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궁궐,왕릉 이야기

왕릉이야기. 제17대 효종-영릉

문성식 2010. 8. 26. 20:41

 

  제17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仁宣王后) - 영릉(寧陵)

 

 

영릉 - 효종과 인선왕후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
사 적 : 제 195 호

寧陵의 특징
 孝宗(이호 ; 1619-1659, 제위 10년)과 비(妃)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 ; 1618-1674)의 寧陵은 바로 근처에 세종(世宗)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의 영릉(英陵)을 이웃하고 있어 위치가 서울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어도 세종, 효종과의 200여년간의 시공(時空)을 넘나들 수 있는 유익한 기회를 제공해 주는 곳으로 삼을 수 있어 좋습니다.
 석물(石物)들을 별도로 제작한 쌍릉(雙陵)의 형식을 하고 있는 영릉은 조금 특이한 위치를 하고 있는데, 두 릉의 위치가 좌우로 나란하게 조성된 것이 아니라 앞{인선왕후릉}뒤{효종릉}로 비스듬하게 위치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 연유는 본래 영릉(寧陵)은 효종 승하후 현 위치가 아닌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 소재의 태조(太祖) 건원릉(建元陵) 서쪽의 위치에 조성했는데, 석물(石物)에 틈이 생겨 누수의 염려가 있다고 하여 여주 세종의 영릉(英陵) 곁으로 천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봉분의 위치가 특이한 것은 풍수설(風水說)로 볼 때 왕성한 산 혈맥의 생기를 모두 받게 하려다 보니 현재와 같은 특이한 위치 조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효종(孝宗)의 릉에만 곡장(曲墻)이 설치되어 있어 쌍릉(雙陵)의 형식임을 알 수 있지만, 기타 나머지 석물(石物)은 모두 각각 별도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봉분(封墳) 모두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습니다.

孝宗대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650

1년

3월, 청 사신 종실(宗室)의 여자를 선출

1654

5년

7월, 변급 등 청과 함께 러시아군 격파

1651

2년

12월, 인조 후궁 귀인 조씨 사사(賜死)

1658

9년

6월, 이순신의 묘갈(墓碣)을 세우도록 함

1652

3년

9월, 홍만종 <시화총림(詩話叢林> 편찬

1659

10년

5월, 왕 승하{1519- }

1653

4년

7월, 인조실록(仁祖實錄) 완성

10월,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服喪) 기년제(朞年制)로 정함.

 

 

8월, 제주에 만선(蠻船:하멜 일행) 표착

 뒷 이야기
 인조(仁祖)의 둘째{봉림대군}로 태어나 8년간의 청나라 볼모생활을 보낸 효종은 귀국 후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죽음으로 세자에 책봉되고 인조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효종은 청나라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으로 굴욕을 씻고자 북벌(北伐)의 계획을 세워 군비를 정비하고 군정(軍政)에 힘썼으나 끝내 북벌을 감행하지 못하고 승하해 버렸던 안타까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효종 재위 시절에는 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하여 성과를 올렸고, 청나라에서 들여온 역법(曆法)으로 새로운 시헌력(時憲曆)을 시행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으나, 숙원이었던 북벌의 한을 풀지 못한 안타까운 생을 보냈습니다.
 청나라의 힐책(詰責)으로 북벌 의지를 잠시 접어두면서도 러시아의 남하(南下)에 청(淸)의 요청을 받아들여 나선(羅禪)정벌에 참여한 것을 보면 북벌(北伐)의 의지는 효종의 지상목표이자 국가 숙원사업이었던 것입니다.

 인선왕후 장씨(張氏)는 우의정(右議政)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로 광해군 10년(1618)에 태어나 14세에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렸고,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8년간 있으면서 현종(顯宗)을 생산하고 내조를 하다가 효종 즉위와 함께 왕비에 책봉되었습니다. 효종 승하후 왕대비로 지내다가 57세의 나이로 현종(顯宗) 15년(1674)에 승하했습니다. 슬하에 현종과 다섯 공주를 두었습니다. 

 

 

출처 :문화 사랑 오솔길 원문보기   글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