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영적습관 52 - 루이스 폴라우 ㅡ6ㅡ

문성식 2011. 10. 15. 21:46

 

 

 

영적습관 52 - 루이스 폴라우

 

 

■ 제2부 순례자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움

 

 

습관 17 바른 시각을 유지함


한 잔의 커피에는 사방의 이웃집을 40㎝의 두께로 감싸고도 남을 수분이 들어 있다는 걸 아십니까?
어떻게 그렇게 소량의 물이 얇게 퍼지면 시야를 온통 가릴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잔뜩 낀 안개가 순례의 길을 가로막으면 곧잘 당황하면서도, 태양이 아직 위에서 비치면서 안개를 말리고 있다는 사실은 잊습니다. 왜 당황할까요? 바른 시각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걱정하는 것 가운데 45%는 과거의 것이고 55%는 미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30%는 오로지 건강에 관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 가운데 1/10만 실현될 것이지만, 우리가 손 쓸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마 6:34)하고 말씀하신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빌 4:6)라고 말합니다. 걱정은 상황에 대한 바른 시각을 잃어버릴 때 생깁니다.
그러나 하늘에는 돌발 사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잘 알고 계십니다(출 3:7; 벧전 5:7).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지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지으셨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서 극적인 방법으로 자기에 대한 관심을 역력히 드러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1. 히스기야는 자기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했습니다(37:1).
2.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문제에 관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알려고 애썼습니다 (37:2-7).
3. 자기 시각을 왜곡시킬 어떤 일도 허용치 않았습니다.
4.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경배했고 다음에는 필요한 것을 구햇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햇습니다(37:14-20).


어려움이나 시련을 만나면 이런 단계에 따라 행동해 보십시오.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된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습관 18 죽음을 대면함


우리가 대할 시련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입니다. 죽음이 가정에 닥치면 현실을 냉철하게 보기 힘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친척이나 친구가 죽을 때 우리는 신자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내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때 갑자기 침대에 앉으시더니 천국에 관한 찬송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베게를 베고 단정히 누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예수님과 함께 있으러 간다. 그게 훨씬 더 좋아.”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9년 전에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셨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영광으로 가실 때 나이 서른여섯살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열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황폐한 심정을 느꼈습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뒤죽박죽 된 듯했습니다. 모든 것 모든 사람에게 화가 났습니다. 이건 공정치 않아. 왜 우리 아버지가 다른 아버지들처럼 노년에 돌아가실 수 없었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아버지 장례식 때 선교사 한 분이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나는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다는 분명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사별하면 슬픔이 일어나는 건 아주 정상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신자들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만, 소망 없는 자들처럼 슬퍼하지는 않습니다(살전4:13).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닌 줄을 알고서 소망을 가지고 죽음을 대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땅에서 하늘로 통하는 문을 여는 것일 뿐입니다.

습관19 죽음의 문을 넘어


유명한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죽음의 현실 앞에서 늘 괴로워했습니다. 지식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헤밍웨이가 청년이었을 때 자살을 했습니다. 그뒤로 헤밍웨이는 온 인류에게 자기가 삶도 죽음도 다 두려워하지 않음을 과시하고 싶어했습니다. 묘하게도 그는 예순한살의 나이에 분노와 무력감 속에서 자살했습니다.
성경은 육체적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히9:27은 “한번 죽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종국에는 병에 걸립니다. 우리 생시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순례는 죽음으로 끝날 것입니다.
성경은 육체적 죽음(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맞이하는)과 영적 죽음(모든 사람이 날 때부터 경험하는)을 구분합니다.
성경은 영원한 죽음 또는 ‘둘째 사망’(계20:14)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단절되는 것입니다. 생시에 자기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이 영원한 죽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육체적 죽음은 분명히 존재의 종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여러분과 내가 어디서 영원이란 세월을 보내느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불신자 프랑스와 볼테르는 한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20세기에는 기독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열두 사도가 세운 이 건물을 나는 한 손으로 무너뜨릴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죽음 앞에 섰을 때는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다”하고 외쳤습니다. 볼테르의 주치의는 그가 영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서상의 격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서 크게 놀랐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는다는 생각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린다면, 죽음의 문 저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찬란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