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물

보물 제1845호 부여 사택지적비 (扶餘 砂宅智積碑)

문성식 2016. 11. 2. 22:26

보물 제1845호 부여 사택지적비 (扶餘 砂宅智積碑)

종목 보물 제1845호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지정일 2014.12.31
수량 1기
시대 백제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립부여박물관
자료출처 및 참조 문화재청

현존하는 백제의 유일한 비석이며, 높이 102센티미터, 너비 38센티미터, 두께 29센티미터인 비에 56자가 남아 있다. 1948년 부여읍 관북리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부여에 신궁(神宮)을 만들면서 그 도로에 깔려고 부여 읍내에서 초석이나 지대석 등을 가져와 모아두었는데, 광복 후 그 석재 속에서 학자들이 발견했다. 문체는 사륙변려체이고, 글씨체는 구양순체이다.

비문의 내용은 인생의 덧없음을 서글퍼하며, 불교에 귀의하여 금으로 법당, 옥으로 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부여 사택지적비는 백제 의자왕대의 인물인 대좌평 사택지적이 은퇴후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비석(碑石)의 형태를 갖춘 유물로서 백제인의 손으로 제작된 유일한 경우이다. 특히 대성팔족(大姓八族)의 하나인 사택씨(沙宅氏) 출신의 사택지적(沙宅智積)은 《일본서기》에서 대좌평(大佐平)의 지위로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사실이 확인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사찰의 전각(殿閣)과 탑상(塔像)을 조성하며 새긴 비석인 만큼, 문화적・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보물 제1845호. 의자왕 때의 대신 사택지적이 남긴 비이다. 1948년 역사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황수영(黃壽永)과 홍사준(洪思俊)이 부여에서 발견하여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비는 대좌평(大佐平)을 역임하였던 사택지적이 말년에 지난날의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면서 만든 것이다. 남아 있는 비의 형태는 높이 101㎝, 너비 38㎝, 두께 29㎝이며, 글씨를 쓰기 위하여 정간(井間)을 쳤다. 정간은 정방형으로서 한 변이 7.6㎝이며, 글자의 크기는 평균 약 4.5㎝이다. 그리고 비석 오른쪽에는 원내에 봉황문이 있고 주색(朱色)을 칠한 흔적을 약간 볼 수 있다.

 

비문의 전문을 보면 “갑인년 정월 9일 나지성의 사택지적은 몸이 날로 쉬이 가고 달로 쉽게 돌아오기 어려움을 한탄하고 슬퍼하여,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세우고 옥을 깎아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외외한 자비로운 모습은 신광(神光)을 토하여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아아한 인혜로운 모습은 성명(聖明)을 풀어서 □□한 듯하다(甲寅年正月九日奈祗城砂宅智積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 還穿金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吐神光以送雲峨峨悲貌合聖明以).”라고 되어 있다.

 

이 비문의 문체는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인데 문장이 유려하고 자체가 웅건한 구양순체(歐陽詢體)로서, 당시 백제의 문화 수준을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이 비는 문체나 비의 양식이라든가 비문에 나타나는 인물 등으로 보아 비록 단비(斷碑)이기는 하나 백제시대의 귀중한 금석문자료로 평가된다.

 

사택지적비는 백제 후기 귀족들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고 백제 관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 격조높은 문체와 서법은 백제의 수준높은 문화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