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14.jpg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보현사에 있는 신라 말·고려 초의 탑비. 940년(태조 23) 건립. 비신높이 188㎝, 너비 98㎝, 두께 20㎝.

보현사에 남아 있는 낭원대사(834∼930)의 탑비로, 대사의 출생에서부터 경애왕이 대사의 덕을 기려 국사로 예우한 사실 및 입적하기까지의 그의 행적이 실려 있다. 대사가 96세로 입적하자 왕은 ‘낭원’이라는 시호와 '오진’이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이 비석(碑石)의 귀부(龜跌)는 네모난 대석(臺石) 위에 놓여 있는데 용두화(龍頭化)한 거북머리를 갖추고, 등에는 6각(六角)의 귀갑문(龜甲紋)이 있으며, 등 중앙에 구름무늬로 장식한 높은 비좌(碑座)가 있다.

비신(碑身) 상단(上端)에는 앙련(仰蓮)받침이 있고 쌍룡(雙龍)이 투각(透刻)된 이수(이首)에는 중앙에 복발(覆鉢)과 1단의 보륜(寶輪)이 있고 화염(火焰)에 싸인 보주(寶珠)를 얹어놓았다.

낭원대사(朗圓大師)는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개청(開淸)이며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9년(834)에 태어났다. 13세에 화엄사(華嚴寺)에서 정행법사(正行法師)에 의해 승려가 되고 고려(高麗) 태조(太祖) 13년(930) 96세로 이곳 보현사(寶賢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 태조는 시호(諡號)를 낭원(郎圓)이라 하고 탑명(塔名)은 오진(悟眞)이라 하였다.

대사가 입적한 지 10년 뒤인 고려 태조 23년(940)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가 짓고, 서예가인 구족달(仇足達)이 글씨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