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영적습관 52 - 루이스 폴라우 ㅡ5ㅡ

문성식 2011. 10. 15. 21:43

 

영적습관 52 - 루이스 폴라우

 

 

■ 제2부 순례자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움

 

 

습관 14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구함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암기하고 묵상할 때 어느 부분이 가장 믿기 어려웠습니까?
예언 부분입니까? 이야기 부분입니까? 교리부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들입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점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근사하게 들리고 때로는 용기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사실인가 하고 의문을 품습니다.
무디(D . L . Moody)는 “하나님은 너무 신실하셔서 사실일 수 없는 약속은 하신 적 이 없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그 점을 생각합시다!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무위로 그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권위 있는 말씀을 통틀어 여러 번 태도를 분명히 밝히시면서 우리 이 세상을 지나가는 하나님의 순례자들에게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벧후: 1:4)을 주셨습니다.


많은 구약의 약속들은 감사하게도 신약에도 반복되어 있고, 오늘날 우리의 것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배움으로써(공부와 암기를 통해서). 그 약속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를 봄으로써(묵상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우리의 생활에서 실현하실 시간을 드림으로써(적용을 통해서) 그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보증하시고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요 14:13, 14; 고후 1:20).


습관 15 상처를 받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구함


여러 해 전 대서양 북아메리카 해안 근처에서 잠수함 한 척이 모든 승무원과 함께 침몰했습니다.잠수함이 완전히 가라앉자 잠수함의 파손정도와 인양 가능성을 살피러 수중 탐사대원들이 투입되었습니다.
침몰한 잠수함에 다가간 탐사대원들은 잠수함 안에서 모스 부호로 쿵쾅거리며 보내는 신호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잠수함 안에 생존자가 있는게 분명했습니다. 포착한 메시지는 수중 무덤 벽을 치며 “희망이 있는가? 희망이 있는가?”하고 묻는 광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과 나도 어떤 문제나 비극이 우리를 강타할 때 그와 같은 질문에 빠집니다.
우리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옴짝달싹 못하고 잠겨 있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듭니다. “희망이 있는가? 정말로 이 문제를 극복할 희망이 있는가?”
사도바울은 유명한 로마서를 쓰기 전에 여러번 했던 그 약속을 주장했습니다.


이 세상을 지나가는 하나님의 순례자의 한사람으로서, 그는 고생하고 박해를 당하고 무관심을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고독하고 돌팔매질을 당하고 매를 맞고 파선을 당하고 헐벗고 긂주리고 잠을 못자고 막중한 압박을 당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그런 시련을 견디게 했습니까? 무엇으로든 우리를 유지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그가 철저히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 있습니까? 다시 한 번 여러분을 주께 의뢰하십시오. 그런 다음 빌립보서 4:6,7 말씀을 되새겨 보십시오. “아무것도 염려하지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라.”
인생의 폭풍이 사방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완전한 평강을 경험하기 바라십니다.

습관 16 하나님이 왜 고난을 허용하시는지를 이해함


파리 출신 철학자는 “하나님은 죽었다. 마르크스는 죽었다. 그리고 나는 심기가 편치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태도는 오늘날 우리 문화에 만연한 비관주의를 잘 보여 줍니다.
정말로 신이 있다면 왜 세상의 숱한 고통을 그대로 허용하는가? 사람들은 궁금해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도 그런 질문을 가지고 씨름합니다.
기본적으로 고통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유형은 지진이나 태풍 같은 자연 재난의 결과로 오는 고통입니다.
이런 재난에서 오는 고통은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발생합니다(마 5:45).

 

고통의 둘째 유형은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르는 비인도적인 행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전쟁을 이런 고통의 유형에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의 탐욕과 교만 때문에 사람들은 남을 해치려고 합니다(약 4:1,2).

 

고통의 셋째 유형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욥의 생애에서 가장 잘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사단이 그를 공격한 결과로 왔습니다. 사단은 하나님께 허락을 받은 뒤 욥과 그의 가정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일으켰습니다.

 

고통의 넷째 유형은 우리의 잘못으로 오는 고통입니다.
예를 들면, 사무실 옥상에서 발을 헛디뎌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삐었다면, 하나님의 중력의 법칙을 어겼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덕 법칙을 어길 때도 당합니다.
많은 고통은 그 원인을 우리가 내리는 악한 선택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몇몇 고통은 하나님이 죄를 벌하시기 위해서 허용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사람에게 자기 행위의 보응을 받으며 살도록 하십니다(갈 6:7,8).


고통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즉 적극적으로 맞이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우리는 기독교 순례자가 되기도 하고 세상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상화은 인격 형성을 돕기보다 인격을 들춰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시련에 적절히 대처하면 인내심을 기르고 인격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습니다(롬 5:3,4).


비관과 고통이 만연한 시대에 우리는 시편 저자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내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시 118:6). 친히 큰 고난을 당하신 주께서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