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삼위일체란 무엇을 말하는가?6.-B

문성식 2011. 9. 13. 17:36

 

 

삼위일체란 무엇을 말하는가?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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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강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

 

우리가 분명히 해야할 것은 성경의 약속과 체험과의 관계이다.

성경이 약속하는 것과 체험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에 따라 중대한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성경이 약속한 것 중의 몇 가지 체험 때문에 그것만을 가지고

나머지 성경이 약속한 것들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체험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것중

체험을 통해 어느 부분을 이해케 함으로써 나머지 부분들은

체험치 않고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 대표적 사건을 보자.

 

요한복음 20장에 도마가 부활의 현장에 있지 않음으로 의심하는 자가 되었다.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셨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제안하신 것들을 모두 체험할 수 없으므로

일부의 체험이나 간접 경험을 통해서라도 믿는 자들은 복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비약도 잘못을 가져올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위하여

그것이 없애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병이 낫지를 않았다.

무슨 말인가? 전자가 체험 몇개를 가지고, 그 체험이 약속을 어떻게 견고케 하며,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증거로 삼아야 하는데,

그것이 전부가 되어 약속한 것을 모두 버렸다면

후자는 체험한 것 이하로 수준을 낮추는 것이다.

 

기독교는 쉽게 나의 이익이나 위해서 무엇을 해달라고 해주는 것이 아니다 하며

분명히 기독교가 갖는 초월성과 기적들을 배제해 버리는 잘못된 견해가 있다.

전자가 광신주의적 오류라면 후자는 이성주의의 오류가 된다.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는다라는 말이 갖는 엄청난 내용을 상고해 보아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와 동행하시며,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이가 우리편이며,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시고 파도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는 이가 나의 편이라는 말이 갖는

그 엄청난 내용들을 늘 자기에게 새삼스럽게 확인하여야 한다.

 

성경에는 뜻밖에도 성령의 부어 주심에 대한 부작용에 대하여 훨씬 많은 지적을 하고 있다.

성령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보다, 받은 성령 세례로 말미암는 그 넘쳐나는 생명력이

잘못 사용되고 있고, 돌하고 있고, 시행되지 못하는데 대한 지적이 훨씬 더 많다.

특별히 고린도전.후서를 보면 많은 은사들이 그들에게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잘못 사용하였을 때 날카롭게 꾸중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이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사람이다.

그는 주와 함께 죽을 것을 장담했다.

그러나 그는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원함은 있으나 능력은 없다 는 사실이다.

오늘날 신자들이 겪는 가장 큰 아픔은 원함은 있으나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리가 이 부분에 대하여 얼마나 방황하며 또한 말라 있는지 모른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 하여 모인 곳에 나타나신다.

도마는 예수님을 만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21장에서 보면 그들은 갈릴리 바닷가 어부로 되돌아 갔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는 하루에 설교로 5,000명을 회개시킨 사람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도 여전히 겁장이로 머물러 있던 베드로를

무엇이 그렇게 능력있고 용감한 주님의 제자로 바꾸어 놓았는가? 결코 부활은아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요14:18)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그가 우리와 함께 하여 모든 것을 지키게 하실 것이다.

진심과 열심은 있으나 지킬 수 없었던 베드로에게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이제 그 진심과 열심을 행할 수가 있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이전에도 제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었고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있는 주의 자녀들인 것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성령의 부어 주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앞에 겸손히 무릎꿇는 자세를 취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본 몇가지 부작용 때문에 하

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얼마나 섣부른 판단을 하였는가?

성경에 기록된 신자들의 삶에는 분명한 힘이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간섭이 있었다.

우리의 맥빠진, 힘없는 신앙생활과는 판이하게 다른 기쁨과 충만한 자신감이 있었다.

우리는 그렇지를 못하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며

성경의 지적 앞에 우리의 위치와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