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문성식 2010. 11. 15. 11:03

본래 우리의 독립은 평화회의나 모종의 유력한 단체로부터 승인을 받던지, 첩지(帖紙)를 내어 주듯 할 것이 아니오. 우리의 최고기관으로부터 각 단체 또는 전 민족의 합심과 준비 여하에 달렸나니, 이것이 있으면 우리에게 독립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파멸이 있을 따름이오. 고로 금일 우리 민족은 그 멸취(滅取)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오.

-1921년 1월 상해 환영회 석상에서의 연설 중에서-

 

 

서양식 근대 교육을 받고 <독립신문>사에 입사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 1. 29~1950. 12. 10) 선생은 1881년 1월 29일 조선 문신이었던 김지성(金智性)과 경주 이씨 사이의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풍(淸風), 호는 우사, 죽적(竹笛)이며, 중국에서 활동할 때 김성(金成), 중문(仲文), 일민(一民), 왕개석(王介石) 등의 이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부친 김지성은 선전관을 역임하였고, 개항 이후에는 외교 관리로 일본과 러시아 등지를 다녀온 적도 있었다. 선생이 태어난 곳은 부친이 관리로 있던 동래부였으나 본적지는 강원도 홍천이다. 양반 관리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선생의 성장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것은 부친이 부산 개항장에서 일제가 불평등 무역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그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도리어 귀양을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충격으로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선생은 4세의 어린 나이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었다. 때문에 선생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목사 집에 입양되어, 1887년부터는 그가 세운 고아학교인 민로아학당과 구세학당에서 서양식 근대 교육을 받고 1896년 졸업하였다.


 

그 후 선생은 당시 국문과 영문으로 발간되던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활동에 관심을 가졌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서재필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국민계몽 및 정치, 사회 운동 단체로서 자주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조국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근대식 교육을 받았던 선생이 이 같은 독립협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언더우드 목사의 주선으로 <독립신문>사에 입사하였고, 또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독립신문>사에 근무하면서 선생은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 의식세계 또한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이때 서재필은 유망한 청년들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는데, 선생 또한 그러한 권고를 받았던 것 같다.

 

 

서재필의 영향으로 미국 유학 단행,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

약관의 나이에 미국 유학을 단행한 선생은 1897년 가을, 버지니아주에 있는 로녹(Roanoke College)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선생이 로녹대학을 택한 것은 학장인 드레허(Dreher)가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던 탓도 있지만, 1893년부터 30여 명의 한국 학생들이 이 대학에 유학하였으므로, 당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가운데는 광무황제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李堈)도 있었다. 선생은 유학시절 1년 만에 준우등의 성적으로 예과를 졸업하는 등 발군의 성적을 보였다. 그리고 본과에 입학해서도 전 과목 평균 90점 이상을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라틴어, 불어, 독일어 등 외국어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선생이 생전에 영어, 불어, 중국어, 일어는 물론, 러시아어, 독어, 라틴어, 인도어까지 구사하였다고 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이는 선생이 파리강화회의의 한국 대표로 선발된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선생은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가며 어렵게 유학생활을 마치고, 1903년 6월 로녹대학을 졸업하였다. 이때에도 선생의 성적은 전체 졸업생 가운데 3등이었고, 또 그래서 졸업생 대표로 선발되어 기념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1903년 가을 선생은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고국에서 자신의 이상을 펼 결심으로 1904년 봄 귀국 길에 올랐다. 귀국 후 선생은 새문안교회를 중심으로 언더우드 목사를 도와 선교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경신학교, Y.M.C.A 학관, 배재학당 등에서 교육과 민중 계몽운동에 전력하였다.

 

 

상해 망명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하지만 이 시기 조국과 민족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특히 한국 강점 직후 일제는 식민통치체제의 안정을 위하여 민족운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1910년 12월 황해도 지역 민족운동자 탄압에 이용된 안악사건이었고, 이듬해 신민회 민족운동자들을 겨냥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조작 사건’이었다. 안악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김구를 체포하였으며 데라우치 암살 사건을 빌미로105명의 신민회 민족운동자들을 기소한 것이다. 이 때문에 국내의 독립운동 기반이 붕괴되었고, 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로 망명하였다. 선생 또한 이때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할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선생은 호주 유학을 핑계로 망명길에 올라 1913년 4월 중순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서 선생은 신규식의 주도로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이 1912년 7월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동제사는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 주력하였고, 선생은 이 학원의 영어 교수직을 맡았다. 그 같은 토대 위에서 선생은 김성(金成)이라는 가명으로 1917년 7월 신규식, 조소앙, 박은식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통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로 파견

한편 이 시기에 국제 정세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즉 제1차 세계대전의 과정에서 폭압적이고 착취적인 식민주의, 제국주의는, 정의와 평화를 주창하는 인도주의와 민족주의의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더욱이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노농정권이 들어서면서 약소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지원을 선언하자,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와 반(半)식민지 국가의 민족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나아가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상해의 독립운동자들은 이를 기회로 독립운동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8월 여운형, 서병호, 김철, 조소앙 등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특히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대표를 파견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폭로 선전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영어와 불어에 능통한 선생이 파리에 가서 한국 대표로 활동할 인물로 선발된 것이다. 당시 선생은 김순애 여사와 재혼한 직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한청년당의 요청이 있자 이를 기꺼이 수락하고, 2월 1일 파리를 향해 상해를 출발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선생(맨 앞줄 오른쪽). <출처:Wikipedia>


선생이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것은 3월 13일이었다. 여기에서 선생은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접하고 용기 백배하여 파리 샤토당가에 한국대표관을 개설하고 본격적인 독립 외교활동에 들어갔다. 곧 이어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선생은 외무 총장 겸 강화회의 파리 대표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선생은 한국대표관을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로 개칭하고, 부위원장에 이관용을, 서기장에 황기환을 임명하였다. 이어 파리위원부에 통신국을 병설하고 회보를 발간하여 각국 대표들과 언론사 및 주요기관에 배포함으로써, 3.1운동 등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세계 만방에 알렸다. 뿐만 아니라 강화회의에 <일본으로부터 해방 및 독립국가로서 한국의 재편성을 위한 한국 국민과 민족의 주장>이라는 공고서와 비망록을 제출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역사적 사례와 국제관계, 국제법 등을 활용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공격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여 갔다. 비록 열강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한국 문제는 상정되지 못하였지만, 선생의 독립 외교활동은 파리강화회의가 끝난 뒤까지도 이어졌다. 즉 선생은 [한국의 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발간하고, 각국 대표들을 방문하여 3․1운동 이후의 국내 상황을 전하며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설파해간 것이다.

 

 

제국열강을 향한 호소를 포기하고 피압박 국가간의 연합을 택하다

이후 선생은 이승만의 초청으로 미주에서 외교활동을 벌이고자 1919년 8월 8일 미국으로 향하였다. 미국에 도착한 선생은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임정의 구미 동포들에 대한 행정업무를 대행하면서 독립 외교업무를 수행하여 갔다. 즉 선생은 이승만, 서재필과 함께 미국무성 당국자들과 접촉하여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후원을 요청하는 등 외교 선전활동을 펼쳐간 것이다.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가 발족하자 선생은 학무총장에 선임되었고, 1920년 12월 그 동안 미주에서의 활동을 접고 하와이를 거쳐 다시 상해로 향하였다. 오랜 항해 끝에 선생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21년 1월이었다. 상해 도착 후 선생은 독립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는 중국 정부와의 협조가 필수적임을 인식하여 1921년 4월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창립하였다. 그리하여 한중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갈 기구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선생이 통합 임정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직후, 임정은 내분으로 약화되고 있었다. 그 동안 미국에서 활동하던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1920년 12월 상해에 도착하여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독립운동 방략(方略)의 차이로 국무총리 이동휘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즉 외교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이승만과 무장투쟁을 강조하는 이동휘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 것이다. 그 결과 이듬해 1월 이동휘가 임정을 떠났고, 이승만 또한 같은 해 5월 상해를 떠나고 말았다. 이에 초기부터 임정을 이끌어 왔던 안창호는 독립운동 세력의 대동단결을 위해 혁명적 조치가 필요함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안창호는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창하였다.


이때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태평양 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열강들이 군비 축소문제와 극동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1921년 11월부터 워싱톤에서 태평양회의를 열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임시정부에서는 여기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켜 파리강화회의에서 이루지 못한 민족독립을 다시 한번 관철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임정에서는 이승만을 전권대사, 서재필을 전권부사로 하는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여 적극적인 독립 외교활동을 벌이게 하였다. 안창호가 제안한 국민대표회의는 태평양회의로 말미암아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때 소련으로부터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즉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해를 조정하기 위한 태평양회의에 대응하여 약소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고 있던 레닌 정부가, 같은 시기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를 모스크바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선생은 이때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 참가를 결정하였다. 그것은 파리강화회의와 미주 지역에서의 외교 활동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열강에 호소하여 한국 독립을 성취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김규식, 이승만, 송헌주. 주로 미국에 근거를 두고 외교활동에 진력하던 시절.

 

1922년 1월부터 2월까지 개최된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 선생은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의장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레닌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하였다. 회의가 끝난 뒤 1922년 5월 상해로 귀환한 선생은 본격적으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위해 힘썼다.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가장 첨예하게 맞선 것은 새로운 임시정부를 창조하자는 ‘창조파’와 기존의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의 대립이었다. 선생은 창조파의 입장에 있었다. 양측의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자, 창조파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회의를 가졌다. 여기서 창조파는 임시의정원 대신 국민위원회를 설치하여 33명의 국민위원을 선출하였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였다. 선생은 국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새 정부의 외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나아가 임정의 국민대표회의 해산 명령이 있자, 선생을 비롯한 창조파 일행은 레닌 정부의 후원을 예상하고 연해주 해삼위로 갔다. 하지만 1924년 1월 레닌 사망 이후,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소련정부의 입장이 바뀌게 됨에 따라 선생을 비롯한 창조파 인사들은 노령으로부터 퇴출 명령을 받았다. 제국주의 열강의 행태에 실망했던 선생은 소련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조차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중국의 항일운동 세력과 연합 모색

이후 상해로 다시 돌아온 선생은 교육운동에 매진하였다. 국제 관계의 냉혹함을 계속해서 맛본 선생에게 있어 그것은 삶의 돌파구이자 새로운 독립운동의 모색 기간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상해 복단대학과 동방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한인 학생들의 민족교육을 위해 중등 과정의 고등보습학원을 세워 운영한 것이다. 그리고 1927년에는 천진으로 옮겨 북양대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교수로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선생은 천상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선생에게 있어 민족독립의 문제는 삶의 원천이요 희망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정세가 변하자 선생은 다시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즈음 일제는 1931년 9월 이른바 ‘만주사변’과 1932년 1월 ‘상해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 민중의 항일 열기가 높아짐에 따라 민족의 모든 역량을 한중 연대와 대일(對日) 항전에 결집할 필요성이 증폭되어 갔다.


이 시기 상해로 다시 돌아온 선생은 한국독립당이유필과 협의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운동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여 갔다. 그리하여 선생은 1932년 11월 남경에서 한국광복동지회의 대표로서 (상해)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혁명당 등의 대표들과 협의하여 민족협동전선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탄생시켰다. 이 동맹에서 선생은 상무집행위원과 외교위원장을 맡아 중국측 항일운동세력과 연합을 모색하여 갔다. 그 결과 한중 양민의 항일운동단체로 ‘한중민중통일동맹’이 결성되었다. 선생은 이들 두 동맹의 대표로 1933년 1월 미국에 파견되었는데, 그것은 항일 투쟁 자금의 모금을 위한 것이었다.

  

 

조소앙, 김원봉과 함께 민족혁명당 창당

1933년 8월 미국에서 수천 불의 투쟁자금을 모금하여 귀환한 뒤, 선생은 민족대당 건설에 나섰다. 그것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가맹단체 간의 연락 협의기관의 성격을 띠었으므로, 그 결속력과 통제력에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민족대당의 결성이 요청되고 있었다. 특히 선생은 기존의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를 해소하여 민족대당을 창당하는 방식의 민족통일전선 형성에 진력하였다. 그 결과 1935년 7월 남경 금릉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 아래, 선생이 대표인 대한독립당과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등 5당 통합으로 민족혁명당의 창당이 이루어졌다. 민족혁명당은 삼균주의와 사회주의를 수용한 진보적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아래와 같은 강령을 내걸었다.

1. 구적(仇敵) 일본의 침략세력을 박멸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완성한다.
2. 봉건세력 및 일체의 반혁명 세력을 숙청함으로써 민주집권제의 정권을 수립한다.
3.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를 소멸하고 국민의 생활상 평등의 제도를 확립한다.
4. 토지는 국유로 하고 농민에게 분급(分給)한다
5.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적 기업은 국영으로 한다.
6. 국민의 일체 경제적 활동은 국가의 계획하에 통제한다.

이러한 진보적 민족주의 이념은 당시 조소앙, 김원봉과 함께 규칙 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던 선생의 신념과 이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선생이 해방 직후 좌우합작위원회, 남북협상 등 민족 통일운동에 심혈을 쏟았던 근저에는 바로 이 같은 진보적 민족주의 이념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혁명당에서 선생은 최고 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그리고 국민부 부장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에서의 실질적인 활동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것은 평생을 두고 선생을 괴롭히던 건강상의 문제였다. 그래서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이자 당원으로서 신분은 유지하고 있었으나, 1936년 이후 선생은 주로 사천성 성도의 사천대학에서 외국문학과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주석 김구와 함께 독립 이끌어

한편 1937년 7월 7일 일제는 노구교사건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상황 변화에 따라 한국독립운동 세력은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대일 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 (재건)한국독립당, 조선 혁명당 등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이었다.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의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이었다. 한국독립운동 세력의 이러한 양대 분립은 대일 항전 수행에 차질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내외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특히 이들 광복진선과 민족전선 모두에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던 중국 국민당 정부의 합작 촉구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들 양대 계열의 중심 인물인 김구와 김원봉은 1939년 5월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에서 통합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939년 8월 27일부터 광복진선과 민족전선 양측의 통합회의가 열렸지만, 이 회의는 통합 방식을 둘러싼 상반된 입장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0년 5월 중경에서 한국국민당, (재건)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우익 3당만이 통합하여 (중경)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고,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같은 해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것이다.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오른쪽에서 4번째가 선생. <출처: wikipedia>

 

 

한편, 민족전선을 주도하던 민족혁명당은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한중 연합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1년 봄, 조선의용대 병력의 상당수가 화북으로 이동함으로써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은 임정 참여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용대 잔여세력 또한 이듬해 7월 광복군에 합편되었다. 따라서 중국 관내에서 좌우익 세력을 대표하는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가 임정을 중심으로 연대와 통합을 이루게 된 것이다. 사천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선생 또한 이때 중경으로 와서 1942년 10월 임정의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고, 동시에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선생은 1943년 2월 개최된 민족혁명당 제7차 전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4월 주석과 부주석제를 채택한 임정의 5차 개헌에 따라 부주석이 된 것이다.


따라서 임정은 한국독립당을 대표하는 김구 주석과 민족혁명당을 대표하는 김규식 부주석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럼으로써 이들 양대 정당을 중심으로 여러 독립운동 세력이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가며 조국 광복을 이루어낸 것이다.

 

 

광복 후 납북되어 같은 해 서거

1945년 8․15 광복 이후, 선생은 임정 요인들과 함께 11월 23일 1차로 귀국하였다. 선생은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으로 신국가 건설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힘썼다. 특히 남북 양쪽에서 단독정부의 수립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이를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김구선생과 더불어 민족분단으로 치닫고 있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기 위해 1948년 4월 북행하여 남북협상에 참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모두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민족분단 상황을 맞이하자, 선생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우려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선생이 그토록 우려하던 일이 결국 벌어지고, 그 와중에서 선생은 납북되어 같은 해 12월 10일, 평북 만포진 부근에서 7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사진. 오른쪽 두 번째가 김규식 선생. <출처: wikipedia>

약력

1903 로녹대학 졸업
1917 대동단결선언 발표
1919 파리강화회의 민족대표로 참가
1922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 한국 대표로 참가 
1933 조소앙, 김원봉과 함께 민족혁명당 창당
1943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선출
1950 납북 후 서거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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