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민족의 사표(師表)였다. 오산학교 교사로 출발한 그의 활동은, 열렬한 애국심과 독립정신 속에서 독립만세운동, 국산품애용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선생은 좌우파가 하나가 되는 신간회가 결성되도록 애썼으며, 광복 후 반탁운동과 민족자주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만학도
조만식(曺晩植, 1883. 2. 1~ 1950.10.18) 선생은 1883년 2월 1일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에서 엄친 창녕 조씨(昌寧曺氏) 경학(景學)과 자친 경주 김씨 경건(敬虔)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했다. 선생은 7세 때에 한문 공부를 시작해 10년에 걸쳐 사서삼경 등 기초과정을 배웠다. 15세 때부터 평양에서 포목상과 지물상을 경영하며 가계를 꾸려온 선생은 5척 단구의 이름난 술꾼이었다. 그러다가 서당에서 알게 된 한정교(韓鼎敎)의 인도를 받아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했다.
이후 선생은 신학문에 대한 동경이 불 같이 일어나서 23세의 만학으로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했다. 1906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먼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고 1910년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부(明治大學 專門部 法學部)에 입학했다.
평남 사천에서 독립만세 시위 주도하고 1년간 옥고
동아일보 1920년 8월 22일자 기사. 물산장려회가 조만식 등의 발기로 평양에서 창립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선생은 1913년 명치대학을 졸업한 후 남강 이승훈(南崗 李昇薰) 선생의 초청으로 민족교육의 요람인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동경에서 견문을 넓히고, 또한 세계 속의 조선을 바라보며 교육의 방향과 포부를 가졌다는 점 등을 인정받아 2년 후에는 교장으로 승진했다. 사감까지 겸하여 주야 24시간을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했다. 선생의 풍모는 매우 독특해서 5척 단구에 머리를 빡빡 깎아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국산품을 애용하여 허영을 배척하는 모범된 삶을 보여주어 항일의 표징으로 손 꾭혔으며, 민족적인 긍지를 가지고 국산품 애용을 실천했다. 선생의 교장생활은 스스로 학생과 똑같은 규율을 지키고 민주적 자치력을 십분 발휘하도록 지도하면서 장차 이 나라의 큰 일꾼을 양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교장직을 사퇴하고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江西郡 沙川)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시위를 주동하였으며, 그 후 특별한 사명을 띠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려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르게 되어 교육계를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먼저 조선 사람임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선생은 항상 조선 사람의 약점과 결점을 뚜렷이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데 앞장섰다. “우리는 먼저 조선 사람임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는 철저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언제나 애국애족하는 정신을 고취하고 무엇보다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나라 사랑의 지름길이며 민족자립 경제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정신보급에 힘썼다.
1920년 평양에서 조선 물산장려운동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운동이 시작되자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가서 각 지방에서는 물산장려회 또는 토산품장려회 등으로 단체조직이 속출하고 금주․금연동맹과 같은 도덕적인 성격의 운동으로까지 파급되었다. 1923년에는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양성을 위하여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주축으로 벌어진 조선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2년에는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 언론창달에 힘쓰고 민족계몽에 앞장섰으며 그 후 1937년에 수양동우회 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한 1921년부터 11년 간에 걸쳐 평양 YMCA 총무로서 기독교정신과 민족부흥의 정신을 일체화 함으로써 항일의 선봉에 서서 일제 말기에 소위 신사참배, 궁성요배 등 강요에 결연히 반대했다.
중외일보 1927년 12월 22일자 기사. 신간회 평양지회 창립대회가 열렸으며 조만식이 회장으로 선출된 사실을 알리고 있다.
민족유일당인 신간회의 중앙위원 및 평양지회장으로 활동
1927년 민족의 좌우합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가 서울에서 조직되자 선생은 신간회 중앙위원과 평양시 지회장으로 피선되어 한국정치사상 최초의 민족단일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항일투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려는 대전제와 민족과 사회가 한 덩어리가 되어 항일 공동전선을 펴나가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 선생은 이 무렵 육신의 곤고함을 잊어버리면서 청년회 조직과 강연회 토론회 등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때의 별명이 ‘무주랑 빗자루’였다. 키는 작았으나 담대했고, 얼굴 빛과 흰 머리카락은 청초한 모습이었으며 낭랑한 음성으로 열띤 웅변을 할 때는 듣는 사람마다 공명을 얻어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광복 후 평양에서 조선건국준비 평남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
1945년 8월 17일 평양에서 조선건국준비평남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동년 8월 18일 평남 도청에서 있었던 일본군 항복조인식에 입회하는 형식으로 참석하였다. 8월 26일 소련군은 건국준비위원회와 공산당을 평양 호텔로 초청하고 연립정권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선생이 위원장이 되고 건국준비위원회 측에서도 여러 명이 조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연립정권의 수립은 이때까지는 선생의 지도력을 배제할 수 없어 이뤄진 부득이한 방편이었다. 이러는 한편 공산당의 위상은 날로 떠오르고 소련군정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인민위원회는 날치기 행정으로 제 세력을 키워갔다.
여운형, 안창호와 찍은 사진.(1935)
안창호 출옥 후 기념촬영한 것으로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이다.
조선민주당 창당한 후에 소련군정, 김일성 일파와 담판 벌였으나 결렬
1945년 11월 3일 선생은 평양에서 조선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5년 간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1946년 1월 2일 소련군정에 신탁통치 불찬성의 뜻을 통고하고 한편으로는 반탁 성명을 발표했다. 동시에 소위 인민위원회 위원장 직도 사퇴했다. 1946년 1월 6일 마침내 소련군정 및 김일성 일파와의 최후 담판은 결렬되고 선생이 인민위원회 건물 현관을 나서자 이미 소련군에 의해서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실려 고려호텔로 연행되어 갔다.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자리한 고당 조만식선생 동상.
그 후 공개적인 장소에서 선생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선생은 월남을 권하는 인사들에게 “나의 일신을 염려하지 마시오. 나는 북한의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이미 굳게 결심하였고”라며 오직 애국애족과 민주주의를 위하는 굳센 신념으로 끝내 권유를 거부했다. 북한동포의 절대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분, 공산당원도 그 인격 앞에 겸손하게 절을 하였던 분, 월남 동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선생, 오늘도 우리 민족의 가슴마다에 살아 계신 분이다. 선생의 높은 유덕을 기리는 소리는 지금도 끊임이 없다.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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