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논산시 연산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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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문화재청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천호산(天護山)에 있는 절.
연 혁
대한불교법상종에 속한다.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한 기념으로 창건하였다. 태조는 후백제의 신검(神劍)을 쫓아 황산(黃山) 숫고개를 넘어가서 마성에 진을 친 뒤 신검에게 항복받고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이것을 하늘의 도움이라 하여 황산을 천호산이라 바꾸고 절을 창건하여 개태사라 하였다.
창건할 때 이 절의 사치스러움은 극에 달하였고, 태조는 12월에 낙성법회(落成法會)를 베풀고 친히 소문(疏文)을 지었다.
그 뒤 태조의 영전(影殿)이 설치되어 기일마다 제사를 지냈으며, 태조의 옷 한 벌과 옥대 1요(腰)를 보관하였다. 국가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마다 충신들이 모여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호국도량이 되었다.
국가에 중대한 일이 있으면 태조의 영전에 나아가 길흉을 점쳤는데, 1362년(공민왕 11) 공민왕이 이인복(李仁復)에게 강화도 천도 여부를 점치게 하였더니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왔으므로 천도를 중지하였고, 이듬해에 이인복을 다시 보내어 천도 여부를 점치게 하였더니 길하다고 하였다.
전성기에는 전국의 사찰을 통괄하기도 하였다. 특히 승통 수기대사가 개태사의 주지로 주석할 당시에는 고종의 명에 의해 팔만대장경을 교정하는 불사를 수행하면서 고려국 신조대장 교정별록 30권을 저술하고 이를 대장경에 편입시켜 현재 해인사 장경각에 경판으로 보존되고 있다.그러나 고려 말 우왕 무렵에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약탈 방화되어 폐사되었다. 이후 넓은 절터는 농경지로 변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 초기부터 퇴락하기 시작하였으며, 1428년(세종 10) 이 절이 연산현(連山縣) 내에 있는 것이 옳지 못하므로 풍년을 기다린다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진언이 있어 세종이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하였다.
1432년 이 절의 승려가 큰 수정석(水晶石) 2과(顆)를 세종에게 헌상하였고, 세종의 불교진흥책으로 중흥의 기틀을 보였으나 그 뒤 폐허가 되었다.
절터에 삼존석불입상과 석탑·부도·공양보살상이 흩어져 있었으며, 1930년에 김광영(金光營)이 중건하여 도광사(道光寺)라 하였다가, 그 뒤 다시 개태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
이 가운데 철확은 절에서 쓰던 큰 솥으로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이며, 절의 전성시에 장(醬)을 끓이는 그릇으로 사용하였다.
이 철확에는 많은 영이담이 전해지고 있다. 가뭄 때 사람들이 이를 끌어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온다고 하여 여러 곳을 옮겨 다녔으며, 1944년에 고철로 쓰려고 부수려 하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쳐서 파괴를 모면하였다고 한다. 이 절에서 개판된 불경으로는 1218년(고종 5) 간행된 ≪범서총지집 梵書摠持集≫이 있다.
개태사 창건 설화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공격함에 태조 왕건이 군사를내어 신라를 구원하고, 또한 고려 태조19년(936)에 후백제를 쳐서 30여 고을을 얻고 또 같은 때에 발해의 유민이 귀순하였으며 삼국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태조는 개태사를 창건하고 친히 원문을 손수 지었는데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국 하기까지에는 부처님의 은혜와 산신령이 도와 주신 은덕이 크므로 이에 보답하기 위하여 해당관원에게 명하여 국찰로 창건하고 산 이름을 천호산, 절 이름은 개태사라 하였다.
그뒤 고려의 국운이 기우려져 가던 1370여년경 왜적이 연산현에 침입하여 개태사에 대한 약탈행위가 있었고, 그뒤 창왕시대에도 왜구의 침입을 받아 사운이 기울어지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개태사 철확 관련 일화
고려의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우고, 개국사찰로 창건한 개태사 주방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승려의 식사에 쓰이던 국을 끌이던 대형 철재 솥이다. 솥의 그 크기가 개태사의 옛 규모를 짐작할수 있게 한다.
개태사가 폐허가 되고, 방치되어 있었는데 고종 24년(1887) 대홍수로 2km정도 하류로 떠내려와 있던 것을 일제시대에 경성박람회에 출품했다가 다시 돌아와 연산공원에 있던 것을 1981년 개태사로 옮겨 개태사 경내에 보관하고 있다.
형태는 테두리가 없는 벙거지를 제쳐놓은 듯한 모양이며, 23cm 높이의 곧바로 선 테와 그 아래로 20cm 정도가 경사면을 이루다가 다시 급경사를 이루면서 둥근 바닥을 이루고 있고, 두께는 3cm내외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중 일제가 무기제작용 철을 수집하기 위하여 철확을 부수던 중 천둥, 번개가 일고 세찬 소나기가 내리면서 날이 갑자기 어두워지므로 모두 무서워 도망쳤다고 하는데 그때 파손된 부분이 테두리에 남아있다.
교통 안내
1)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기차 : 호남선 두계역 하차 후 도보로 약 10분
버스 : 대전에서 양정-논산행 버스 → 개태사역 하차 → 도보 약 5분
2)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계룡 인터체인지 → 1번국도 논산(연산) 방면 → 개태사
호남고속도로 서대전 인터체인지 → 1번국도 논산(연산) 방면 → 개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