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기계적 신앙, 인격적 신앙

문성식 2018. 12. 31. 15:10

 기계적 신앙, 인격적 신앙  

 

2. 궁극적 절대자의 비인격화

(1) 사단의 전략사(戰略史)
C.S.루이스의 아이디어처럼 "사단이라면 어떻게 할까? 라고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작업이다.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사단이라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정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이다.7)
사단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기를 원한다. 사단은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스스로 올라 자신이 우주의 주권자가 될려고 하는 교만을 품고 타락하였다. 그 후 지금까지 사단은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할 영광을 가로채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역사해왔다. 티모시 워너(Timothy M. Warner)의 말대로 영적전투는 영광이 걸린 싸움이 되었다.
사단이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전략에는 긍극자에 대한 비인격화가 있다. 비인격은 주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영광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단은 인격적인 영적 존재인 하나님을 "긍극적 원리"나 "힘"으로 간주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을 비인격화함으로써 사단이 노리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인류의 종교사는 궁극적 절대자가 어떻게 비인격화되어갔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세속 종교학자들 중에는 다신론적 사고에서 유신론적 사고로, 그리고 비인격적 궁극자로 인간의 사고가 발달되어 간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주장은 부분적으로 옳다. 그러나 사단이라면 분명히 이러한 전략을 사용하리라 예상된다.

①정령숭배 신앙
인류가 타락을 한 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인간의 총체적인 인식능력에 전락이 있었다. 인간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상실했을 뿐아니라 위임된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상실하였다. 인간의 도덕적 능력도 전락되어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도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동료 인간과도 평화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자연환경도 전락되었다. 인간의 영적 권위 하에 위임되어 있었던 자연은 힘의 권위 하에만 복종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장으로 떨어졌다. 인간은 갑자기 원시적인 상태로 전락했다. 자연은 인간에게 위험스러운 것이 되었고 인간은 자연을 다스리기는 커녕 자연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사단이 인간의 두려움이라는 약점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사단은 인간이 두려워하는 모든 자연현상, 동식물 등에 신적인 힘이 있는 것처럼 역사하였고 인간이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경배와 영광을 가로채어 자기의 것으로 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원시적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신앙형태가 정령숭배신앙이다. 중국의 자연신들은 풍사(風師), 우사(雨師), 뇌사(雷師), 운신(雲神), 일월성신(日月星辰, 사직(社稷), 오사(五祀), 오악(五嶽), 산림(山林), 천택(川澤) 등의 자연현상 들이었다. 인도에서도 베다 초기의 자연신들은 하늘의 신 댜우스(Dyaus), 태양의 신 미트라(Mitra), 천둥과 폭풍의 신 인드라(Indra), 폭풍우의 신 마루트(Maruts), 바람의 신 바유(Vayu), 불의 신 아그니(Agni), 땅의 신 프르티비(Prthivi) 등과 같은 자연현상이었다.

②최고신; 태양신 신앙
인간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고, 따라서 궁극적 절대자이신 한 분의 신을 바라는 경향이 잠재되어 있다. 인간이 자연현상에 대해서 좀 더 잘 적응하고 자연에 대한 맹목적인 두려움에서 다소간 벗어났을 때, 이러한 자연의 힘 배후에 있는 통일적인 힘의 근원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단도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이용하지 않을리 만무했을 것이다. 사단의 두번째 전략은 이러한 여러가지 신들 위에 최고신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태양신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최고신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자연현상 중에서 태양의 중요성에 비길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최고신은 태양신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태양신이야말로 바알신앙, 즉 자연주의적 순환론을 제시하기에 적합한 것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자연주의적 순환론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사역을 은폐하고, 인류의 초기에 일어났던 하나님에 대한 사단의 반역사건을 감춘다. 순환론의 기원과 발생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순환론의 기원은 인생의 생사(生死) 주기와 뱀이 주기적으로 허물을 벗는 것과 태양의 주기를 관측하게 된 것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신화적 사고에 있어서 뱀이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불멸(不滅)을 의미하는 것이다. 순환론적 사고와 태양숭배 사상은 불가분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전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바빌론의 신(神) 말둑(Marduk)은 태양신이며, 인도에서 삼신(Triad)인 브라마, 비쉬누, 시바도 태양신이다. 이집트에서 오시리스는 태양신이며, 파라오는 태양의 아들이다. 남미의 잉카와 마야 문명에도 태양신 숭배 사상의 흔적이 뚜렷하며, 그리고 중국의 상제, 한국의 하느님, 일본의 아마데라스 등의 신들이 모두 태양신이다. 수많은 문화와 세계관들이 태양신 숭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과 오직 성경만이 태양신 숭배를 반대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신4:19, 겔6:6-7, 6:4, 8:16-18, 레26:30, 왕하23:11, 대하14:5, 34:4,7, 사17:8, 27:9)
바빌론과 인도 등의 순환적 우주관은 "세계년"(世界年 World year) 혹은 "신년"(神年 Divine year)의 순환이라는 관념을 낳았다. 뉴에이지 운동은 이러한 신년(神年)의 개념에 입각하여 물병좌 시대의 도래를 말하고 있으며 증산도(甑山道)도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천지개벽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주의적 순환관은 윤회 사상, 점성술, 세계년(World year) 사상, 그리고 태양신 숭배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점성술이 황도(黃道), 즉 태양이 지나가는 길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는 것은 태양신 숭배와 점성술의 관계를 말해준다. 윤회사상의 기본적인 관념도 불사(不死)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태양 숭배에 투영했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③궁극자의 비인격화
인간이 자신의 이성에 도취하여 "합리성"을 진리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만큼 교만해졌을 때 사용된 사단의 세번째 전략은 아마도 인격적 신을 비인격화하도록 부추기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인격적 신 대신에 "궁극적 원리", "비인격적 궁극자" 등이 보다 세련되고 합리적으로 느껴질 때 사단이 인간의 이러한 생각들을 활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원래 중국에서 상제(上帝)는 비록 태양신이라고 간주할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신이었다. 상제는 자연 현상의 주재자(主宰者)이며 자연적 재앙의 최종 원인으로 간주될 뿐 아니라, 또 인간사를 주재하여 전쟁의 승패, 도읍의 건설과 멸망을 관장한다고 생각되었다. 상제는 조상신과는 달리 초월성을 가지며 제사로써도 그 마음을 바꿀 수 없는 원리적 성격을 띤 절대적 존재로 간주되었다.8) 이러한 상제의 개념이 주말(周末) 춘추시대에 들어오면 "천"(天)의 개념으로 대치된다. 이 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논어(論語)에는 천이 인격적인 절대자로서 묘사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자연적 원리로서 간주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가면 천(天)의 비인격성은 명백히 드러난다.
춘추전국 시대에 들어오면 고대의 인격적인 상제에 대한 신앙에 회의가 일어나는 것을 본다. 오랜 전쟁과 사회혼란이 던져준 불행 때문에 사람들은 천의 선한 의지와 자비에 대해서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천이 가진 인격성을 배제하고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인 원리로서의 천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9) 노자의 경우도 천(天)을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도(道)의 개념으로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노자는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담담하게 여긴다."(天地不仁 以萬物爲鄒狗;5章) 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도는 아마도 상제(上帝)보다 먼저 있은 것 같다"(象帝之先;4章) 라고 말한다. 노자의 도는 인격적인 창조주가 아니라 비인격적 근원이며, 만물은 도의 자기 전개에 불과하다. 노자는 이것을 "도(道)는 일(一)을 낳고 일(一)은 이(二)를 낳고 이(二)는 삼(三)을 낳고 삼(三)은 만물을 낳는다"10)라는 말로 표현한다.11)
천의 비인격성은 한대(漢代)의 동중서(董仲舒에 오면 더욱 확고해진다. 그리고 송대(宋代) 이후의 성리학에서는 궁극적 절대자는 이(理), 태극(太極) 등의 원리적 개념으로 바뀐다.
힌두교에서도 최초에 나타나는 베다의 신들은 비록 다신론적이기는 하지만 인격적인 신이었다. 이러한 신들은 자연현상의 배후에 있는 힘의 근원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와같이 세계가 여러 힘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보는 다신론적인 사고방식 외에 유일신론적 사고방식도 나타난다. 프라자파티(Prajapati)는 "생물의 주"라는 뜻을 가졌는데 원래는 다른 신들의 칭호로 사용되다가 나중에는 독립적인 창조의 신으로 널리 숭배되었다. 비슈바카르만(Visvakarman)은 "모든 것을 만든 자"라는 뜻으로 역시 인드라나 태양신들과 같은 신들의 별칭이었던 것이 세계창조의 신으로 숭배되었다.12) 절대신의 완전한 비인격화는 우파니샤드에 와서 이루어진다. 우파니샤드에서 궁극적 절대자는 비인격적인 브라만(Brahman)으로 나타난다. 인격식으로서의 유일신은 낮은 단계의 의식에서 인식되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높은 단계의 의식에서는 비인격적인 브라만으로 인식되어진다고 생각되어졌다.
서양에서는 계몽주의 이후에 이신론(理神論;Deism)적 사고가 발생한다. 유신론에서는 인격적이고 초자연적인 한 분의 신을 말하지만, 이신론에서는 신이 자연과 자연법칙을 창조했으나 자연과 역사에서 생기는 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신론에서 신은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인 법칙의 관리자이며 인간과 어떠한 인격적인 관계도 맺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뉴우튼 물리학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계몽주의는 일종의 자연주의이다. 자연주의의 세계관에서는 자연은 신과 인격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자연법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돌아가야 하는 기계적인 관계를 맺는다.

(2) 인격적 관계, 인격적 신; 성경적 세계관

①인격적 관계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자연조차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실하심 때문에 자신이 제정하신 자연법칙대로 매일 매순간 자연을 주관하시고 붙드신다. 공중에 새 한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10:29) 그러므로 자연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또 모든 피조물은 구속의 날을 기다리며 허무한 것에 굴복하는 것을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한다.(롬8:19-22)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자연법칙을 멈추었을 때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자연적 현상이든 초자연적 현상이든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의해서 인격적 관계로 주관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연과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계신다면 인간과의 관계는 더 말할나위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기계적 관계로 간주하는 것이 도덕적 인과율이다. 자연법칙의 기계적 인과율이 인간 행위의 법칙으로 적용되었을 때 비인격적인 인과율의 시스템이 발생한다. 그것은 "심은대로 거둔다"는 카르마의 법칙이나 율법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인과율은 현상을 기계론적인 메카니즘으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과율에서 원인의 집합은 곧 그에 대응하는 필연적이고 정확한 결과를 산출한다. 인과율은 세상의 고통과 악에 대하여 손쉬운 설명을 제공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과업보적인 기계론적 인과율로 현상을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성경은 기계적인 인과율을 반대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인 자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을 보면 이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님은 이러한 인과율적 사고에 대해서 반대한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1-3) 욥의 고난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 또한 인과율적인 사고의 전형을 보여준다. 친구들의 주장은 욥이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논쟁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은 이러한 인과율적 사고를 전혀지지 해주지 않는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체면, 영광이 걸린 영적전투였던 것이다.
"믿음"은 인격적 관계의 상징어이다.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인격적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다. "행위구원"은 기계적 관계의 상징어이다. 만일 친구 사이에 베푼만큼 갚아주어야 한다는 엄밀한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참된 인격적 관계는 아니다. 인과율에 매어있는 사람은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어려워한다. 얻어먹었으면 갚아주어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에 신세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신세를 진다는 것은 곧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과율에 젖어 있는 사람일수록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이처럼 인과업보나 "뿌린대로 거둔다"는 행위 구원의 사상은 철저하고 비인격적인 인과율의 시스템이다. 인과율에 의한 구원은 철저히 기계적인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②인격적 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인격적 신이란 그 신이 지,정,의를 가지고 있는 존재인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맺기를 원하는 신인가에 달려있다. 이슬람교의 알라는 분명히 존재론적으로는 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대체로 알라를 인격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무슬림들은 세상의 악과 고통에 대하여 운명론과 인과율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서 알라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신이 아니라 인과율의 집행자이다. 운명론은 일종의 기계론이다. 즉 각본에 짜여진대로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기계라는 것은 원래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이 꾸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기계적 영감설이다. 즉 문맹인 무함마드가 천사가 불러준대로 받아적은 것이 꾸란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신접술에서 영매들이 신접했을 때 행하는 자동기술(自動記述)의 기계적 방법과 전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성경은 유기적 영감설을 말한다. 하나님은 성경저자가 가지고 있는 개성, 즉 문체와 지식과 감정 등 모든 것을 그대로 사용하셨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이러한 개성에서 올 수 있는 죄성(罪性)과 오류들을 막으셔서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셨다.  성경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을 기계적으로 사용하시지 않고 인격적으로 관계하시는 진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격적 신이란 인격적 관계를 맺는 신이지 자유의지와 책임을 가진 인격이라는 사실만으로 인격적 신이라고 할 수 없다. 이신론의 신도 존재론적으로는 인격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신론의 신은 피조물과 어떤 인격적인 관계도 맺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신은 인과율의 설립자에 불과하다.

(3) 신비주의의 본질: 자아상실적 합일
신비주의는 기계적 신앙, 바알신앙의 또다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바알신앙에는 반드시 인격의 상실을 바탕으로 하는 신비주의가 따른다. 신비주의의 특징은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몰아, 황홀경, 주객합일, 삼매경 등의 용어로 설명되어져 왔다. 신비주의에서는 항상 자기 정체성(identity)의 상실을 동반하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이 나타난다. 신비주의는 자아상실, 즉 인격상실을 통한 합일이며 인격적 관계를 근거로 한 신앙이 아니다.

①기독교 신비주의
기독교 신비주의자로 알려진 엑크하르트는 하나님과 영혼의 상호작용에 있어서 네가지 단계를 제시한다. 첫번째 비유사성(dissimilarity)의 단계에서 구도자는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며 신이 모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신은 자신의 "아무것도 아님"(nothingness)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다음 단계인 유사성(similarity)의 단계에서 구도자는 하나님의 형상에 자기 자신을 부착시킨다. 그리하여 성부나 성자가 영혼 안으로 스며들어온다. 셋째, 동일성(identity)의 단계에서 구도자는 "영혼의 정수와 신의 정수는 하나이다"라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넷째로 약진(breakthrough)의 단계에서는 구도자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초월하며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심지어 신조차도 포기한다. 구도자는 신조차도 넘어서 무(nothingness)를 추구한다. 이 단계에서 구도자는 신이 의식되는 것을 넘어가며 신의 삼위일체나 혹은 명백한 신비적 합일 조차도 넘어서, 신을 넘어선 신성을 도달한다. 하늘이 땅을 넘어선 것처럼 알려진 신(God)을 훨씬 넘어선 신성(Godhead)에 도달한다.13)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에서는 신의 정체성과 나의 정체성의 구분이 없어진다. "나"라고 하는 정체성 의식의 상실, 자아상실을 통해서 신과 합일된다.

②이슬람 신비주의
이슬람 신비주의를 수피(Sufi)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피즘은 플로티누스의 유출설과 범신론에 힘입어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법을 개발하였다. 수피의 신비주의 체험은 주관적이어서는 안되며 단계적으로 객관화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비스타미(Bistami)는 이러한 단계를 참회, 금욕, 인내, 감사, 위탁, 희열, 소멸이라는 7단계로 두었고, 마지막에 자기 소멸에 의한 신과의 합일을 제시했다. 그리고 안사리(Ansari)는 신앙심의 각성으로 부터 신과의 합일에 까지 10단계로 나누고, 다시 각 단계를 10단계로 나누어서 모두 100개의 소단계로 구분하였다.14)
수피는 이러한 신에 대한 지식, 즉 신지(神智)를 얻는 길은 신과의 합일(合一)이나 신에 흡수되는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수피 알 할라즈(Al-Hallaj)는 "내가 곧 진리다" 라고 주장하여 처형당하였다. 그는 신과 자기의 정체성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을 신과 동일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과의 합일에는 반드시 자아상실이 필요했다.

③장자(莊子)
자아상실적인 주객합일의 신비주의 사상은 장자에서도 나타난다. 장자에 의하면 모든 것이 이미 하나이기 때문에 구별할 수 없다.(旣已爲一矣   無適焉 因是已;齊物論) "저것은 이것에서 나왔고 이것 또한 저것의 원인이기"(彼出於是 是亦因彼;齊物論) 때문에 만물은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장자에게는 시비(是非)나 생사(生死)와 같은 대립은 사실상 있지 않는 것이다.(方生方死 方死方生;齊物論) 장자에 있어서 절대자유를 획득하는 방법은 극한적 대립물의 대립과 주객의 차별을 넘어가는 것이다.
장자가 생각하는 주관과 대상의 합일(合一)은 지극히 자아상실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자에 나오는 우화 중에 대표적인 것이 "호접몽"(蝴蝶夢), 즉 나비가 된 꿈을 꾼 장주(莊周)의 이야기이다. 이 우화에서 장자는 장주(莊周)가 나비로 변한 꿈을 꾼 것이 현실인지, 그렇지 않으면 나비가 장주로 변한 꿈을 꾼 것이 현실인지 모르겠노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장자는 사물과의 합일(合一)을 "물화"(物化)라고 표현한다.15)

④기타
힌두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은 개별적인 자아(jiva)를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편재하는 몰개성적인 대자아(大自我) "아트만"(Atman)을 말한다. 개별적 자아는 환상(maya)이어서 실재하지 않으며 아트만만이 실재한다. 그리하여 "나"라고 하는 개별자의 정체성은 원래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초기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모든 존재는 자성(自性), 즉 고정불변하는 고유의 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무아설(無我說)이 가르치는 것은 "나"라고 하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현대 심리철학에서도 "나"의 정체성를 부정하려는 학설들이 많이 나타난다. 영생교에서는 "자아의식"을 죄의 근원으로 본다. 그러나 영생교에서 말하는 "자기부인"은 "자기 정체성(identity)의 상실"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⑤성경적 "자기부인"
성경도 "자기부인"과 "하나됨"을 강조한다. 인간의 원죄는 "나"를 높이고자 하고, 사물을 자기와 배타적으로 분리시키고자 하는 "자아의식"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아와 욕심, 그리고 죄의 상호연관성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들은 이 "자아"와 "욕심"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룬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들은 정체성으로서의 자기 자신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종교들은 개별자로서의 "자아의식"을 무지의 소치로 보고 그것을 뛰어넘어가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개별자로서 인식되는 세계를 "환상"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아가 대상에 접해졌을 때 일어나는 모든 욕망을 제거하려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부인"은 개체로서의 자기 정체성(identity)의 포기가 아니라 육체의 소욕(所欲)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所欲)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갈5:16,17) 성령님의 인격에 나의 인격이 완전히 순종되어 있는 것이 성령충만이고 완전한 자기부인의 상태이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결코 "나"라는 의식조차 상실하게 하는 자기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⑥신비주의의 결론
자아상실적인 신비주의의 결론은 에크하르트나 알 할라즈에서 본 것처럼 "내가 곧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창세기 3:5에서 사단이 최초의 인류에게 했던 거짓 가르침,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와 동일한 것이다.
바알신앙은 비인격적 관계, 기계적 관계를 원하므로 항상, 무인격적 상태를 원한다. 즉 자아상실, 의식상실의 상태로 유도한다. 신비주의에 수반되는 무아경, 몰아경, 환각상태, 최면상태, 무의식 상태는 사단이 원하는 상태이다. 자기 정체성의 상실, 인격의 상실 상태에서 사단은 역사한다. 신인합일은 결국 자기 인격을 상실하고 귀신의 인격에 의해서 점령된 상태이며 귀신에 의해서 조종되는 상태이다. 귀신은 그 댓가로서 잠시 동안 황홀경을 허락할 수 있다. 바알신앙에서는 자기의식의 상실을 위한 과정으로서 반복된 주문, 동작, 노래, 등이 따르며 귀신의 인격에 점령되었을 때는 광란과 자해 등이 나타난다. 갈멜산에서 엘리아와 대결하였던 바알선지자들은(왕상18:26-29) 이러한 전형을 보여준다. 또 이러한 현상은 마약, 오컬트(ocult) 등과 결부된 팝 음악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므로 무의식적 황홀경의 상태로 우리를 빠뜨리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관계하기를 원하시며 그 인격적 관계 안에서 생수와 같이 솟아오르는 기쁨과 평강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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