. 이날 행사에는 내외에서 2백여 명이 참석하였다. 총사령부 직원들을 비롯하여 김구∙홍진(洪震)∙조소앙(趙素昻) ∙조완구(趙琬九) 등 임시정부∙한국독립당∙임시의정원 요인들 전원이 참석하였다. 선생도 이날 광복군 창립식에 김정숙(金貞淑)∙지복영(池復榮)∙조순옥(越順玉) 등의 여군과 사복을 입은 신순호(申順浩)∙민영주(閔泳珠)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광복군 총사령부 창설 직후 선생은 주로 총사령부의 사무 및 선전사업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광복군 총사령부는 실제적인 항일운동을 펼치기 위해 전방인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여자 광복군 대원인 선생을 비롯하여 지복영∙조순옥도 서안으로 이동하였다. 부관처장(副官處長) 황학수(黃學秀)를 비롯한 중경의 총사령부 인원은 1940년 11월 17일 중경을 출발하여 동월 29일 서안에 도착하여 시내 이부가(二府街) 4호에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선생이 소속된 서안 총사령부의 선전조는 광복군에 대한 홍보와 선전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우선 광복군의 기관지 간행을 준비하였다. 총사령부에는 광복군 기관지 간행을 위하여 정훈처(政訓處)를 두고 조경한을 정훈처장에 임명하고 편집은 김광이 담당하였다. 또한 원고작성과 편집은 선생을 비롯하여 지복영∙조순옥 등 여자 대원이 주로 담당하였다. 준비작업을 거쳐 광복군 기관지는 1941년 2월 1일 자로 [광복(光復)]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광복]은 한국어본과 중국어본의 두 종류로 간행되었다. 중국어본은 현지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한국어본은 국내외 한인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광복] 창간호 한국어판에는 김구 주석을 비롯하여 광복군 총사령부의 이청천∙황학수∙김학규∙이복원∙김광 등이 국내외 동포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글들을 실었다.
선생은 [광복] 창간호 한국어판에 ‘한국(韓國) 여성동지(女性同志)들에게 일언(一言)을 들림’이라는 문장을 게재하였다. 이 문장에는 선생의 항일독립사상과 평등 여권의 실현 방략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선생은 한국여성의 존재를 20억 세계인 가운데 절반이 되는 10억 세계 여성 인구의 구성으로 보고 “우리 여자가 없으면 세계를 구성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우리 민족을 구성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한국여성의 존귀한 존재성을 강조하였다. 이어 세계 흥망과 민족 존망의 책임 남녀 모두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서반아(스페인) 여성들은 자국의 내란이 일어났을 때, 여성들이 어깨에 총을 메고 전선에 나가 남자 못지않게 싸웠으며, 중국여성들도 맹렬하게 항일전투에 참여하였다는 실제적인 사례를 밝혔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을 볼 때에 국망 30년 동안 조국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국내와 만주 및 관내에서 맹렬한 활동을 한 것은 주로 남자 동지들이고 여성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니 참으로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녀평등과 여권을 찾으려면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국가와 사회의 임무를 져야만 하며, 바로 지금 여자들에게 그 기회가 왔음을 강조하였다. | |
안휘성 부양에서 임시정부 군무부의 모병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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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선생은 서안에서 1년 반 동안 [광복] 기관지 간행을 통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선생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는 초모공작(招募工作), 즉 모병 업무를 강화하기 위해 서안에서 제3지대를 편성하였다. 1942년에 접어들면서 군무부는 선생으로 하여금 김학규 등과 함께 서안보다 더 전선과 가까운 산동반도로 가서 초모공작을 할 것을 명하였다. 1942년 2월 제3지대는 처음 징모처(徵募處) 제6분처(第6分處)라는 이름으로 서안에서 머나먼 그렇지만 조국과 가까운 산동반도를 목적지로 정하고 출발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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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부군인 김학규 선생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 소속되어, 초모공작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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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지대의 공작지점으로 예정된 산동반도는 화북의 요충지이자 국내와 만주지역의 교포들과 상호연락이 용이한 지점이었다. 산동반도를 향해 서안을 출발한 김학규 일행은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그 중간지점인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 정착하고 말았다. 산동반도의 전세가 매우 급하여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제3지대는 1945년 일제 패망 때까지 안휘성 부양에 거점을 두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부양은 지형상으로 일본군의 포위망 속에 있던, 그리고 일본군 점령지역과 근접해 있는 지역이었다. 때문에 적후에서의 초모공작을 전개하는 데는 더 없이 유리한 지점이기도 했다.
제3지대는 부양 시내 호정원항(胡井院巷)에 ‘한국광복군 초모위원회(韓國光復軍招募委員會)’라는 이름의 간판을 내걸고 활동하였다. 선생은 제3지대에서 지대장 김학규의 참모이자 기밀 담당 비서로서 활동하였다. 선생의 대원 관리 능력은 매우 세심하고 철저하였다. 새로운 대원들이 들어올 때마다 선생은 그들을 격려하였다. 이때 광복군에 참여하였던 대원들의 회고에 의하면, 광복군에 투신하였던 대원들은 선생의 자상한 보살핌과 배려에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 |
제3지대의 초기 활동은 지하공작을 통해 적 점령 지구에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안휘성을 비롯하여 강소성(江蘇省)∙하남성∙하북성(河北省) 등이 주요 공작지역이었고, 서파(徐波)∙김광산(金光山)∙신규섭(申奎燮)이 공작원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초창기 초모공작활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초모공작이 현저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은 1944년에 들어서면서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전개된 지하활동을 통해 적점령지구에 있는 교포 청년들이 규합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국내에서 징집되어 중국전선에 배치된 한인 학도병들이 대거 일본군을 탈출하였다. 1944년 1월 20일 ‘반도인 학도육군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한 학도병들이 2월 중순경 서주(徐州) 등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고, 이들이 연이어 일본군을 탈출한 것이다. 초모된 교포 청년들과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은 광복군 지하 공작원들을 통해, 또는 중국 국민군 유격대의 협조와 안내를 받아 부양으로 집결하였다. 1944년 9월경에 이르면 그 숫자는 기존의 기간요원들을 포함하여 7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들은 일정한 교육과 훈련을 거쳐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일부는 중경 총사령부로 갈 것을 지망하였고, 남은 일부는 잔류하여 제3지대의 골간이 되었다. 이들은 본부요원과 신입대원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담당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적 점령지역으로 나가 초모공작을 전개하는 지하공작대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초모공작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어 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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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제3지대 창설 기념 사진(1945년 6월)
제3지대의 초모활동은 군무부에서도 극찬을 할 정도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군무부장은 임시의정원에 대한 보고에서 1945년 3월 말 현재 제3지대의 인원을 관좌(官佐) 4명, 대원 112명, 사병 3명 등 모두 119명으로 보고하였다. 1944년 11월 한군 광복군훈련반(약칭, 한광반) 출신을 비롯하여 모두 53명을 중경으로 이송한 것까지 포함한다면, 제3지대는 3년여 동안 거의 160여 명의 인원을 초모 확보한 셈이다. 군무부에서 1945년 3월 말 현재 초모공작에 의해 규합한 인원을 339명으로 보고한 것으로 보면, 160여 명을 초모한 제3지대가 광복군 전체에서 규합한 인원의 약 절반을 초모한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처음 8명으로 출발한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 |
해방 후 상해에서 교민들의 안전한 귀국을 돕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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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선생은 김학규와 함께 상해에 진출하였다. 김학규는 상해에 광복군총사령부 주호판사처(駐滬辦事處)를 설치하고 판사처 처장에 취임하였다. 선생은 김학규를 도와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상해에 모여 있던 3만여 교민들을 안전하게 귀국시키는데 진력하였다. 선생은 1946년 가을 김학규와 함께 상해에서 만주 심양(沈陽)으로 진출하였다. 선생의 만주행은 1934년 김학규와 함께 농사꾼 부부로 위장하여 관내지역으로 이동한 지 12년 만이었다. 선생은 심양에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심양이 중국공산당의 공세에 함락 위기에 처하던 1948년 4월이 되어서야 선생은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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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평안북도 선천군 신부면 출생 1929년 화흥중학부설 사범과 졸업, 이후 민족교육에 전념 1930년 배달학교 교사, 조선혁명당에 가입 1931년 조선혁명군 사령부 군수처 근무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사무 및 선전사업 1942년 안휘성에서 모병 임무 수행 1946년 만주 심양, 애국부인회 위원장 1948년 4월 조국으로 귀국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
- 글 김광재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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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