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기계적 신앙, 인격적 신앙

문성식 2018. 12. 31. 15:08

 

 기계적 신앙, 인격적 신앙(상)  

 

 

오늘날 세계 선교운동의 동향 중 하나는 성령운동에 의한 급격한 교회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고 우리나라도 그 예외는 아니다. "제3의 물결"이라고 하는 성령운동이 전세계를 덮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빈야드 운동에 대한 찬반 논의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러한 성령운동의 영향은 선교지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성령운동 중에는 올바른 것도 있지만 잘못된 것도 적지 않다. 사단은 항상 알곡 가운데 가라지를 섞는 전략을 좋아한다. 우리는 알곡과 가라지를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가라지 때문에 알곡까지 뽑아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올바른 성령운동의 기준이 무엇이며 성령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그 기준을 생각해보는 것은 유익한 작업이 될 것이다.


C.S.루이스의 저서 『스크류테이프 편지』에서 노련한 악마 스크류테이프는 그의 조카인 신출나기 악마 웜우드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물질주의적 마법사, 이러한 사람은 영의 존재는 부인하면서도 "힘"이라고 막연히 부르는 그것을 단순히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 진실로 숭배하는 사람인데, 이들은 바로 우리의 완벽한 작품이다." 1)여기서 스크류테이프가 가르쳐주고 있는 전략은, 사람들이 영적인 존재를 "비인격적인 힘"으로 생각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비인격화 전략, 이것은 바알주의, 즉 물질주의 혹은 자연주의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성령에 대한 잘못된 태도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성령님의 "인격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유니테리안이나 여호와의 증인 등은 성령님을 비인격적인 힘으로 간주하고 있다.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기(氣)사상과 기공(氣功)을 행하는 사람들도 성령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기(氣)의 힘으로 간주해버린다. 복음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지식적으로는 성령님의 인격이심을 인정하는지 모르지만 그 태도를 보면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대우해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성령님이 마치 비인격적인 힘이나 되는 것처럼 인위적인 방법으로 성령의 역사를 조장할려고 한다.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고 주님이시며 결코 인위적 조장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성령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주인이지 우리가 성령을 "부리는" 주인이 아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언제든지 문지르면 기계적으로 나타나서 우리를 위해서 봉사하는 알라딘 마술램프의 "전능한 종"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령님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며 철저히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령님을 철저히 "인격"으로 대우해드리고 성령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올바른 성령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 바알신앙의 특징

(1) 현세주의적 물질주의
바알신앙의 특징은 "푱요"와 "다산"이라고 하는 현세주의적 물질주의적 축복관을 제시하는 것이다. 바알신앙은 주로 태양신인 남신과 대지를 상징하는 여신이 결합함으로써 풍요와 다산을 준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태양이 땅에 잘 내려쬐었을 때 곡식의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 준다는 자연주의적 사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바알신앙은 풍요와 다산이라는 현세적 축복을 위한 신들의 성적결합을 재현하기 위해서 성전창녀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바알신앙의 모습은 중근동, 뿐아니라 인도 등지에서도 나타난다. 인도의 힌두사원에는 신들의 신성한 결합을 상징하는 남녀교열상들로 가득차 있으며 탄트리즘이라는 신비주의로 이론화되어 있다.


풍요와 다산은 현대의 물질주의에서도 "돈"과 "성"(性)의 결합으로 나타난다. "풍요로운" 삶을 자극하는 현대 물질주의의 선구자 광고는 섹스어필(sex appeal)의 기법을 통해서 더욱 큰 효과를 얻는다. 동시에 현대에는 뉴에이지 운동 등을 통한 신비주의의 확신이 두드러진다. 바알신앙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바알신앙은 풍요와 다산의 축복만을 말하고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 바알신앙은 죄의 문제를 은폐함으로써 "깨달음"의 논리, 신비주의로 나아간다. 그래서 바알신앙에서 현세적 기복주의와 신비주의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이 두가지의 공통점은 "죄"의 문제보다는 "고통"의 문제에 촛점을 맞추어서, 쾌락의 극대화와 고통의 극소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전자가 신의 힘을 현실에 끌어들여서 "고통의 제거"를 추구한다면 후자는 신과의 합일을 통해서 "고통의 제거"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교회에 침투한 바알신앙, 즉 물질주의는 심각하다. 교회가 죄를 지적하지 않고 현세적 축복만을 말함으로써 성도들은 진정한 구속의 감격을 누리지 못한다. 교회가 세상의 죄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교회의 타락을 책망하는 꼴이 되었다. 성령님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책망하시며, 구속의 은혜를 새롭게 깨닫게 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이 아니라, 현세적 축복을 가져다주는 전능한 종으로 간주되고 있다.

성령님의 능력은 복음전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 문제 해결, 이를테면 질병의 치유, 사업의 성공, "자기"교회의 양적 팽창의 도구로 간주되고 있다. 바알주의의 현세주의적 축복관은 성공주의, 양적팽창제일주의, 결과우선주의, 개교회주의, 대교회주의를 배태시킨 온상이 되었다. 오늘날 풍요와 다산이야말로 많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궁극적 목표가 되어버린 것같다.

(2) 기계적 관계, 기계적 신앙
바알신앙의 특징은 기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복신앙에 무의식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은 기계적 관계이다. 신과 어떤 기계적인 관계를 맺고 기계적 행위를 함으로써 현세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계는 사람의 영적, 도덕적 상태와 상관없이 작용하는 것이다. 기계적 신앙이란 자신의 영적, 도덕적 상태와는 상관없이, 많은 기도, 혹은 많은 헌금 등, 어떤 투입(input)를 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세상적 복을 기계적으로 산출(output)해낼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다. 기복신앙에 있어서 "치성"(致誠)은 자신의 영적, 도덕적 태도의 변화를 전제로 하지 않고, 신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투입량의 증가일 따름이다.


바알신앙에서 신은 마치 알라딘의 마술 램프에서 나오는 힘세고 전능한 종처럼 램프 사용자의 영적, 도덕적 상태와는 상관하지 않는다. 램프의 소유자는 신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방법만 알면 신의 힘을 끌어낼 수 있고, 자신의 현세적 유익을 위해서 그 힘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알신앙에서는 주문(呪文)이 언제나 따라온다. 주문은 신적인 능력을 기계적으로 끌어내는 패스워드(Password)와 같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서처럼 주문(呪文)은 정확한 구절이기만 하면 그것을 외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작용한다.

①주문
주문은 신적인 힘을 끌어내기 위한 것일 뿐아니라 나아가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바알신앙은 기복적일 뿐아니라 신비주의적이다. 대체로 주문은 기도문이나 경전의 구절을 반복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주문은 그 내용에 대한 깊은 인식이나 신과의 인격적인 관계없이, 기계적인 반복의 형태로 신적인 힘을 끌어내거나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데 사용된다. 오늘날 주문을 사용하는 많은 종교들은 그것이 기계적 신앙임을 말해주고 있다.


무슬림들이 하루에 다섯번 요구받는 기도인 살라트(salat)는 몸을 씻는 정결의식, 반복된 동작과 반복된 기도문의 암송으로 되어 있다. 무슬림들은 "알라는 위대하다"와 샤하다를 읊은 후 꾸란 제1장과 다른 장 하나를 외운 후 허리를 굽혀 절하고, 그 다음 앉아서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두번 큰 절을 한 후 다시 일어선다. 예배의식에 사용되는 기도문은 암송해야 하고 기도하는 자의 모국어에 관계없이 아랍어로 기도해야 한다.2) 이슬람교 신비주의자인 수피들은 알라와의 합일을 체험하기 위해서 디크르(dhikr)를 사용한다. 디크르는 알라의 이름이나 짧은 종교적 구절을 반복해서 암송하는 것이다.3)


힌두교의 만트라(mantra)도 원래는 신에 대한 기도문이었다. 자연현상의 배후에는 살아있는 인격적인 신들이 있다고 생각되었으며 기도와 찬양과 제사를 통해서 이들 신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본래 제사는 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거나 신의 호의를 기원하는 신 중심의 행위였다. 그러나 제사의식이 점점 전문화되고 정교화되어짐에 따라 제사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바라문은 기도문을 주관하는 사제로서 올바른 제사를 통해 신에게 힘을 부여하고 그 힘이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되었다. 신들조차도 제사없이는 아무런 힘이 없으며,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신들이 아니라 올바른 제사의 행위자체라고 생각되어 바라문의 권위가 절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발전하여, 우주의 법칙(rta)이 있어서 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올바른 제사행위가 우주의 법칙적 힘을 기계적으로 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되었다. 여기서 우주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주문(mantra)는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좀 더 발전하여, 인간의 행위는 반드시 어떤 필연적인 결과를 끌어낸다는 카르마(karma)의 법칙, 즉 인과업보라는 비인격적 기계적 인과율의 법칙이 되었다.4)


불교의 진언(嗔言), 도교의 주문(呪文), 카톨릭 등에서 기계적으로 사용되는 주기도문, 영광송 등은 기계적 신앙의 한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개신교에서도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 등이 그 의미에 대한 묵상없이 기계적으로 암송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많은 종교들이 반복된 동작이나 반복된 노래, 반복된 기도문을 사용함으로써 신과 기계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 무아경, 황홀경을 추구한다.

②부적과 염주
주문이 신의 힘을 끌어내거나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청각적 패스워드(password)라면 부적(符籍)은 시각적 패스워드이다. 사용자의 영적, 도덕적 상태와는 상관없이 부적은 기계적으로 어떤 영적인 힘을 끌어들이거나 영적인 힘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도교에서 사용하는 부적은 귀신을 내쫓거나 부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부적은 자시(子時)에 만들어지는데, 향을 피워놓고 주문을 외워서 부적의 용도에 맞는 신이 강림하기를 비는 신접 의식을 행한다. 부적은 주사(朱砂), 혹은 먹물을 이용하여 붓으로 그리는데, 주로 변형된 한자나 티벳문자 등이 그려진다.5)


대중이슬람교에서도 부적을 사용해서 점을 치거나 병을 고치는 행위를 한다. 이슬람교의 부적은 주로 꾸란에서 따온 조각으로 아랍어 글자를 오려서 만든 것이다. 기적을 행하는 사람인 카라마(karama)는 꾸란의 구절을 종이에 기록해서 물에 담근 후 환자에게 그 물을 마시게 해서 병을 고치곤 한다. 혹은 꾸란을 암송 후 용기에 담긴 물 위로 숨을 쉬고 그것을 병자가 마시게 한다.6) 이러한 방법은 중국의 오두미도나 태평도와 같은 민간도교에서 환자에게 먹였던 부수(符水)와 너무나도 흡사한 것이다.


염주도 기계적 신앙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염주를 돌리는 반복된 동작은 곧 기계적 동작이며 기계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염주를 돌리는 반복된 동작이 주문을 외는 횟수를 세는 것이든, 정신집중을 위해 사용되어 몰아나 무아의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든, 혹은 염주 자체가 어떤 마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든, 그것은 신과의 어떤 인격적 관계도 전제를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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