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문성식 2015. 6. 7. 10:13

조광조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

조광조 이미지 1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중종반정 후 조정에 출사, 유교적 이상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시대를 앞서간 개혁정책은 기묘사화로 비록 물거품 되었으나, 그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이후 후학들에 의해 조선 사회에 구현되었다. 과연 그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정의 출사 전부터 사림의 영수로 인정받아

조광조는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하기 전부터 명성이 있어, 1510년(중종 5년) 11월 15일 진사의 신분으로 경복궁 사정전에서 행해진 테스트의 일종인 강경에 참여한 바 있었다. 당시 조광조는 [중용]을 강하여 약(略)이라는 성적을 받게 되었는데, 이 날 실록에서는 그를 사림의 영수로 칭하고 있어 주목된다. 국가가 무오사화(戊午史禍)를 겪은 뒤부터 사람이 다 죽어 없어지고 경학(經學)이 씻은 듯이 없어지더니, 반정 뒤에 학자들이 차츰 일어나게 되었다. 조광조는 어릴 적에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여 성리(性理)를 깊이 연구하고 사문(斯文)을 진기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학자들이 추대하여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조선 사회는 새로운 분위기를 맞이하였다. 앞선 연산군 대 국왕을 비롯한 집권 세력 내에서 자행된 갖가지 잘못된 정치를 일신하면서 새로운 조선을 재창조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이때 사림들이 정치에 재진출하며 조정에 ‘새로운 피’가 수혈되었다. 사림이란 후일 율곡 이이가 말한 바와 같이 “마음속으로 옛날의 도를 사모하고, 몸으로는 유자의 행동에 힘쓰며 입으로는 정당한 말을 하면서 공론을 가지는 자”들을 말한다. 조광조는 바로 이런 성향의 사림세력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이들과 달리 당대까지 정치와 사회를 주도하던 세력을 우리는 역사상 훈구 세력 또는 훈구파라 칭하고 있는데, 15세기 후반 이후 훈구 세력에 의한 권력형 비리가 여러 곳에서 문제화되었다. 사림세력은 이러한 훈구 세력의 잘못된 정치 관행과 권력형 비리를 문제시하면서 새로운 조선 사회를 창조하려고 하였다.

전대의 잘못을 청산하는 유신 정치를 꿈꾸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 대의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는 이른바 유신 정치를 추진하였다. 앞서 몇 차례 사화를 겪으면서 화를 당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줌과 동시에 연산군 대 폐지되었던 조선조 유학의 상징 성균관을 다시 원상으로 복구하였다. 이는 유학을 진작시키려는 의지로 보인다. 또한 앞서 사화를 겪으며 귀양을 갔던 유숭조 같은 선비들을 소환하여 중용하였다. 다만 중종은 즉위한 초반에는 반정 공신들의 견제로 인해 정국을 주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즉위한 지 8년 여가 지나면서 주요 반정 공신들이 사망하게 되었고, 본격적인 정치 개혁에 착수하였다. 중종이 이때 주목한 인물이 사림의 영수로 있던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아버지가 함경도 지방에 지방관으로 파견된 것으로 기회로, 마침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소학군자(小學君子)’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김굉필은 조선조 사림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종직의 문인 가운데 한 명이다. 이로써 본다면 조광조는 김종직 이후 사림세력의 맥을 계승하게 되었다. 조광조는 1510년(중종 5년) 소과인 생원시에 입격한 후, 1515년 알성시 별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간원 정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벼슬이 높아갈수록 자신과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마음먹고 있는 이상정치, 즉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해 보려 하였다. 도학정치란 공자와 맹자가 정립한 정치이며, 그 원류는 유학에서 이상시대로 알려진 요순시대의 정치 그것이었다.

새롭게 조정에 들어온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은 민본정치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정치 개혁에 착수하였다. 임금의 철저한 수신을 비롯해 조정 내 언로의 확충을 강조하였다. 또한 당대 시행되던 과거제가 주로 기예만 시험을 본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덕성에 바탕한 관인 선발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하였다. 동시에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정착을 위해 성리학적 생활규범을 규정하고 있는 [소학]의 보급이나 향약의 보급 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사회로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못다 핀 개혁의 열망, 기묘사화

그러나 조광조를 영수로 하는 당대 사림세력은 대부분 젊은이로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을 실현하기에만 급급했다. 그 결과 너무도 그 수단이 과격하고 급진적이었으며, 또 자기네들과 뜻이 서로 맞지 않는 훈척 세력인 남곤이나 심정 등을 소인이라 지목하여 그들과의 사이에 알력과 반목이 일어났다. 1519년 조광조 등은 마침내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중대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의 제거였다. 이른바 위훈 삭제운동으로 알려진 것으로,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신 작호가 부당하게 부여된 자 76명에 대하여 그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조광조 등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공신세력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공신세력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을 겨누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공신세력들의 반격을 받아 화를 당하게 되니, 이것이 기묘사화라 불리는 사건이다.

기묘사화와 관련해서는 사건의 전개 과정에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술수가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지동(地動), 즉 지진이 자주 발생하였는데 이를 국왕이 근심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때 조광조와 반대 측에 있던 남곤과 심정 등은 권세 있는 신하가 나라 일을 제 마음대로 하고 장차 모반을 일으키려 하기 때문에, 그 징조로 지진이 발생하였다고 중종에게 간언하였다. 여기서 권세 있는 신하가 다름 아닌 조광조였다. 그리고 남곤 등은 그 뒤 연거푸 말을 지어 퍼뜨리기를 민심이 점차 조광조에게로 돌아간다 하고, 또 대궐 후원에 있는 나뭇가지 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꿀로 글을 써서 그것을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 천연적으로 생긴 양 꾸미어 궁인으로 하여금 왕에게 고하도록 하였다.

‘走肖’는 즉 ‘趙’자의 파획(破劃)이니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을 암시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광조 및 사림세력을 발탁했던 중종 역시 마음을 돌리게 되고, 이를 간파한 남곤∙심정∙홍경주 등은 밤중에 갑자기 대궐로 들어가 신무문에 이르러 왕에게 조광조의 무리가 모반하려 한다고 아뢰었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 이하 여러 사람을 일단 하옥되었다가, 모두 먼 곳으로 귀양 보내졌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남곤∙심정 등의 주청으로 이들 조광조 이하 70여 명을 모두 사약으로 죽였다. 이때에 죽은 사람들을 가리켜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한다.

너무 날카롭고 급진적이었던 개혁가

기묘사화로 그동안 조정에 진출해 있던 많은 사림이 화를 당하게 되고, 결국 이 일로 조선 내 쇄신의 분위기는 일단 주춤해졌다. 그리고 이어서 명종 초 척신세력의 대결 과정에서 발생한 을사사화로, 다시 한번 사림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법, 명종 대 후반부터 척신세력이 퇴조를 보이고 점차 사림 세력이 정국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선조 즉위와 동시에 정치를 주도하게 되면서 앞서 조광조가 주장했던 이른바 도학정치를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조광조는 시대를 앞서가는 개혁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조광조 묘소(Ⓒ이근호).

그러나 시대를 앞선다는 것은 결국 당대 사회의 대세와 충돌하게 되고, 끝내는 당사자의 희생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잘 아는 율곡 이이는 조광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오직 한 가지 애석한 것은 조광조가 출세한 것이 너무 일러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이 아직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충현(忠賢)도 많았으나 이름나기를 좋아하는 자도 섞이어서 의논하는 것이 너무 날카롭고 일하는 것도 점진적이지 않았으며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기본을 삼지 않고 겉치레만을 앞세웠으니, 간사한 무리가 이를 갈며 기회를 만들어 틈을 엿보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신무문(神武門)이 밤중에 열려 어진 사람들이 모두 한 그물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사기(士氣)가 몹시 상하고 국맥(國脈)이 끊어지게 되어, 뜻있는 사람들의 한탄이 더욱 심해졌다.” (율곡전서 [동호문답]에서)

이이는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한 점을, 조광조의 학문의 숙성되지 않았다는 점, 너무 급진적이었다는 점, 기본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제시하고 있다. 율곡의 이 같은 지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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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글쓴이 이근호는 조선후기 정치사와 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대중과 소통하려는 차원에서 [이야기 조선왕조사],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사전] 등을 출간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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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