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은 642년 압량주 군주가 되었고, 644년에는 소판에 올랐다. 그해 가을 상장군이 되어 백제의 7개 성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으나, 백제가 매리포성을 공격하자 가족들도 만나지 않은 채 다시 출정하여 백제군 2,000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개선하자마자 또 다시 서부전선으로 달려가 백제군을 물리쳤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평생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명장이요 전략가였다.
선덕여왕의 비호 아래 김유신과 김춘추가 급성장하자 비담과 염종을 비롯한 구세력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면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 난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덕여왕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진덕여왕마저 재위 8년 만에 죽자, 김춘추가 왕위를 이어 태종무열왕이 되었다. 처음에는 여러 신하가 김알천을 왕으로 추천했으나 그가 사양하며 김춘추를 추천했다고 전하지만, 그 이면에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뒷받침한 김유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자신의 셋째 딸을 61세의 김유신에게 시집 보내 두 사람의 혈맹관계를 더욱 다졌다.
신라 내부에서 정권을 장악한 김유신과 김춘추는 660년 당나라와 힘을 합쳐 백제 정벌에 나섰다. 나당 군사동맹을 성사시킨 것은 김춘추였고, 김유신은 대장군으로 군사를 이끌었다.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을 무너뜨린 김유신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공격하기 위해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합류했다. 황산벌 전투가 워낙 치열해 예정보다 하루 이틀 도착이 늦었다. 소정방은 이를 핑계로 신라의 장군 김문영을 목 베려 했다. 신라군과의 첫 만남에서 자신의 위엄을 세우려는 술수였다.
그러자 김유신이 도끼를 잡고 “먼저 당나라 군사들과 싸우고 나서 백제를 쳐부수겠다.”며 성난 머리털을 꼿꼿이 세웠다. 소정방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사비성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김유신은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대각간이 되었다. 신라의 최고 관등인 각간에 ‘대’자를 더한 자리였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죽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올라 문무왕이 되었다.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음과 같소.”라며 선왕과 다름없는 믿음을 보였고, 김유신 또한 죽을 때까지 문무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신라는 668년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다. 74세의 나이로 병을 앓고 있었던 김유신을 배려한 왕은 전장에 참가하는 대신 국정을 살피게 했다. 그 해 9월 고구려가 멸망했다. 고구려 멸망 후 태대각간의 자리에 올랐던 김유신은 673년 7월 1일 79세의 나이로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