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공주시 사곡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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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2009년 2월 촬영 |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泰華山)에 있는 절.
〔창 건〕
마곡사의 창건과 관련된 연혁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철종 2년(1851년)에 향보(享甫) 이원횡(李源橫)이 쓴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와 연대와 필자미상의 '선교양종대본산마곡사연기략초(禪敎兩宗大本山麻谷寺緣起略抄)'를 비롯한 일부 자료를 통해 그 역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하면 조선 효종 원년(1650년) 승려 覺淳이 마곡사를 중창하기 시작한 이후의 연혁은 소상히 밝히고 있으며, 그 내용도 사실적이다. 그러나 창건부터 각순에 의한 중창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단편적일 뿐 아니라 믿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이 마곡사의 연혁에 대해 밝히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이므로 이를 통해 마곡사의 연혁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하면 마곡사가 위치한 태화산에 자리 잡은 마곡사 터는 동방 제일의 복지로서 당 정관 17년(643년), 곧 신라 선덕여왕 9년(640년)에 자장율사(590~658년경)가 당에 들어가 태종을 뵈니 태종은 제자의 예로서 자장율사에게 국통(國統)의 호를 내렸다고 한다. 율사가 귀국하자 선덕여왕이 전(田) 200결을 내리고 마곡사를 창건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어 자장이 당에서 돌아와 7대 가람을 창건하였는데, 마곡사가 그 세 번째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관 17년과 선덕여왕 9년 사이에는 3년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자장이 당에 들어간 해가 정관 10년이고, 선덕여왕이 당 태종에게 자장의 귀국을 청해 자장이 귀국한 해가 정관 17년이어서 연도에 차이가 있다. 또한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도선의 '속고승전(續高僧傳)'에는 자장이 십여 곳에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 것에 반해 이 기록에서는 7대 가람을 창건한 것으로 바뀌고 있다. 더욱이 선덕여왕 시기 공주 지역은 백제에 속하는 영토로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자장이 이곳에 절을 창건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대광보전 중건기
‘마곡(麻谷)’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는 보철화상이 법을 얻어 오자 사람들이 삼(麻)처럼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사방에서 이 절로 법을 물으러 오거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골을 가득 메운 모습이 삼과 같아서 ‘마곡’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승려 중에 보철이라는 인물은 없으며, 중국 조계(曹溪) 혜능(慧能)(638~713년)의 증손 제자인 마곡 보철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철이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신라 말에 성주산문을 개창한 낭혜화상 무염(880~888년)이 마곡 보철의 법을 받아오기는 하였으나 그 또한 마곡사와 연관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충청도 내포 지역에서는 청양의 장곡사, 공주의 마곡사, 예산의 안곡사(현재 소실)를 ‘삼곡사(三谷寺)’라 불렀다고 한다. ‘긴골절’이나 ‘삼골절’ 등의 우리말이 ‘장곡사’나 ‘마곡사’ 같은 한자어로 바뀌게 되었고, 그 이름이 마곡이다 보니 중국의 마곡 보철이 연상되어 그 관계 속에서 창건주를 마곡 보철과 연관시킨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마곡사의 창건을 자장율사나 마곡 보철과 연관짓고 있는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의 창건과 관련한 기록은 믿기 어려우며, 현재 믿을만한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창건 이후의 연혁에 대해서도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초창은 자장(慈藏), 재조(再造)는 불일보조(1158~1210년), 삼건(三建)은 통효범일(810~889년), 사수(四修)는 도선(827~898년), 오성(五成)은 각순이라 적고 있다. 고려 명종 때 불일보조가 제자인 수우와 함께 마곡사를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보조는 범일이나 도선보다 앞서는 시기의 인물이어야 하므로 여기에서의 보조는 고려의 불일보조가 아닌 신라 말의 보조선사 체징(804~880년)이어야 선후관계가 성립된다.
〔연 혁〕
창건 이후 이 절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약 200년 동안 폐사가 된 채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던 것을 1172년(명종 2)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제자 수우(守愚)와 함께 왕명을 받고 중창하였다. 보조가 처음 절을 중창하려고 할 때 도둑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하였으나 도둑들은 오히려 국사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보조가 공중으로 몸을 날려 신술(神術)로써 많은 호랑이를 만들어서 도둑에게 달려들게 하였더니 도둑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거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도둑들에게서 절을 되찾은 보조는 왕에게서 전답 200결을 하사받아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의 건물은 지금의 배가 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다. 그 뒤 60년 동안 폐사가 되었다가 1651년(효종 2)에 각순(覺淳)이 대웅전과 영산전·대적광전 등을 중수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31본산(本山)시대에는 도내 100여 사찰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또한 이 절은 김구(金九)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한말 명성왕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쓰치다(土田壞亮)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죽인 김구는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를 가장하며 살았다. 지금도 대광명전 앞에는 김구가 심은 향나무가 있는데, 그 옆에 ‘김구는 위명(僞名)이요 법명은 원종(圓宗)이다’라고 쓴 푯말이 꽂혀 있다. 현재 이 절은 충청남도 70여 개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다.
마곡사 안내판
보조 체징은 그 고향이 공주이며, '선교양종대본산마곡사연기략초'에도 보조 체징에 의해 마곡사가 창건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곡사는 신라 말 9세기경에 보조 체징에 의해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당시 마곡사는 대규모의 가람은 아니었으며,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언급된 것처럼 국사천 서쪽의 미타주와 북쪽의 삼부도전, 절 남쪽의 율암 정도가 있었던 작은 규모의 가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선교양종대본산마곡사연기략초'에는 범일이 신라 문성왕 9년(847년)에 법우(法宇)를 확장하였고, 헌강왕 3년(877년)에 도선이 법우를 중수하여 도량을 일신했다는 간략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보조 체징에 이어 통효 범일과 도선으로 이어지면서 마곡사가 확장, 중수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국사당 비석
보조 체징은 가지산문의 창시자이며, 통효 범일은 사굴산문의 개창자이고, 도선은 동리산문에 속하는 인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 구산선문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각순이 마곡사를 중창할 무렵인 효종 때에는 불교계가 조계서종으로 단일화 되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각순이 황폐해진 마곡사를 중창하면서 절의 격을 높이기 위해 구산선문의 개창자들을 중창주로 모셨을 가능성이 있으며, 현재도 국사당에는 이들 세 스님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는 고려 신종 2년(1199년)에 불일 보조가 왕명에 의해 도적을 물리치고 마곡사를 중수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후 12세기말부터 15세기 후반 사이에 건립되었던 30여 채에 이르는 건물의 명칭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희지천(현.마곡천) 북쪽에 옛날 지었던 건물로 대웅전을 비롯해 시왕나한전, 진여문, 범종루, 향로전, 좌우승선당, 동서상실, 약사전, 서전, 성현대, 월파당, 총지료, 동별마구 등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영산전, 흥성루, 해탈문, 천왕문, 영자전, 향로전, 제주실, 월명당, 매화당, 낙화당, 백운당, 내외남전, 국사당, 가사당, 만경대, 응향각 등이 있었다. 이 외에 주변에 명적암, 은적암, 영은암 등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 후반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마곡사가 상당히 번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의 남원과 북원으로 이루어진 마곡사의 기본적인 배치기 이 무렵에 이미 그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층석탑
한편 현재 대광보전 앞에 위치한 5층 석탑 역시 고려시대 말기에 마곡사가 번영했음을 보여준다. 이 석탑은 고려 말에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건립된 것으로 전체적인 조형이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석탑과는 다르다. 특히 청동제 상륜부는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조형으로 라마탑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밖에 대광보전의 본존불은 조선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고려의 국력이 왕성하던 12세기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불상이 고려시대의 것이라면 5층 석탑과 함께 이 불상은 마곡사가 고려시대를 통해 계속해서 번성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조선시대 초기 마곡사의 상황에 대해서는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기록된 세조와의 인연을 통해 그 존속을 알 수 있다. 명나라 헌종 성화 연간(1465~1487년)에 세조가 이 절에 들렀다가 응봉(鷹峰) 아래 작은 봉우리에 올라 ‘만세불망지지(萬世不亡之地)’라 하면서 끝없이 감탄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영산전(靈山殿)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편액을 내려주시고 잡역의 부담을 면해주는 수패(手牌)를 내렸는데 병란에 그것을 잃어버려 애통할 따름이다. 지금 그 작은 봉우리를 일컬어 군왕대(君王臺)라 부른다. 현재 마곡사 영산전 현판에는 ‘세조대왕어필(世祖大王御筆)’이라는 글이 적혀 있고, 1457년에 세조가 온양 온천으로 내려오는 길에 광덕사와 개천사에 들러 노역을 덜어주고 토지를 하사하는 교지를 내린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기록은 사실에 부합되는 것으로 보인다.
북원 중창 관련자료
세조 이후 인조 때까지의 기록은 없다. 인조(재위 1623~1649년) 무렵에는 약 60여 년 동안에 걸쳐 승속(僧俗)이 모두 사라지고 황폐해졌으며, 문적과 사찰 소유의 나라에서 하사한 전결(田結)까지 모두 사라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후 효종대(1649~1659년 재위)에 들어와 승려 각순에 의해 중창되는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전의 기록에 비해 각순에 의한 중창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사실과 매우 부합되는 것으로 보인다.
각순에 의한 중창은 효종 즉위 2년, 즉 1650년에 시작된다. 각순은 공주목사로 내려온 유곡(楡谷) 이태연(李泰淵)을 통해 청동 2,000지(紙)와 백미 300석을 지원받음으로서 중창공사를 시작한다. 이로부터 효종 10년(1659년)까지 10년 동안 이루어진 중창 공사로 현재 계곡 건너편 북원 영역이 대략 완성되기에 이른다. 이와 함께 토지에 대한 면세를 받게 됨으로서 진상사찰(進上寺刹)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대광보전 안내판
정조 6년(1782년)에 들어와 마곡사는 대법당을 비롯한 1,050여 간이 다 소실되는 화재를 당한다. 이에 제봉 체규를 화주(化主)로 마곡사의 중창이 시작되며, 정조 9년(1785년)에 이르러 대법당을 개건하기 시작해 정조 12년(1788년) 완성하게 된다. 된다. 한편 정조 14년(1790년)에는 체규의 기도로 정순왕후에게서 원자(元子)가 태어난다. 이것을 인연으로 정조 19(1795년)에 마곡사는 태실(胎室)로 봉해지고 도내수사찰(道內首寺刹)의 직인까지 받게 된다. 이로서 마곡사의 중창불사는 한결 수월해지고 사세(寺勢) 역시 일취월장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련의 중창불사를 통해 대광보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들이 중건 또는 개건됨으로서 현존하는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년)이 쓴 대광보전의 현판과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 1725~1799년)이 쓴 심검당의 현판 등은 이렇듯 왕실의 외호(外護) 속에 사세가 확장된 마곡사의 상황을 대변한다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보전내부 현판기
현재 사찰의 모습은 이때의 중건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사찰의 연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몇몇 현판기 등이 있을 뿐 정확한 기록은 없다.
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조선 철종2, 1851년), 源橫 享甫 書
泰華山麻谷寺千佛殿重修文(조선 헌종9, 1843년), 鏡月 快守書
有功不忘記
麻谷寺三國師影堂重建助緣文(조선 철종13, 1862년), 鏡月 抱蓮 書
泰華山麻谷寺國師堂懸板造成記(조선 고종5, 1868년)
泰華山麻谷寺大光寶殿佛糧?懸板序文(조선 고종27, 1890년)
大施主永世不忘記(조선 고종27, 1890년)
公州郡泰華山麻谷寺尋劍堂公寮飜瓦記(1909년)
泰華山麻谷寺天王門重修記(1910년)
朝鮮忠淸南道公州郡麻谷寺獻畓記(1932년)
麻谷寺錦湖和尙獻畓記(불기2952년, 1925년)
천왕문
이러한 기록과 함께 현존하는 건물들을 통해 19세기에는 나한전 중건, 대광부전을 비롯한 해탈문과 홍성루 등의 중수가 있었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천왕문 등을 중수하는 등 많은 건물에 대한 중창과 중수가 행해졌다.
한편 마곡사는 남방화소(南方畵所)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화승(畵僧)을 대대로 배출하였다. 불전에는 화불 대신 뛰어난 산수화가 베풀어져 있으며, 특히 대광보전의 후불벽 뒤편에는 수월백의관음보살도(水月白衣觀音菩薩圖)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많은 화승을 배출한 마곡사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 금호(錦湖)-보응(普應)-일섭(日燮)으로 이어지는 화승의 계보를 지니고 있으며, 최근 우리나라 불화의 거장인 송광사의 석정(石鼎) 스님도 마곡사의 일섭 스님에게 불화를 배웠다고 한다.
대광보전 앞 향나무
마곡사는 구한말 독립운동가였던 김구 선생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참가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인 후 인천형무소에 수감 중 탈옥하였다. 그 후 마곡사에서 승려로 숨어 지냈다고 하며, 대광보전 앞마당에는 김구가 심었다고 하는 향나무가 있다.
〔문화재〕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교(極樂橋)를 사이에 두고 보물 제801호인 대웅전과 보물 제800호인 영산전(靈山殿), 보물 제802호로서 천장의 무늬가 아름다운 대광보전(大光寶殿), 강당으로 사용하는 흥성루(興聖樓), 해탈문·천왕문, 16나한과 2구의 신장을 모신 응진전(應眞殿), 명부전이 있으며, 응진전 맞은편에는 요사채인 심검당(尋劍堂)이 ㄷ자형으로 크게 자리잡고 있다.
또 영산전 옆에는 벽안당(碧眼堂)과 매화당(梅花堂)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염화당(拈花堂)·연화당(蓮華堂)·매화당(梅花堂) 등 승려가 거처하는 요사채가 매우 많다. 이들 건물 중 영산전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대표할만한 것이다. 그 현판은 세조가 김시습(金時習)을 만나기 위해서 이 절에 왔다가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면서 남긴 필적이라 한다.
또 대웅보전은 1651년에 각순이 중수한 것으로, 현판은 김생(金生)의 글씨라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특이한 2층 건물로 조선 중기의 사원건축 양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며, 건물의 기둥을 안고 한바퀴 돌면 6년을 장수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밖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69호로 지정된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1과 보물 제270호로 지정된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6, 보물 제799호로 지정된 마곡사 오층석탑, 보물 제1260호 석가모니괘불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인 마곡사 동제 은입사향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2호인 마곡사 동종 등이 있다.
이 중 오층석탑은 풍마동다보탑(風磨洞多寶塔)이라고도 하는데,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도 하나 라마교 탑과 비슷하여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탑은 임진왜란 때 무너져 탑 안의 보물들이 도난당한 지 오래이나 1972년에 수리할 때 동제 은입사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이 탑은 전 국민의 3일 기근을 막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전설이 있으며, 한국·인도·중국 등 세계에서 3개밖에 없는 귀중한 탑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대광보전 마루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30평 정도의 삿자리가 있다. 이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조선 후기에 이름 없는 앉은뱅이가 이 절을 찾아와서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는 불구를 고치기 위해서 백일기도하는 동안 틈틈이 이 삿자리를 짰다. 이 삿자리는 참나무를 한 끝에서 잇고 또 이어 한 줄로 완성한 것인데, 그는 이 자리를 짜면서 법당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에게 자신의 불구를 낫게 해줄 것을 기도하였다. 백일 뒤 일을 다 끝내고 밖으로 나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법당문을 걸어나갔다고 한다.
지정문화재 목록 및 해설
〔부속암자〕
부속암자로는 심정암(深淨庵)·부용암(芙蓉庵)·북가섭암(北迦葉庵)·토굴암(土窟庵)·백련암(白蓮庵)·영은암(靈隱庵)·대원암(大願庵)·은적암(隱寂庵) 등이 있다. 이 절은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봄 경치가 뛰어나다. 백련암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특히 빼어나며, 북가섭암의 바위 뒤에 있는 천미장군수(天米將軍水)는 뛰어난 약수이다. 또 마곡사 앞 냇가 암벽에는 부여 고란사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고란초가 자생하고 있다.
도로안내
1) 서울
서울 IC → 천안 JCT 톨게이트 -> 천안 논산간 고속도로 진입 -> 정안 톨게이트부터 마곡사 표지판따라서 -> 604번 지방도이용(18km 지점)
2) 대전
대전 유성IC → 32번 국도 타고 공주 도착 (30분 소요)
3) 공주
공주에서 예산(아산)방면으로 32번 국도 이용 직진해서 10km 정도 가다가 사곡면 소재지에서 우회전 마곡사 입구까지 진입가능, 거리는 20km로 30분~1시간 소요됨.
4) 천안 남부지역
광덕사 지나 곡두터널 → 동해리 → 마곡사.
5) 천안
천안에서 공주로 오는 국도 23호선 중 차령고개를 넘어 바로 나타나는 공주시 정안면 소재지(광정)에서 오른쪽 길(604번 지방도)로 들어가는 길.
현지교통 : 공주버스터미널(육교옆 버스승강장)에서 마곡사까지 7번 시내버스 종점하차 (06:10∼20:30, 40분소요)
주변관광지
입 장 료
개인 - 어른 2,000원 / 청소년 1,500원 / 어린이 1,000원
단체 - 어른 1,600원 / 청소년 1,200원 / 어린이 800원
(주차료)
대형 - 4,000원 / 소형 - 2,000원
주차시설
도움전화
대전유성터미널 : 042) 823-2240
공주시외버스터미널 : 041) 858-5114
공주시내버스 : 041) 854-3162
김구선생이 심은 향나무
조사전 영정
대웅전
산책길의 조팝나무
영산전 담장
영산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