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불화,탱화

개운사 開運寺

문성식 2014. 11. 10. 17:51
소재지 : 성북구 안암동 
원문참조 및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사진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0072614.jpg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안암산(安巖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이다.

 

개운사는 일반적으로 1396년(조선 태조 5)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도성 동쪽 5리쯤에 영도사(永導寺)라는 이름으로 절을 창건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 후 1779년(정조 3)에 원빈(元嬪) 홍씨(洪氏)가 세상을 떠나자, 명인원(明仁園)이라는 무덤을 영도사 부근에 조성하였는데 절이 원묘에서 가깝다 하여 북쪽으로 몇 리 쯤 옮겨 짓고 이름도 개운사라 고쳤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사실 뚜렷한 문헌에 전하는 것이 아니고 '사전(寺傳)' 또는 '사기(寺記)'라는 표현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즉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서도 무학대사의 창건과 개운사로의 이건 사실은 '사기(寺記)'에 기록되어 있지만 몇 가지 의심가는 사항이 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특히 '사기'에는 1779년이 아니라 1730년(영조6)에 영도사를 이건하였으며, 영도사 이건을 주도했던 스님이 인파당(仁坡堂) 축홍(竺洪)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인파당 축홍스님은 1870년에 조성된 신중탱과 지장탱에 증명(證明)으로 이름이 올라 있어 혼동이 따른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범해각안(梵海覺岸) 스님이 편찬한 『동사열전(東師列傳)』「벽담선백(碧潭禪伯)」조에 실려 있는 내용을 보면 개운사로 절 이름이 바뀐 시기를 추정하는데 참고 가 되고 있다.

 

“이 무렵 이재황(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의 이름) 소년은 한양 영도사의 벽담당(碧潭堂) 도문(道文) 스님 처소에서 주로 양육되고 있었다. 소년은 언젠가 영도사에 가서 노닐다가 절의 벽 한 모퉁이에 이름을 써놓았는데, 뒷날 왕위에 오른 다음 영도사라는 절 이름을 바꾸어 개운사로 고쳤다. 이는 임금의 친필 글씨인데다 벽담스님을 존숭하는 뜻에서 취한 조치이다.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이다.”

 

이 내용은 영도사에서 개운사로 이름이 바뀐 계기가 고종의 소년시절에 마련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고종의 즉위 이후, 즉 1863년 이후 언젠가 개운사로 사찰 이름을 바꾸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동사열전』의 내용과 「봉은본말사지」에서 언급한 '사기'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두 내용 가운데 어떤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세기 중후반의 개칭 사실을 전하고 있는 『동사열전』의 내용이 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추측이 된다.

 

아무튼 여러 내용을 정리해 보면 개운사의 전신이 영도사였으며, 언제인가 개운사로 절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창건과 개운사로의 개칭에 관계된 역사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전반까지의 역사 또한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

 

다만 19세기 후반부터 1941년까지의 연혁은 「봉은본말사지」에 비교적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70년(고종 7)에는 화주 송담당(松潭堂) 수훈(守訓)이 지장탱과 시왕탱, 사자탱 등을 조성하여 봉안하였고, 1873년(고종10)에는 명부전을 중건하였다. 또한 1880년(고종 17)에는 이벽송(李碧松)대사가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883년(고종 20)에는 화주 초은선일(蕉隱善一)과 초암기주(草庵基珠)가 불상 2좌를 개금하고 1좌를 개분, 1좌를 개채하였고, 아울러 영산전의 후불탱, 팔상탱, 감로탱, 신중탱, 칠성탱, 원불탱 각 1점과 산신탱 2점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1885년(고종 22)에는 덕해(德海)화상이 아산으로부터 1712년에 제작된 범종 1구를 가져왔으나, 1935년 일제에 의해 국방헌납용으로 강탈당했다.

 

1912년에는 일제의 사찰령 시행에 따라 봉은사의 수반말사로 지정되면서 김현암(金玄庵)스님이 사찰령 시행 후 제1대주지로 부임하였다. 1913년에는 제2대 주지 이벽봉(李碧峰)스님이 이왕가(李王家)에 진정하여 왕가소유 산림 4정 6반보를 사찰소유로 넘겨받았다. 1915년에는 주지 안월송(安月松)스님이 대웅전 및 요사의 개금불사를 하였다. 1921년에는 제5대 주지 이벽봉 스님이 큰 방을 중창하고 같은 해에 종각을 세웠으며, 1922년에는 안월송 스님이 시왕전의 각 상들을 개금하고 개분불사를 하였다. 1926년에는 김동봉(金東峰)이 강원을 설립하였으며, 1929년에는 권범운(權梵雲)·신영산(申靈山)이 독성전을 중건하였다. 1930년에는 아미타후불탱, 제석탱, 독성탱을 조성하여 봉안하였으며, 1932년 이벽봉(李碧峰)이 노전을 짓고, 1935년에는 권범운이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이후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연혁이 제대로 전하지 않으며,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 다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다.

즉 1978년에는 당시 조계종 종정이던 이서옹(李西翁)스님을 불신임하는 재야 측에서 종정에 채벽암(蔡碧巖)스님, 총무원장에 윤월하(尹月下) 스님을 각각 추대하고 이곳에 임시 총무원을 개원하였다. 1981년에는 중앙승가대학이 경내의 개운회관을 인수하면서 교사를 이전해 왔고, 1992년에는 중앙승가대학의 학사인 정진관을 완공하였다.

1993년에는 중앙승가대학의 운동장 확보를 위해 지금의 위치에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였으며, 이후 차례로 사역을 뒤로 넓혀 개운사가 지금의 모습이 되게 하였다.


현재 경내에는 1981년 이전해온 승려들의 교육기관인 중앙승가대학(中央僧伽大學)을 비롯하여, 대웅전·지장전(地藏殿)·칠성전·독성각(獨聖閣)·종각·선방(禪房)·자비관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선방은 서울근교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대각루(大覺樓)라는 명필 현판이 걸려 있다.

 

산내 암자로는 동쪽 200m 지점에 대원암(大圓庵)과 칠성암이 있다. 1845년(헌종 11) 우기(祐祈)가 창건한 대원암은 근대의 고승인 박한영(朴漢永)이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불교계 석학들을 배출하였고, 1970년대에는 선사 탄허(呑虛)가 주석하면서 역경사업에 종사한 곳이기도 하다.

 

〔교통정보〕

①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지하철 6호선 안암역에서 개운사 방향 출구로 나와 150m 정도 가면 개운사에 닿는다.

②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동대문에서 왕산로를 따라 청량리 쪽으로 가다가 동묘앞4거리에서 좌회전한다. 동망봉 터널을 지나 계속 직진하면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이 나오고 바로 다음이 안암역4거리이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150m 정도 가면 개운사에 닿는다.

또는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서 보문동을 거쳐 보문역에서 좌회전하여 계속 직진하면 안암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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