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오세창(吳世昌, 1864.7.15(음)~1953.4.16)

문성식 2015. 7. 27. 11:20

오세창 변절과 친일의 시대를 견디어 내고 추앙받는 민족지도자로 남다

판사: 조선에서 민족자결의 취지에 의하여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운동을 하게 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오세창: 그것은 세상의 풍조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주창하므로 가담했는데, 하나는 전세계의 사람이 민족자결로 소요하고 있는데 홀로 조선만이 침묵하고 있기보다, 실행은 되지 않더라도 역사에 남기기 위하여 조선인도 민족자결의 의사가 있다는 것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경성지방법원, [오세창 신문조서] 중에서-

사역원에서 관료생활 시작

오세창 이미지 1

오세창(吳世昌, 1864.7.15(음)~1953.4.16) 선생은 한성 중부 이동(현 을지로 2가)에서 역관인 부친 오경석과 모친 김해 김씨 사이에서 1남 1녀의 독자로 태어났다. 선생은 자신을 포함하여 8대가 역관을 지낸 전형적인 중인계층 출신이었다. 그리고 부친 오경석은 초기 개화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8살이 되던 해에 부친과 함께 초기 개화파를 대표하던 한의학자 유대치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8년여의연마 끝에 선생은 16살이 되던 1879년 역과에 합격,1880년 사역원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청년 개화파 세력이 주도한 갑신정변의 화마를 용케 피할 수 있었던 선생은 1886년부터 개화파 관료로서의 본격적인 행보를 걷는다. 갑신정변 와중에 폐지되었다가 다시 설치된 박문국이 속간한 <한성순보>의 기자로 활약하게 된 것이다. 1894년에는 갑오경장의 중추기관인 군국기무처에서 관리생활을 했다.다음해에는 정3품에 올라 경제관료로서 농상공부에 근무했다.또한 통신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897년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동경 외국어학교의 조선어 교사를 지낸 후 1년 뒤 귀국한 선생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칩거에 들어갔다.

개화파의 적자, 동학 지도자가 되다

갑신, 갑오의 ‘정변’을 주도하거나 관여한 개화파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선생도 1902년 유길준이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청년장교들의 결사인 일심회와 함께 모의했던 쿠데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그 와중에 역시 망명객이나 다름없던 동학교주 손병희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조직 재건과 교권장악에 성공한 손병희는 문명개화노선으로의 방향전환을 모색하며 신분을 숨긴 채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무과에 급제한 뒤 무관으로 활동하다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망명한 후 일본군에 근무하던 권동진과 관료생활을 사직하고 중국을 주유한 뒤 일본에서 체류 중이던 양한묵도 손병희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렇게 손병희를 좌장으로 선생과 권동진, 양한묵등은 평생동지로서 동학 내 ‘문명파’를 형성하게 된다.

의기투합한 문명파의 노선은 분명했다. 제일 먼저 그들은 ‘옛 것을 근본으로 하고 서양문명을 절충한다’는 구본신참에 입각한 근대화 노선을 추구하는 대한제국 정부에 맞서 서구적 근대를 모델로 한 문명개화 일변도의 근대화를 촉구하는 반정부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상소운동, 일본이라는 외세 활용, 진보회, 일진회를 통한 민회운동 등의 방식이 동원된 동학의 합법화와 국정개혁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은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재야정치단체인 일진회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확보한 것이 유일한 성과였다. 이러한 정치투쟁 과정에서 선생은 특히 진보회의 취지, 강령, 규칙을 제정하고 민회운동을 기획하는데 적극 관여했다.

1905년 11월 5일 일진회는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전격 발표했다. 그리고 11월 17일에 마침내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일제의 주구로 전락한 일진회의 행보는 동학교도들의 반발을 야기할 가능성이 컸다. 손병희와 문명파는 귀국을 서둘렀다. 그들은 1906년 1월 귀국과 동시에 천도교를 창건했다. 이때부터 사용된 천도교의 교기는 선생이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한성순보> 기자 경력을 바탕으로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를 발간하는 만세보사의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선생의 정치적 위상은 귀국직후 중추원 부참의에 임명될 만큼 상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곧 사직했다.

손병희와 문명파는 귀국 직후부터 이용구, 송병준 등의 일진회파를 회유했으나 결국 실패하자 그들을 출교시켰다. 일진회파는 천도교에 맞서 시천교를 창건했다. 천도교 지도자들은 1907년 대한자강회 계열 및 전직 고위 관료 등과 함께 정당정치를 지향하며 대한협회를 결성했다. 대한협회 주요 활동 중 하나가 ‘매국당’ 일진회를 비판, 공격하는 일이었는데 선생은 부회장으로서 그 선봉에 섰다. 또한 선생은 대한협회 기관지인 <대한민보>를 발간하는 대한민보사 사장으로 활약했다. 당시 선생은 절대독립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합방론을 주장하는 일진회와는 달리 동맹론을 주장하면서 ‘일본의 지도에 의한 문명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또한 선생은 기호의 중인 출신 신흥정치인으로서 계몽운동단체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평의원으로 참가하고 재일유학생 단체인 대한학회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대한학회 찬성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문화계몽운동에도 솔선했다.

권동진(왼쪽)과 선생(오른쪽)의 모습. 손병희, 권동진, 그리고 선생은 천도교 내의 3.1운동의 실질적 주모자들이었다

민족과 역사를 위해 3.1 독립선언에 뛰어들다

천도교는 3․1운동의 준비와 초기단계에서 각계의 독립운동 움직임을 하나로 결집하고 자금을 제공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독립 소요의 중핵’이었다. 천도교 지도부는 독립운동을 준비한다는 대의에 합의하고 행동원칙으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을 수립한 뒤 각계에서 동조자를 규합하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당시 국내에서는 정치결사가 허용되지 않았던 까닭에 이승훈, 한용운, 송진우, 현상윤 등 주로 종교계와 교육계 인사들을 접촉했다. 이 와중에 동경에서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고종이 사망함으로써 객관적인 조건은 더욱 성숙되어갔다. 천도교 지도부는 중앙차원에서 독립선언을 모의하는 동시에 천도교인들을 동원한 전국적 시위운동을 준비했다. 손병희와 선생, 권동진, 그리고 1910년 국망 이후 스스로 천도교를 찾아온 40대의 재사(才士) 최린. 이들이 3․1운동의 실질적인 주모자들이었다. 당시 도사(道師)의 직책을 갖고 있던 선생은 모의와 준비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거사’를 모의하는 자리에 늘 함께 했던 것은 물론 일단 계획이 수립되자, 이를 지방의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알리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서명과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행시켜 나갔다.

3.1 운동 판결문

그런데, 선생의 심문내용에 따르면 천도교 지도부는 1918년 말 세계정세가 동요하자, 우선 독립이 아닌 ‘자치운동’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19년에 들어와 형세가 변화하면서 만주, 시베리아, 상해, 미국 등의 조선인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풍설이 나돌았고 결국 그들과 동일보조를 취하기 위해 자치문제를 버리고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치를 도모했던 다소 개량적인 인식의 저변에는 일제가 내선일체를 강조하면서도 ‘민도’를 운운하며 차별적 시각으로 추진했던 식민정책에 대한 강한 불만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래서 선생은 ‘병합 후 조선이 교육이 보급되고 산업이 일어나 크게 진보한 것은 인정하나 일본민족과 조선민족은 평등해야 하는데 평등하지 못하므로 조선인에게 좀 더 자유를 주고 평등한 대우를 해 달라’고 요구했다. 선생은 조선인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로 교육정도가 뒤떨어져 있고 출판, 언론, 집회 등의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 등을 지적했다.

이처럼 선생을 비롯한 천도교 지도부는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을 통해 절대독립과 국권회복의 당위성을 주장했지만, 동시에 일본정부에게 식민통치의 기조를 직접 지배에서 자치 혹은 보호국 체제하의 간접 지배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조선인에 대한 동등한 대우와 정치활동 공간을 확보한다는 전술적 사고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개량성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을 쓸모 없는 짓이라 생각했던 윤치호와는 달리 천도교 지도부는 3․1운동에 천도교의 인적, 물적 역량을 총투입했다. 선생은 일본인 판사 앞에서 ‘처음부터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밝힘으로써 역사에 그것을 남기고 또한 조선민족을 위하여 기염을 토하기 위해 주모했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선생은 3월 1일 이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지만, 4월 10일 경성에서 조선국민대회와 조선자주당연합회 명의로 선포된 조선민국 임시정부(정도령 손병희, 부도령 이승만)의 조각에서 장관급인 식산무경(殖産務卿)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선생은 3년의 옥고를 치른 뒤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했다.

대립과 갈등, 변절과 친일의 시대를 견디어 내다

선생이 옥문을 나설 무렵, 천도교는 손병희의 사위인 정광조를 주축으로 하는 보수파와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아들인 최동희를 주축으로 하는 혁신파간에 교단민주화를 둘러싼 치열한 노선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선생은 권동진, 최린과 함께 중재에 나섰으나, 곧바로 보수파에 가담하고 만다. 혁신파의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1922년 5월 19일 병석의 손병희가 영면했다. 내분수습에 번번이 실패한 교주 박인호는 6월 6일 사퇴했다. 세인의 이목은 손병희 사후의 천도교가 전과 다름없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선생을 비롯한 보수파 지도자들은 교주제가 아닌 종리사합의제에 입각한 ‘집단지도체제’라는 카드로 혁신파와의 협상과 지방 천도교인에 대한 설득에 나섰다. 그런데, 보수파와 혁신파의 합의하에 치른 종리사 선거에서 선생을 포함해 전원 보수파가 당선되었다. 보수파는 합법적으로 교단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좌절한 혁신파는 교단을 이탈했다.

그러나 보혁 갈등의 고비를 넘긴 천도교는 또 한번의 분규를 겪게 된다. 보수파의 중진 그룹은 1925년 최린의 독점적인 교권 장악 시도를 빌미로 최린, 정광조로 대표되는 신파와 선생과 권동진, 이종린으로 대표되는 구파로 분화되었다. 천도교인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던 신파는 서북지방을 세력기반으로 조선문화의 전통을 부정하고 서구지향적인 신문화 건설을 추구했던 신흥정치세력으로서 일제와 타협하며 자치운동노선을 추구했다. 반면에 기호, 호남에 세력기반을 둔 구파는 대한제국에서 하급관료를 지낸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민족운동진영 내에서 ‘토호’로서 나름의 기득권을 갖고 있던 이들은 3․1운동 이후 분출된 항일의 민족정서에 충실하고자 했으며 일제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좌파와 연대했다. 특히 구파는 6․10만세운동의 모의과정과 신간회의 결성 및 활동과정에서 비타협적 우파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1930년대 초 천도교는 최린이 이끄는 신파가 먼저 일제에 백기를 들고 친일로의 전향을 선언했다. 구파도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직후 이종린의 주도로 친일 대열에 합류했다. 1940년 4월 신구파 합동으로 천도교의 친일협력의 조직적 기반은 한층 강화되었다. 하지만, 줄곧 천도교의 원로이자 고문(顧問)으로 ‘큰 어른’ 의 위상을 갖고 있던 선생은 이와 같은 노골적인 친일대오에 합류하지 않았다.

추앙 받는 민족지도자로 생을 마감하다

실절(失節)하지 않고 ‘변절과 친일의 시대’를 견디어 낸 선생은 마침내 82세의 고령으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국내에서 변절과 친일의 과거를 갖지 않는 민족 지도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기에 좌우 정치세력 모두에게 선생은 최우선 영입대상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선생을 위원으로, 이어 인민공화국의 고문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선생은 이들과 함께 하지 않고 우익에 가담하여 김성수, 김구, 이승만 과 함께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먼저 김성수 등이 주도하는 한국민주당 영수(領袖)의 1인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회 위원으로 활약했다.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주도의 정치세력화를 꿈꾸며 신한민족당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오르기도 했다. 1946년에 들어와서는 반탁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김구, 이승만과 함께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 그리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주도했다. 선생은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식에서 민족대표로서 일본에 빼앗겼던 대한제국 황제의 옥새를 되돌려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8.15광복 1주년 기념식에서 일제에 빼앗겼던 옥새를 인수받는 선생의 모습

한편, 해방과 함께 천도교는 친일행적의 시급한 청산을 요구 받았다. 선생은 천도교 친일의 상징인 최린에게 은퇴할 것을 종용했다. 최린은 이를 거절했고, 결국 1945년 10월의 천도교인대회에서 출교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남한 정부 수립까지 선생은 각종 국민대회와 시민대회를 누비고 다니며 개회사와 축사를 도맡았고 3․1운동을 기념하고 순국선열을 추념하는데 앞장섰다. 정부수립식의 개회사도 그의 몫이었다. 이러한 활약으로 선생은 김구, 이시영과 함께 정부 수립 당시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정부 수립 후에도 김구가 암살당하자, 노구를 이끌고 장의위원회 위원장직을 맡는 등 계속 왕성한 정치, 사회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6․25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 가 1953년 4월 16일 9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국회에서는 명복을 빌기 위해 1분간 묵념하고 세비의 1할을 각출하여 조의금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이처럼 떳떳하게 해방을 맞아 민족지도자로 추앙 받으며 반민특위재판이 열린 법정에 자신의 서체로 당당하게 ‘민족정기(民族正氣)’라는 현판을 내걸 수 있었던 선생의 말년은 선생과 함께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모하고, 그 후광으로 일약 촉망 받는 민족지도자가 되었으나, 곧바로 타협과 개량의 길을 걷다가 결국 친일과 변절의 선봉장이 되었던 최린의 그것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해방 후 최린은 졸지에 천도교 교권을 상실했고 반민특위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6․25전쟁 당시 납북되어 평북 선천의 한 요양소에서 이산의 슬픔을 간직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해야 했다. ‘친일과 변절’이 새삼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즈음, 해방 후 선생과 최린의 정치적 부침은 ‘역사적 심판’이라는 다소 상투적이지만 엄중한 개념을 자꾸 곱씹게 한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 1906 <만세보>, <대한민보> 사장으로 계몽운동
    1919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 참여
    1921~1945 천도교를 통한 독립운동
오세창 이미지 2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발행2011.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