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5.jpg 조선시대의 대접. 4점.

 

이 4점의 백자 대접들은 태토가 치밀한 경질 자기로 투명한 백자유가 굽 안바닥까지 전면에 걸쳐 고르게 입혀졌으며, 순백색을 띤다. 모두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진 대접으로 아래로 내려오면서 양감이 풍부하며 안정된 형태를 보여 준다. 동채와 굽이 모두 단정하고 매우 짜임새 있다.

약간 예리한 역삼각형 굽 바닥에는 가는 규사를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 있으며. 굽 안바닥에 유약을 입힌 후 유면(釉面)에 천(天)·지(地)·현(玄)·황(黃)의 글자를 각각 한 자씩 선각(線刻)하였다. 이 백자 대접들의 표면은 깨끗하여 가마 안에서 구울 때 갑발(匣鉢)에 넣어 잡티가 붙지 않도록 구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단정한 기형과 함께 정교한 수법으로 제작된 이 백자 대접들은 조선백자의 최상품에 속한다.

7746.jpg 더욱이 천·지·현·황()이 경복궁 근정전 창고인 천자고(天字庫), 지자고(地字庫), 현자고(玄字庫), 황자고(黃字庫)와 관련된다면, 이러한 명문이 새겨진 백자 대접은 왕실용임이 분명하다. 왕실용 백자 대접에 대하여는 ‘세종조에 백자를 전용(專用)했다’는 ≪용재총화 傭齋叢話≫의 기록이나 세종 7년(1425) 중국 명나라 홍희제(洪熙帝)가 조선 왕실에 10개 식탁분의 대중소(大中小) 백자를 요구함에 따라 경기도 광주 가마에서 제작하도록 하였다는 ≪세종실록 世宗實錄≫의 기사 등을 통하여 접할 수 있다.

이처럼 세련된 백자를 제작했던 세종 연간에 정교한 순백자가 제작되었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세조실록 世祖實錄≫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세조 때부터는 왕실에서의 백자 사용 추세가 순백자에서 청화백자로 바뀌기 때문에, 왕실에서 이러한 순백자 대접을 애호한 시기는 세종 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천·지·현·황명 백자 대접과 접시 파편들이 우산리(牛山里)·번천리(樊川里)·도마리(道馬里) 등지의 경기도 광주 15세기 요지(窯址)에서 출토된다.

7745.jpg 경기도 광주 우산리·번천리·무갑리·선동리 등지에는 관요(官窯)였던 사옹원(司甕院)의 분원(分院)이 세조 말∼예종 초(1467∼68년경)에 설치되었다. 사옹원은 궁중에 공납(貢納) 혹은 진상하는 여러 물품을 관장하고 궁중내의 연회를 담당하던 중앙 관청이었다. 따라서 분원은 사옹원의 감독과 관리를 받아 백자를 제작하여 왕실에 진상하던 일군(一群)의 자기 가마였다. 이렇듯 광주 분원과 관련지어 볼 때, 천·지·현·황명 백자는 세종 이후 분원 관요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명문이 있는 대접이 분원이 설치되기 전 세종 때 경기도 광주 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분원이 설치된 1467·1468년경 광주 분원에서 만들어 진상된 것인지 하는 제작 시기의 문제는 단언하기 어렵다. 어쨌든 15세기에 제작된 백자로 궁중용 그릇이었던 이들 천·지·현·황명 대접은 조선 도자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