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공주시 반포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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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숙모전의례연구(사단법인 숙로회 금강민학회) |
사진출처 : | 20090408 촬영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鷄龍山)에 있는 절.
〔창건 및 연혁〕
‘동계사(東鷄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724년(성덕왕 23) 상원(上願)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懷義)가 절을 창건하여 청량사(淸凉寺)라 하였고, 920년(태조 3) 도선(道詵)이 중창한 뒤 태조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 유거달(柳車達)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기 위해 동학사(東鶴祠)를 지었다. 그리고 사찰을 확장한 뒤 절 이름도 ‘동학사(東鶴寺)’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으므로 동학사(東鶴寺)라 하였다는 설과, 고려의 충신이자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인 정몽주(鄭夢周)를 이 절에 제향하였으므로 ‘동학사(東學寺)’라고 하였다는 설도 전한다. 1394년(태조 3) 고려의 유신(遺臣) 길재(吉再)가 동학사의 승려 운선(雲禪)과 함께 단(壇)을 쌓아서 고려 태조를 비롯한 충정왕·공민왕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1399년(정종 1) 고려 유신 유방택(柳芳澤)이 이 절에 와서 정몽주·이색(李穡)·길재 등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다음해 이정한(李貞翰)이 공주목사로 와서 단 이름을 삼은단(三隱壇)이라 하고, 또 전각을 지어 삼은각(三隱閣)이라 하였다.
1457년(세조 3) 김시습(金時習)이 조상치(曺尙治)·이축(李蓄)·조려(趙旅) 등과 더불어 삼은단 옆에 단을 쌓아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이어서 단종의 제단을 증설하였다.
다음 해에 세조가 동학사에 와서 제단을 살핀 뒤 단종을 비롯하여 정순왕후(定順王后)·안평대군(安平大君)·금성대군(錦城大君)·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정분(鄭奔) 등과 사육신, 그리고 세조찬위로 원통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서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고 인신(印信 : 도장)과 토지 등을 하사하였으며, 동학사라고 사액한 다음 승려와 유생이 함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1728년(영조 4) 신천영(申天永)의 난으로 이 절과 초혼각이 모두 소실되었고, 1785년(정조 9) 정후겸(鄭厚謙)이 위토를 팔아버리자 제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1814년(순조 14) 월인(月印)이 예조에 상소하여 12차례의 소송 끝에 잃었던 토지를 되찾았으며, 옛 원당터에 실상암을 짓고 절을 중건하여 절 이름을 개칭하되 '진인출어동방(眞人出於東方)'이라 하여「東」자를 따고 '사판국청학귀소형(寺版局靑鶴歸巢形)'이라 하여 「鶴」자를 따서 동학사라 명명했다는 설이 있으며, 10여 칸의 사옥과 혼록봉장각(魂錄奉藏閣)을 세웠다.
1827년 홍희익(洪羲翼)이 인신을 봉안하는 집을 따로 지었으며, 충청좌도어사 유석(柳奭)이 300냥을 내고 정하영(鄭河永)이 제답(祭畓)을 시주하여 다시 제사를 베풀었다.
1857년(철종 8)에는 우운 아준 스님이 동학사에서 지장계를 주관하였고, 이어서 1864년 갑자(고종 원년) 봄에 금강산에 있던 만화 보선 스님이 이곳으로 와서 제자인 우운 아준 호봉스님 등과 함께 오래된 건물을 전부 헐어내고 전각 40칸과 초혼각 2칸을 새로 지었는데, 초혼각은 1904년(광무 8) 숙모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867년(고종 4)에는 포운응원(1807-1867)스님이 이곳에서 하안거 결제에 들어간 직후 입적했다.
그 뒤 만화 스님의 제자 경허성우(1849-1912)스님이 1871년(고종 8)에 이곳 동학사에서 강의를 열었고, 1879년에는 이곳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한국의 선풍을 드날렸다.
만화화상이 중흥주라면 만우상경(萬愚常經, 1855~1924년)은 한말과 일제 초의 격심한 사회혼란과 불안속에서 동학사를 잘 지켜나간 수성주라 할 수 있다.
1889년 주지직을 승계받은 만우스님은 1898년 대웅전에 탱화 4폭을 안치하여 봉안하고, 10년 뒤(1909년)에 기와중수 불사를 하였다.
근대에서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절의 건물이 전부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이후 서서히 중건되었다.
6·25전쟁 때 옛 건물이 모두 소실되자 1960년 이후에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무량수각·대방·삼은각·숙모전·범종각·동학사·동학강원 등이 있다.
이 중 동학강원은 운문사의 강원과 함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수련도량으로 손꼽히고 있다.
산내암자로는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석봉암·천장암·마쇄암·보현암·실상암·옥천암·극락암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관음암·길상암·문수암·미타암·귀명암·상원암 등이 있다.
동학사에는 다른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이 있는 건축물이 있다. 동학사 경내에 들어서려면 두 기둥이 우뚝한 홍삼문을 볼수 있는데, 이는 궁궐, 관아, 능, 묘, 원 앞에 세우는 문으로 사찰과는 어울리지 않는 30자 이상의 홍살문이다. 이것은 동학사가 사원이면 서도 경내에 유신의 사당인 동계사, 그리고 삼은각과 숙모전이 있는 점들과 상호 연관된 인연들이 어우러져 세워진 것이다.
1) 동계사 : 신라가 멸망한 후 신라의 遺臣이자 高麗의 開國功臣인 柳車達이 高麗太祖 19년(丙申年 서기 936년)에 太祖의 願堂으로 된 동학사에 와서 遊觀하던 次에 山中에 모셔진 신라 始祖王 朴赫居世 및 朴堤上의 影幀을 보고 朴公의 忠烈을 思慕하여 東鷄祠를 創建하고 社公을 招魂하여 始祖王과 함께 제사지내 오다가 朝鮮 英宗 戊申(서기 1728)에 申天永이 衡火하여 全燒된 후 제사 지내던 것이 폐해졌다가 1956년(丙申) 9월에 중건되었다
2) 삼은각 : 근세조선 태조 3년(갑술년-서기 1394)에 조선조 이성계의 집권에 등을 돌리고 방랑하던 고려말의 학자 야은 길재는 이곳 동학사에 와서 이성계에 저항하다 죽은 충신 포은 정몽주의 넋을 위로했다. 방황하는 충신의 넋을 불러 박제상을 모신 동계사 곁에 설단하여 포은 정몽주를 위해 초혼제를 지냈던 것이 당시 삼엄했던 조선조 집권 체제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칭은 제2대 정종원년(1399) 고려 유신인 금헌 유방택이 포은의 신당 옆에 목은 이색을 초혼하여 포은과 함께 제사지내고 그후에 야은 길재등을 함께 모셔 삼은각을 창설하였다고 한다.
초혼단 건물은 그 이듬해(조선조 제2대 정종2년) 1400년에 지었으나, 제7대 세조 때에 와서야 정식 각을 짓게 되었고, 그 후 금알 유방택·도은 이숭인·죽헌 나계종을 추가 배향, 현재 6위를 향배하고 있다.
3) 숙모전 : 이곳은 매월당 김시습의 충절과 애통함이 깃들인 곳이다.
매월당은 당대걸승으로서 생육신의 한 분이다. 제7대 세조 원년 거지꼴의 한 승려가 삼은각에 엎드려 통곡을 하고 있었는데 이 거지승려 매월당은 제6대 단종이 숙부(세조)에게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후 여기에 와 그들의 혼백을 붙들고 통곡을 했던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조선 제7대 세조2년(1456년) 6월에 사육신의 비극이 일어나고 사육신이 피화를 당하자 서울 노량나루언덕에 널려있는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 강언덕에 암매장하고 다음해 정축에 동학사에 와서 삼은각 곁에 단을 설하고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이어서 단종의 제단을 쌓아 숙모전을 세웠다.
그로부터 세조에 반대하는 조상치(당시 부제학)를 비롯한 선비들이 몰려들어 단종의 어포를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며 초혼제를 지냈다.
매월당은 또 방랑 길에 올랐으나 죽기 전까지 해마다 제사를 지낼 때 어김없이 찾았다.
대왕 꿈에 단종왕모가 나타나 애원하기를 그대 이미 왕위를 차지하였으니 어린 단종의 생명을 보살펴 달라고 삼일을 거듭 현몽하였으나 세조대왕이 영영 거절하므로 최후에는 더럽다고 용안을 향해 침을 뱉었으니, 용안을 돌이키자 뱉은 침은 등에 떨어졌는데 깨어난 후 당처가 가려움으로 불치병 만신창이라는 병이 발생하였다.
다음해 세조 대왕은 옥체에 발생한 만신창 병이 더욱 심하여 백약이 무효라 명승사원에 가서 불보살의 가피로 고쳐볼까 하고 빌던 중 동학사에 왔다가 삼은각 옆에 품자의 단을 보고 무슨 단이냐 물은즉 단종 승하후 매월당 김시습이 내사하여 초혼제를 지냈다하니 세조 대왕이 한 생각을 뉘우쳐 단종의 원한을 풀어주면 몸의 병이 나을까 하여 세조 3년(1457)에 단종을 비롯하여 정순왕후·안평대군·금성대군·김종서·황보인·정분 등과, 세조의 왕위 찬탈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사육신 및 그 밖의 280여위의 병자원적과 추가원적(명박)을 만들어 비단에 써서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을 짓도록 했다.
세조가 서서 울었던 바위를「울 바위」걸음을 자작거렸다고 해서「자작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지금도 동학사 입구에 남아있다.
그 후 제21대 영조4연(1728)에 신천영의 난으로 소실되어 혼기를 잃어 삼상육신등 58위만을 봉안하였던 것을 고종6년(1869)에 만화화상이 건물3간을 중건하였다.
고종20년(1883) 충청좌도어사 유석이 동서무를 건립하여 군신을 나누어 봉사하였고 고종41년(1904)에 숙모전으로 이름을 고쳐 사액 하였다. 그 후 충신 26위를 추가해 현재 89위만 봉안되어 있다.
〔사찰풍경〕
계룡산 동학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전문강원(승가대학)으로 유명한 도량입니다. 지금도 동학사에는 수많은 비구니 스님들이 수학 수행정진하고 있습니다. 동학사는 비구니스님들이 수행공간이지만, 제사를 지내는 종묘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추모공간이기도 합니다. 그 연유를 살펴보면 불법의 위대함 자비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학사에는 사찰과 어울리지 않는 문이 있습니다. 왕릉, 종묘나 관아 등의 입구에 세우는 홍살문이 경내 입구에 커다랗게 세워져 있습니다. 또한 유교의 제당 같은 종묘가 대웅전 오른쪽에 3개의 전각이 있습니다. 3개의 전각은 신라와 고려, 조선의 충신들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당들입니다.
동계사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충신 박제상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입니다. 고려개국공신 유차달이 고려태조의 원당인 동학사를 유람하던 중 사중에 모셔진 박혁거세 및 박제상의 영정을 보고 박제상의 충열을 사모하여 경내에 ‘東鶴祠’라는 사당을 창건하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은각은 고려말 이성계에 저항 죽은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 야은 길재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초혼제를 지낸 단에 세운 각입니다. 현재 삼은각에는 3분이외에 금알 유방택, 도은 이숭인, 죽헌 나계종 위패가 모셔져있습니다.
숙모전은 단종과 사육신 등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원통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당입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사당은 세조의 명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세조는 동학사에 왔다가 삼은각 옆에 품자의 단을 보고 무슨 단이냐고 물었습니다.
김시습이 단종과 사육신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초혼재를 지낸 단이라는 설명은 들은 세조는, 원통하게 죽은 280여명의 이름을 비단에 써서 주며 토지를 내리면서 초혼각을 건립하라고 명하면서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했습니다. 또 세조는 사찰의 이름도 동학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합니다. 당시 세조가 서서 울었다는 바위(자작바위)가 동학사 입구에 남아 있습니다.
매년 동학사는 3월15일 과 10월 24일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남매탑 설화〕
전설에 따르면 오뉘탑 부근의 작은 토굴에서 수행하는 사람이 혼자 살았다. 그는 백제의 왕족이었는데 뜻하는 바가 있어 출가하여 고독한 수행자로 살았다. 어느 해 겨울밤이었다. 토굴 밖에서 애절하게 우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 나와 보니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입을 벌린 채 절규하고 있었는데, 호랑이 입속을 들여다보니 목에 비녀가 걸려 있었다. 그대로 두면 호랑이는 죽고 말 것이 분명했다. 스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호랑이 입속으로 손을 밀어넣어 비녀를 뽑아주었다.
호랑이는 스님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밤이었다. 토굴 밖에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스님이 나가봤더니 토굴 밖에는 웬 낯선 젊은 여자가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호랑이가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하여 그 보답으로 젊은 여자를 물어다 놓고 사라진 것이었다. 스님은 일단 여자를 토굴 안으로 안아 들여 놓고 따뜻한 물을 떠먹여서 살려냈다.
한참 뒤 여자가 깨어났다. 스님은 사정을 물었다. 여자는 경상도 상주가 고향인데, 그날 낮에 혼례를 치르고 저녁에 신방에 들려 하는데 그만 호랑이가 나타나 물려왔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일단 토굴에서 밤을 보낸 뒤 날이 밝는 대로 데려다 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폭설이 퍼붓기 시작했다. 계룡산은 눈더미에 파묻혀 모든 길이 막혀버렸다. 하는 수 없이 눈이 녹고 길이 드러나는 내년 봄까지는 함께 지내는 도리 밖에 없었다.
비좁은 토굴 속에서 함께 지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스님은 밤마다 끓어오르는 욕정을 염불과 참선으로 가라앉히면서 아무 일 없이 겨울을 났다. 이듬해 봄이 되자 스님은 자신과의 약속대로 그 여자를 경북 상주로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스님 혼자 사는 토굴로 되돌아 왔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의남매를 맺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훌륭한 승려생활을 마치고 입적했다. 그들의 제자들이 두 사람의 종교적 삶을 기려서 나란히 탑을 세웠으니 이를 오뉘탑 또는 남매탑이라 부른다.
동학사의 지정문화재 목록 및 해설
교통안내
1) 천안논산간고속도로 남공주IC → 공주 → 32번국도 → 박정자 삼거리 → 동학사
2) 경부고속도로 회덕IC →호남고속도로 유성IC →공주방면 32번국도 →박정자삼거리 →동학사 입구
현지교통
주변관광지
등산로
1) 동학사-은선폭포-관음봉-자연성능-삼불봉고개-신흥암-용문폭포-갑사(7.1km,4시간)
2) 동학사-은선폭포-관음봉-자연성능-삼불봉-남매탑-동학사(6.4km, 4시간)
3) 동학사-은선폭포-관음봉고개-연천봉고개-갑사(5.5km,3:30분)
4) 동학사-은선폭포-관음봉고개-연천봉고개-고왕삼-신원사(5.8km, 3:30분)
5) 동학사-은선폭포-관음봉-자연성능-삼불봉-남매탑-천장이골-동학사 집단상가(8.2km, 4:30분)
6) 동학사-남매탑-큰배재-천정골-동학사 집단상가(5.0km,2:30분)
7) 동학사-남매탑-삼불봉고개-금잔디고개-신흥암-용문폭포-갑사(4.7km, 3시간)
입 장 료
성인 : 2000원
주차시설
도움전화 : 동학사 종무소 042) 825-2570
남매탑가는길
남매탑가는 길
칠층석탑
오층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