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궁궐,왕릉 이야기

왕릉이야기. 제16대 인조-장릉, 휘릉

문성식 2010. 8. 26. 20:44

 

 

   제16대 인조(仁祖)와 인열왕후(仁烈王后) - 장릉(長陵)

 

 

장릉 - 인조와 인열왕후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 25-1
사 적 : 제 203 호

 長陵의 특징
 仁祖(이종 ; 1595-1649, 재위 27년)와 비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韓氏 ; 1594-1635)의 長陵은 본래 경기도 파주시 운천리에 인열왕후릉을 먼저 조성하고 인조 승하후 곁에 인조의 능을 조성했다가 영조(英祖) 7년(1731년)에 현 위치로 옮겨와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으로 다시 조성되었습니다.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 등은 합장릉으로 천장(遷葬)할 때 다시 만들어졌고, 병풍석과 장명등에는 모란과 연꽃의 화문(花紋)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仁祖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623

1년

6월, 광해군의 폐세자를 사사(賜死)

1640

18년

3월, 세자 심양에서 돌아옴

1624

2년

1월, 부원수(副元帥)이괄(李适)반란

12월, 김상헌(金尙憲) 청으로 잡혀감

2월, 왕 공주(公州)로 피신

1641

19년

2월, 선조실록(宣祖實錄) 개수케 함

1625

3년

1월, 원자(소현세자)를 왕세자 책봉

7월, 광해군 제주에서 죽음{1575- }

1627

5년

1월,정묘호란(丁卯胡亂), 왕 강화 피신

1645

23년

1월, 세자 심양에서 돌아옴

3월, 후금(後金)과 화약(和約)

2월, 김상헌 돌아옴

1628

6년

12월, 강화 마니산 사고(史庫) 설치

4월, 소현세자 죽음{1612- }

1632

10년

5월, 정원군 원종(元宗)으로 추존

5월, 봉림대군 돌아옴, 세자 책봉

6월, 대왕대비(인목왕후) 승하{1542- }

1646

24년

3월, 소현세자빈 강씨(姜氏) 사사(賜死)

1635

13년

12월, 왕비 한씨(韓氏)승하{1594- }

1647

25년

5월, 소현세자 세아들 제주로 귀양

1636

14년

12월, 병자호란, 왕 남한산성 피신

1649

27년

5월, 왕 승하{1595- }, 세자 즉위

1637

15년

1월, 삼전도에서 청태종(太宗)에 항복

10월, 선조개수실록 이룩됨

1638

16년

12월, 조창원의 딸 왕비 책봉

 

 

 

뒷 이야기
 선조대(宣祖代)의 국가적 치욕을 겪은 후에 또 다시 외적(外敵)으로 인해 몽진(蒙塵)과 치욕의 항복을 한 인조(仁祖)는 반정(反正)의 바탕으로 왕위에 오른 국왕이었기에 반정 세력들의 힘을 거부하기 곤란한 상황이 많았습니다.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평안병사(平安兵使) 이괄(李适)의 난으로 공주(公州)까지 피신을 했고, 친명배금(親明排金)의 정책으로 정묘(丁卯), 병자(丙子)호란(胡亂)의 치욕을 당하는 등 권력의 출발부터가 순탄하지 못함으로 인해 입은 폐해는 극도에 달했습니다.
 1627년 정묘년에 후금(後金)의 3만여 군사들에게 한양(漢陽)을 내주고 강화도로 피신한 인조는 자신들이 오랑캐라 지칭하며 업신여기던 그들에게 형제(兄弟)의 의(義)를 맺어 화의했고, 또 다시 1636년 병자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의(淸衣)를 입고 치욕적인 군신(君臣)의 의를 맺는 관계로까지 변화되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굴욕을 당했으니, 뛰어난 외교적 수단을 발휘한 광해군대(光海君代)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인열왕후 한씨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한준겸(韓浚謙)의 딸로 태어나, 1610년 인조가 능양군(綾陽君) 시절에 혼례를 올렸다가 반정(反正) 후 왕비에 책봉됩니다. 슬하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효종(孝宗), 인평대군(麟平大君), 용성대군(龍成大君)의 4남을 두었는데, 용성대군 생산 후에 일종의 산후병으로 42세의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소현세자(昭顯世子) 역시 청(淸)나라의 볼모를 끝내고 돌아온 직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어 인조는 다음 세자로 차남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정해 다음 대(代)의 효종(孝宗)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합니다. 

 삼전도(三田渡)에서의 굴욕의 항복, 두 왕자{소현세자(昭顯世子),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와 척화파(斥和派) 삼학사(三學士 ; 오달제,윤집,홍익한) 등을 볼모와 포로로 내어주고, 심지어 청(淸)의 요구에 의해 삼전도에 대청황제 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까지 세우는 등 굴욕의 예를 계속한 인조(仁祖)였기에 임란(壬亂) 이후 변화되는 세계 정세를 적극 대처하지 못한 조선조의 안타까움을 되새겨 봅니다. 
 

 

 

 

 

휘릉 - 인조 계비 장렬왕후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徽陵의 특징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趙氏 ; 1624-1688)의 휘릉(徽陵)은 그녀가 4대의 왕대를 살아 숙종대(肅宗代)에 승하함으로 해서 현종(顯宗)의 숭릉(崇陵)에 이어 유사한 형식으로 조성되어 동구릉(東九陵) 소재 태조(太祖)의 건원릉(建元陵) 서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에는 병풍석(屛風石)이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설치하였고, 상석(床石)의 받침 고석에는 악귀를 쫓는 귀신 얼굴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莊烈王后 약사(略史)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로 인조 2년(1624년)에 태어난 장렬왕후(莊烈王后)는 열다섯 살의 나이{1638년, 인조 16년}로 인조의 정비(正妃)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용성대군(龍成大君)을 낳은 후 승하하자 계비(繼妃)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26살의 나이에 인조가 승하해 대비(大妃)가 되었는데, 10년 후 다음 효종(孝宗)까지 승하하고, 그후 현종(顯宗)에 이어 숙종대(肅宗代) 까지 대왕대비로 지내는 기구한 인생을 보냈지만, 슬하에 소생(所生)은 없었습니다.
 생전에 특이한 점은 그녀로부터 야기된 사건인 관념적인 권력의 암투로 알려진 복상문제(服喪問題)에서 발단이 된 예송(禮訟)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송시열 등의 서인(西人)과 윤휴 등의 남인(南人)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은 바로 인조의 차남(次男)이었던 효종(孝宗)의 상(喪){1659년}에 장렬왕후가 몇 년의 상복(喪服)을 입어야 하는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서인(西人)의 기년설(朞年說-1년)과 남인(南人)의 삼년설(三年說-3년)의 1차 대립에 이어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상(喪){1674년, 현종15년}에 역시 서인(西人)의 대공설(大功說-8개월)과 남인(南人)의 기년설(朞年說) 2차 대립은 결국 서인(西人)에서 남인(南人)에게로 권력의 이동을 가져왔으나 다소 소모적인 논쟁으로 부정적인 평가도 내려지곤 합니다.
 하지만 송시열(宋時烈), 김집(金集) 등의 뛰어난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후기 성리학(性理學)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는 시기이기도 했기에 단순하게 당쟁(黨爭)의 논리로만 평가해서는 당대의 흐름을 올바로 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출처 :문화 사랑 오솔길 원문보기   글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