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661∼681)은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아버지를 도와 국사의 중대한 책무를 다하였으며, 왕위에 올라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하는 일의 거의 전부를 해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삼한을 통합한 실질적인 왕으로, 이후 신라의 국격(國格)을 한 단계 높인 명군(明君)으로 추앙받아 모자라지 않다. 신라를 신라답게 만든 이가 바로 문무왕이었다. | |
잘난 아버지와 똑똑한 아들을 둔 문무왕
잘난 아버지를 두고 똑똑한 아들이 뒤를 받쳤으니 문무왕(文武王)은 겉으로 보면 행복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아버지 무열왕(武烈王) 김춘추는 그의 할아버지 진지왕이 폐위되는 바람에 성골에서 강등되어 진골이 되었고, 영영 왕위와는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가 천신만고 끝에 그 자리에 오른 의지의 사나이였지만, 그것은 의지만이 아닌 본인의 타고난 탁월한 능력 때문이기도 했다. 문무왕은 그렇게 잘난 아버지의 뒤를 잇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제 뜻을 다 펴기에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다음, 아버지가 일으킨 일의 실질적인 마무리를 다 해냈으니, 사실 문무왕은 아버지보다 더한 능력을 타고나 그것을 충분히 발휘했다고 보아야 옳다.
무열왕과 문무왕 그리고 신문왕(神文王), 3대를 나란히 써놓고 보면 재미있는 이름 짜맞추기가 가능하다. 문무왕을 기준으로 아버지 무열왕은 무(武)를, 아들 신문왕은 문(文)을 가지고 만든 이름이다. 문득 두 이름이 문무왕에게서 갈라져 나간 느낌이 든다. 물론 왕의 이름은 그가 죽고 난 다음에 붙여지므로, 무열왕을 지을 때 문무왕은 아직 불리기 전이고, 문무왕을 지을 때 신문왕 또한 불리기 전이다. 문무왕을 중심으로 앞에다가 무를 주고 뒤에다가 문을 주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에 불과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데에 주목해 보면, 후세의 사람들에게 이 3대가 걸치는 동안 문무왕이 얼마나 강하게 각인되었는지 알 수 있다.
문무왕은 태자 시절부터 벌써 아버지 이상의 눈부신 활약을 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인 진덕여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늦어서야 왕위에 오른 아버지를 도와 병부령의 자리에서 나라의 기강을 잡았다. 아버지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한 승전보 속에 생애를 마쳤지만, 아들은 계속되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제압하고,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 군사마저 쫓아내기까지 과중한 임무를 맡아야 했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무열왕의 업적이 화려한 서곡에 불과할 정도로 문무왕은 통일의 주역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하였다.
문무왕의 이름은 법민(法敏)이었다. 아들인 신문왕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었다. 법민과 정명을 다시 한 번 짜맞추기 해보면 법정(法政)∙민명(敏明)이다. 문무와 신문 2대에 걸쳐 법과 정치가 민첩하고 밝게 이루어지길 소원한 이름이다. 그 시절 신라는 정말 그런 나라였다. | |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4년(674년)에 조성된 연못인 경북 경주 안압지(사적 제 18호)
신라를 신라답게 만든 장본인
문무왕은 즉위하던 해인 661년부터 한시도 쉴 날 없는 정복 전쟁을 수행하여야 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가 재위했던 기간의 중요한 활동을 정리해 보자. 먼저 백제 부흥군을 물리치고자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과 함께 당나라에서 파견된 손인사(孫仁師)의 증원병과 연합해,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 이 전쟁은 665년 백제 왕자였으며 웅진도독(熊津都督)인 부여 융(扶餘隆)과 화맹(和盟)을 맺으며 일단락된다.
이어 문무왕은 666년부터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연합해 평양성을 공격하여 668년에 함락시켰는데, 당나라는 점령지의 지배를 위해 평양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중심으로 9도독부, 42주, 100현을 두고 통치하였다. 이때부터 신라와 당나라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문무왕은 고구려 부흥 운동과 연결해 당나라 및 당나라와 결탁한 부여 융의 백제군에 대항하였다. 670년 백제의 63성을 공격해 빼앗았으며, 671년에는 가림성(加林城)을 거쳐 석성(石城) 전투에서 당나라 군사 3,500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자 당나라는 672년 이후 대군을 동원해 한강에서부터 대동강에 이르는 각지에서 신라와 전투를 벌였다.
당나라는 674년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管)으로 삼아 신라를 치는 한편,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일방적으로 신라왕(新羅王)에 봉하였다. 문무왕에 대한 불신의 뜻이었다. 전쟁은 675년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해에 설인귀(薛仁貴)가 장수가 되어 쳐들어왔는데, 신라 쪽에서는 문훈(文訓)을 내보내 이에 대항하였다. 신라는 당나라 군사 1,400명을 죽이고 병선 40척, 전마 1,000필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전세는 신라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결국 당나라도 더 오래 전쟁을 끌고 가기가 벅찼다. 드디어 676년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遼東城)으로 옮겼다. 문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에 길고 긴 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물론 신라의 삼국통일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대동강부터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한 정도에서나마 한반도를 통일한 일은 이후 한민족(韓民族)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데 획기적인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일의 거의 전부가 문무왕의 수고로 이루어졌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나라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중앙과 지방 행정조직의 개편 또한 문무왕의 업적에 들어간다. 특히 진흥왕 때부터 설치한 소경(小京)을 확충한 것이 눈에 띈다. 678년의 북원소경(北原小京), 680년의 금관소경(金官小京)의 설치가 대표적이다. 경주는 한반도 전체로 보아 지나치게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소경은 이 때문에 생기는 비효율성과 불편함을 극복하는 데 활용되었다. 이는 신문왕 때에 와서 5소경제(小京制)로 완성되었다. 한마디로 문무왕은 신라를 신라답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 |
사천왕사를 통해 보는 문무왕의 성정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문무왕에 대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였다. 대표적인 사건 하나로 한 왕대를 정리한 다른 조와 차이가 난다. 그러나 여기에도 가장 중심 되는 이야기는 역시 하나, 곧 사천왕사의 건립에 얽힌 일화이다. 사천왕사는 지금 경주시 배반동의 낭산 아래에 터만 남아 있다. 바로 위는 선덕여왕릉이다. 낭산 아래가 도리천이라는 왕의 유언은 바로 이 절이 생겨서 이룩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문무왕 때에 사천왕사를 지은 까닭은 선덕여왕의 유언이나 맞춰주려는 한가한 목적이 아니었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드디어 당나라와의 싸움을 벌이던 때,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은 당나라의 옥에 갇히고, 당은 군사 50만 명을 동원하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절이 사천왕사였다. | |
문무왕 때 세워진 사천왕사 터, 문무왕은 당과의 전쟁으로 인한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천왕사를 세웠다.
당나라 군대의 침략 소식을 신라에 전한 사람은 의상이었다. 왕은 급히 신하들에게 방책을 묻는다. 각간 김천존(金天尊)이 명랑(明朗) 스님을 천거하고,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하여 왔다는 명랑은, “낭산 남쪽 기슭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이곳에 사천왕사를 창건하고 도량을 열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절 지을 만한 틈이 없었다. 이미 당나라 군사를 실은 배가 신라 국경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명랑은 채색 명주를 가지고 임시로 절을 짓자고 말한다. 채색 명주로 절을 꾸미고, 풀을 가지고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를 맡는 신상이 만들어졌다. 전무후무한 특이한 절이었다. 명랑은 밀교승이다. 그가 이 절에서 다른 밀교승들과 함께 문두루(文豆婁)의 비법을 쓰자, 갑자기 바람과 물결이 거세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의상의 귀국연도를 고려하면 이때는 670년 전후이다.
명랑의 신통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671년에 한 번 더 당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비법을 베풀었는데, 전과 마찬가지로 배가 침몰하였다. [삼국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이 전투의 승리가 [삼국유사]에 따르면 사천왕사와 명랑의 덕분이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을 일연의 단순한 불교우호적인 기술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이야기의 핵심은 그 다음에 이어지기 때문이다. | |
막강한 군대를 가졌다고 자부하던 당나라가 연전연패하자 그 까닭을 따지는데, 당나라 고종에게 잡혀 있던 신라의 신하들이 “윗나라의 은혜를 두터이 입어 삼국을 통일했으므로, 그 덕을 갚기 위해서 새로 천왕사를 낭산 남쪽에 창건하고, 황제의 만년수를 빈다고 합니다.”라고 둘러댔다. 고종은 기뻐서 악붕귀(樂鵬龜)라는 신하를 신라에 보내 그 절을 살피게 했다. 문무왕은 이제 당나라 사신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이 절을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남쪽에다 따로 새 절을 창건하고, 악붕귀에게는 거기로 안내하였다. 그런데 눈치 빠른 악붕귀가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문무왕의 마지막 수단은 뇌물이었다. 황금 1천 냥을 악붕귀에게 주었다. 뇌물은 필요악이다. 악붕귀는 제 나라로 돌아가 천연덕스럽게 보고하였다. 신라 사람들이 황제의 장수를 빌고 있었다고 말이다.
문무왕은 그런 사람이었다. 힘과 지혜로, 그도 저도 아니면 뇌물을 써서라도, 나라에 도움이 되고 백성을 안정시킬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천왕사를 짓고 남에게 섣불리 내보이지 않는 이 이야기를 실어 일연은 문무왕이 왕으로서 얼마나 처절히 나라를 지켜냈는가 설명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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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 즉위 이듬해(682년)에 완공된 감은사지 3층석탑. 문무왕은 생전에 동해안에 자주 침범하는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고 감은사를 세웠으나, 아들인 신문왕 때에 완성하였다. (국보 112호) | |
대왕암에 얽힌 논란과 그 진실
문무왕이 태어난 해를 흔히 626년이라 하지만 이는 근거가 좀 희박하다. 그 해라면 진평왕 48년인데, 김유신이 동생 문희가 제멋대로 아이를 가졌다면서 길길이 날뛴 사건을 [삼국유사]에서는 선덕여왕 때라고 적고 있다. 문희가 가졌던 아이가 문무왕 법민이다. 그러니까 문무왕은 선덕여왕 시대(632~646)의 어느 해에 태어났다고 해야 한다. 둘 가운데 어느 쪽인지 확실하지 않다.
일단 그렇다 쳐놓고, 626년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문무왕이 죽은 해의 나이는 56세이다. 아버지 또한 58세의 단명이었지만 그는 이보다 더 짧다. 문무왕은 마지막에 “풍상을 무릅쓰다 보니 고질병이 생겼으며, 정무에 애쓰다 보니 더욱 깊은 병에 걸리고 말았다.”([삼국사기]에서)라고 말하는데, 그의 병이 암이었으리라 추정하기도 한다. 풍찬노숙(風餐露宿)이라 말하는 문무왕의 제 인생에 대한 평가를 결코 과장이라 할 수 없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이 죽은 다음의 일을 주문한다.
“꼴 베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영혼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되,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삼국사기]에서)
이 말만 본다면 너무 큰 봉분을 만들지 말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삼국유사]에서도 “왕이 유언하신 말씀에 따라 동해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라는 말이 나오지만, 이것이 화장(火葬)을 하여 동해에 뿌렸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 역사상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인 대왕암 논란은 이처럼 다소 불명확한 기술에서부터 생겨났다. | |
경주시 양북면 바닷가의 대왕암은 문무왕이 죽고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안치한 해중 왕릉이라 알려져있다.
지금은 경주시에 편입된 양북면 바닷가의 대왕암은 문무왕이 죽고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안치한 해중 왕릉이라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 1964년에 실시된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의 보고서는 화려하기만 하다. 암초 중앙부를 파내고 육지에서 운반하여 온 거석(巨石) 하나를 깔고 거기에 신골(身骨)을 봉안했다, 중앙부에 물을 가두어 두기 위해 동서로 긴 수로(水路)를 마련하였다, 암초의 둘레에는 크고 작은 열둘의 암석이 돌출하고 있어서 십이신장(十二神將)의 호위처럼 보인다는 등의 주장이 그것이다. 해가 뜨면 석굴암의 부처님 이마의 구슬에 반사된 햇살이 이 대왕암에 이른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박도 적지 않다. 한마디로 어떤 인공적인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뚜껑 돌은 다듬은 흔적이 없는 자연석인데, 주위의 병풍처럼 둘러싸인 돌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며, 배수로는 용의 출입구라지만 육지 쪽을 향하고 일본 쪽을 등지고 있으니, 나라를 지키는 호국용이 되겠다던 문무왕의 의지와는 다르다.
두 주장은 팽팽하여 아직 정설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해결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자료를 다시 보고 민속학적 지식을 추가하여, 역사와 전승의 함수관계 속에서 대왕암의 정체를 재정립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대왕암은 앞으로도 한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 |
- 글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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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