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궁궐,왕릉 이야기

왕릉이야기. 제18대 현종-숭릉

문성식 2010. 8. 26. 20:39

 

   제18대 현종(顯宗)과 명성왕후(明聖王后) - 숭릉(崇陵)

 

 

숭릉 -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쌍릉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崇陵의 특징
 顯宗{이연; 1641-1674, 재위 15년}과 비(妃)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 1642-1683)의 숭릉은 위치가 동구릉의 가장 남쪽으로 현재 경종(景宗) 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혜릉(惠陵)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왕릉제도에 따라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습니다. 두 봉분이 병풍석(屛風石) 없이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되어 있고, 각 봉분 앞에는 각각 상석(床石)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능원 아래 정자각(丁字閣)의 정면 지붕이 일반적인 여타 능의 지붕처럼 지붕의 양 옆면이 막 잘려진 '맞배지붕' 양식이 아니라, 위 절반은 박공지붕{건물의 두 옆쪽에 'ㅅ'꼴로 붙여 놓은 두꺼운 널빤지인 박공널을 대어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올라간 지붕}꼴이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합각지붕{혹은 팔작지붕}'의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점입니다.

합각지붕 정자각 숭릉의 정자각   중종비 단경왕후 온릉의 정자각 맞배지붕 정자각

顯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660

1년

3월, 남인 서인간의 예론(禮論)이 벌어짐

1667

8년

1월, 왕세자{숙종} 책봉

5월, 왕 기년{만1년} 복제를 정함

1668

9년

8월, 동철(銅鐵)로 실록자(實錄字) 주조함

1661

2년

7월, 왕비 김씨 책봉. <효종실록> 편찬

1669

10년

1월, 송시열 건의로 동성결혼 금함

1663

4년

3월, 전국적으로 유행성 열병 만연

1670

11년

10월, 고려 태조릉 개수하고 수직군 둠

1665

6년

4월, 왕 온양온천(溫陽溫泉) 감

1674

15년

2월, 왕대비{효종 비} 장씨 승하{1618 - }

1666

7년

3월, 경상도 유생 송시열 복제반대 상소

8월, 왕 승하{1641 - }. 왕세자 즉위

뒷 이야기
 이역(異域) 땅 청(淸)나라 심양(瀋陽)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봉림대군(鳳林大君; 孝宗)의 아들로 태어난 현종(顯宗)은 귀국{1645년} 후에 아버지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세자(世子)에 책봉되었고, 1659년에 효종을 이어 조선조 18대 왕위에 등극(登極)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현종은 아버지 효종의 유업(遺業)인 북벌(北伐) 계획을 성취하려 했으나 역시 이루지 못하고 대명숭향(大明崇向)의 경향만 현저하게 되었고, 34세{1674년}의 젊은 나이에 15년의 왕위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국내 정세에서도 즉위 초부터 조대비(趙大妃;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趙氏))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인해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의 2차에 걸친 당쟁(黨爭)의 결과 많은 유신(儒臣)들을 희생시키게 됩니다.
 재위 기간의 내치(內治)로는 호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했고, 1668년에 동철(銅鐵)활자 10만여자를 주조했으며,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동성통혼(同姓通婚)을 금지시켰습니다.
 아울러 현종의 뒤를 이었던 숙종대(肅宗代)에 편찬된 <현종실록(顯宗實錄)>은 남인(南人) 집권기의 1차 실록을 1683년 서인(西人) 집권기 때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으로 다시 편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불안한 당시의 정치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료(史料)이기도 합니다.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로 태어나 1651년{효종 2년}에 세자빈에 책봉되어 궁궐로 들어옵니다. 슬하에 숙종(肅宗)과 세 명의 공주(公主; 명선(明善), 명혜(明惠), 명안(明安))을 두었는데, 42세{1683년 숙종 9년)의 나이에 창경궁에서 승하했습니다.  

 

 

출처 :문화 사랑 오솔길 원문보기   글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