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黃喜, 1363~1452)는 누구에게나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며 조선조 최장수 재상이다. 그는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건국 초기 조선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오늘날에도 존경받는 조선의 최장수 재상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조선조에도 명재상을 꼽는다면 황희를 거론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황희는 조선조의 최장수 재상으로 기록될 만큼 화려한 정치경력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재상이었다. 황희가 활동하던 시기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던 우리 역사의 격동기 가운데 한 시기였다. 고려 말 과거 급제 뒤 성균관 학관을 거치면서 청운의 푸른 꿈을 키우던 황희는 고려 대신 새왕조 조선이 건국되는 역사적 사건 앞에서 한때 정치적 시련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곧 이어 조선에 출사한 황희는 직예문 춘추관을 비롯해 사헌부 감찰 및 형조·예조·병조·이조의 정랑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언관직인 우사간대부 이외에도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인 승정원 소속의 좌부대언과 지신사 등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관직을 지냈다. 여기서 지신사란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되는 관직으로, 평소 황희를 눈 여겨 본 태종의 발탁에 의한 것이었다. 황희에 대한 태종의 예우는 상당하였다. 그가 예조판서로 옮겼을 때 마침 병이 들었다. 이에 태종은 내의(內醫) 김조와 조청 등을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고 조석으로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는 병이 나았다는 소식에, “이 사람이 성실하고 정직하니 참으로 재상이다. 그대들이 병을 치료했으니 내가 매우 기쁘게 여긴다.”고 하며, 이들 내의에게 후한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황희는 세종 즉위 즈음에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 문제와 관련해서 남원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세종의 부름에 응해 조정에 나왔다. 물론 역사에서 가정이란 있을 수 없으나, 후술하듯이 이때 만약 황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 세종은 국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종은 즉위 후 황희를 불러들였으니 이 순간 인재를 알아보는 세종의 뛰어난 혜안을 느끼게 한다. 황희는 이후 예조판서를 비롯해 20여 년 이상 재상직에 있었다. 1452년 그가 사망한 직후에 작성된 실록의 졸기에는 다음과 같이 그를 평하고 있다.
“황희는 관대하고 후덕하며 침착하고 신중하여 재상(宰相)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후덕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 재상이 된 지 24년 동안에 중앙과 지방에서 우러러 바라보면서 모두 말하기를, ‘어진 재상(宰相)’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황희가 태종과 세종의 특별 대우를 받으며 24년 간 재상의 자리에 있을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소신과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관용을 베풀 줄 아는 그의 정치적 자세 때문이 아닐까!
소신과 원칙을 견지한 정치적 자세
1418년 건국된 지 얼마 안 된 새 왕조 조선에 정치적 파란이 일어났다. 바로 당시까지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위시킨 사건이다. 세자의 교체는 자칫 엄청난 살육을 불러올 정도로 정치적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양녕대군을 폐위시킨 것은 계속되는 세자의 잘못된 행동 때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폐위시킨 태종도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어렵게 세운 새 왕조의 명운이 걸린 문제이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희가 세자의 폐위를 반대로 하고 나섰다.
소신과 원칙을 지키면서도 관용과 배려를 보인 최고의 명재상 황희. <출처 : stein at ko.wikipedia.com>
당시 이조판서로 재직하던 황희는 대부분의 신료가 세자 폐위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폐장입유(廢長立幼;, 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움)는 재앙을 부르게 되는 근본이옵고, 또 세자가 비록 미쳤다고 하오나, 그 성품은 가히 성군이 될 것이오니, 치유에 주력하시기 바라옵니다.”라며 국왕의 판단에 재고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태종과 주위 대부분 신료는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황희를 지탄하였다. 황희는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고 반대하다가 마침내 강등되어 귀양갔고, 태종은 여러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양녕대군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시켰다. 황희의 정치적 소신과 원칙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황희의 소신과 원칙을 견지하는 자세는 일상적인 공무의 집행과정에서도 나타났다. 황희가 정승이 되었을 때 마침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종서가 공조판서가 되었다. 하루는 공적인 모임에서 황희와 김종서가 대면하였을 때, 김종서가 자신이 수장으로 있던 공조로 하여금 약간의 술과 음식을 갖추어 들이도록 하였다. 그러자 황희가 노하여,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정부의 곁에 설치한 것은 삼공(三公)을 접대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시장하다면 의당 예빈시로 하여금 장만해 오게 할 것이지 어찌 사사로이 제공한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김종서를 엄하게 꾸짖었다.
또 하루는 의정부의 모임이 있었는데 마침 호조 관원 하나가 황희가 추울까 걱정하여 율무죽을 주었다. 그러자 황희가 말하기를, “탁지(度支:호조)가 어찌 재상의 아문(衙門)에 음식을 지급하는가. 장차 논계(論啓)하여 정배(定配)하겠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관청이나 관직마다 각자가 정해진 소임과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해된다. 황희가 생존하던 시기가 조선 건국 초기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관직 기강을 세우는 것은 중요한 문제라 하겠다. 이때 황희는 관리들에게 원칙에 따른 직무 수행을 요구하였다.
배려와 관용의 리더십
황희에 대해서는 그와 얽힌 많은 일화들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청빈함을 강조하거나 관용과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련된 것이다. 아마도 이 점이 그가 20여 년 이상 재상직에머물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공무에 잠깐 짬을 내어 집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집의 여종이 서로 시끄럽게 싸우다가 잠시 뒤 한 여종이 와서 “아무개가 저와 다투다가 이러이러한 못된 짓을 하였으니 아주 간악한 년입니다.”라고 일러바쳤다. 그러자 황희는 “네 말이 옳다.”고 하였다. 또 다른 여종이 와서 꼭 같은 말을 하니 황희는 또 “네 말이 옳다.”고 하였다. 마침 황희의 조카가 옆에 있다가 화가 나서는 “아저씨 판단이 너무 흐릿하십니다. 아무개는 이러하고 다른 아무개는 저러하니 이 아무개가 옳고 저 아무개가 그릅니다.”하며 나서자 황희는 다시 또 “네 말도 옳다.”고 하며 독서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언뜻 보면 주관이 없는 자세이다. 세상사 시비를 논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한쪽의 입장만을 듣게 된다. 오히려 황희가 보여준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주관이 없기 보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했던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할 줄 아는 자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는 또한 노비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 줄 알았고, 자신의 집에 있는 배를 따려는 젊은이를 꾸짖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집 시동(侍童)을 시켜 배를 따다 주는 관용의 미덕을 갖추기도 하였다.
청백리인가? 황금대사헌인가? 인간 황희의 다양한 모습
조선조에서 재상까지 역임하였으면서도 청백리로 거론되는 인물로는 약 18명이 거론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단연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이가 황희이다. 황희의 맏아들은 일찍부터 출세하여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돈을 모아 살던 집을 새로 크게 짓고 낙성식을 하였다. 말이 낙성식이지 크게 잔치를 베푼 터이라 그 자리에는 고관들과 권세 있는 친구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집들이 잔치가 시작되려 할 때, 아버지 황희가 돌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선비가 청렴하여 비 새는 집안에서 정사를 살펴도 나라 일이 잘 될는지 의문인데, 거처를 이다지 호화롭게 하고는 뇌물을 주고 받음이 성행치 않았다 할 수 있느냐. 나는 이런 궁궐 같은 집에는 조금도 앉아 있기가 송구스럽구나.” 그리고는 음식도 들지 않고 즉시 물러가니, 아들은 낯빛이 변하였고 자리에 참석하였던 손님들 역시 무안해졌다. 황희 본인은 비가 새는 초가에서 살면서, 있는 것이라고는 누덕 누덕 기운 이불과 서책이 전부였다고 하니, 아들의 호사가 불편했을 것이다. 과연 최장수 재상을 지냈으면서 이처럼 청빈하였으니 청백리가 됨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황희라고 하여 어찌 재물이 싫어했겠는가? 그 역시 한때는 ‘황금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산 적이 있었다. 1428년(세종 10년) 6월 25일 황희는 박용의 아내로부터 말을 뇌물로 받은 일로 인해 사직을 청하였다. 당시 이 기사에 대해 사관(史官)의 평가가 있었는데, 사관은 박용의 아내 관련 일 말고도 아래와 같은 내용을 추가로 적고 있다.
김익정(金益精)과 함께 잇달아 대사헌이 되어서 둘 다 중 설우(雪牛)의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황금(黃金) 대사헌’이라고 하였다. 또 난신 박포(朴苞)의 아내가 죽산현(竹山縣)에 살면서 자기의 종과 간통하는 것을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니, 박포의 아내가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 넣었는데 여러 날 만에 시체가 나오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縣官)이 시체를 검안하고 이를 추문하니, 박포의 아내는 정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서울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으며, 포의 아내가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이 밖에도 이 날의 기사에는 황희가 장인 양진(楊震)에게서 노비를 물려받은 것이 단지 3명뿐이었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도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農幕)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백리로 알려진 황희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다.
갈매기와 함께 여생을 보내기 위해, 반구정
경기도 파주시에는 황희가 지었다는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반구정은 황희 사후 폐허가 되었다가 17세기에 후손에 의해서 중수되었다. 후손들은 반구정을 중수한 뒤 미수 허목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는데, 그가 지은 기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물러나 강호(江湖)에서 여생을 보낼 적에는 자연스럽게 갈매기와 같이 세상을 잊고 높은 벼슬을 뜬 구름처럼 여겼으니, 대장부의 일로 그 탁월함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겠다.
갈매기와 여생을 보내려고 만든 정자라는 뜻이다. 조선조 5백년을 통틀어 으뜸가는 명재상이라 일컬음을 받는 황희는 재상으로 무려 20여 년 이상을 있으면서, 태종으로부터 세종∙ 문종에 이르는 3대를 내리 섬겼다. 나이 아흔줄에 들어서서도 오히려 기운이 정정하여 국사를 두루 보살폈다. 이처럼 당대에 부러울 것이 없던 황희가 굳이 왜 말년에 미물인 갈매기와 여생을 보내려고 했을까?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권력의 무상함을 느낀 것일까? 정작 반구정을 처음 세운 황희의 대답이 없어 알 수는 없다.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른바 ‘자분(自分)’을 생활의 중요 덕목으로 생각하였다. 자기 분수에 맞게 생활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황희 역시 이를 실천하기 위해 반구정을 지은 것은 아닐까? 오늘날 자본의 논리에 빠져 허우적되면서도 끊임없이 욕심을 채워나가는 탐욕스런 현대인들에게 잠시 반구정에 들러 그 의미를 되새겨 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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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 글쓴이 이근호는 조선후기 정치사와 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대중과 소통하려는 차원에서 [이야기 조선왕조사],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사전] 등을 출간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 그림
- 장선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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