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꽃 모음

그 아름답다는 양귀비 꽃 |

문성식 2010. 9. 4. 18:40

              그 아름답다는 양귀비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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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양귀비

 

 

                         역사속의 진짜 양귀비

 

양귀비 [시아버지 당 현종을 홀린 경국지색]
양귀비(楊貴妃)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미인 중의 한 사람이다. 양귀비는 당(唐)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의 총애를 받았던 비로 원래 이름은 옥환(玉環), 도호(道號)가 태진(太眞)이다. 포주(蒲州) 영락(永樂: 지금의 산서성 영제<永濟>) 출신으로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양립(楊立)의 집에서 자랐다. 가무(歌舞)와 음률에 뛰어났으며, 총명하면서도 용모가 천하절색이었다. 양귀비는 중국의 대시인 이백(李白)과 백거이(白居易) 등이 그 아름다움을 노래할 정도로 유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민간 희곡 속에서도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그녀의 명성은 가히 세계적이어서 중국은 물론 우리 나라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과 무혜비(武惠妃)의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로 궁궐에 들어갔다. 당시 양귀비는 17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현종이 우연히 자기의 며느리인 양귀비의 어여쁜 자태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 버렸던 것이다. 그날 이후부터 현종은 양귀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아무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현종은 자신의 측신이자 당대 최대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高力士)를 불러 이 일을 의논하였다.
결국 고력사는 양귀비의 두 몸종을 매수하여 그녀들에게 양귀비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였다. 양귀비의 몸종들은 매일같이 양귀비를 설득하였으며, 양귀비도 본래 수왕(壽王)에 대한 사랑보다는 부귀영화에 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수왕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수왕을 떠난 양귀비는 우선 화산(華山)으로 가서 여도사(女道士) 생활을 하다가 다시 현종의 궁으로 들어왔다. 양태진(楊太眞)이란 이름은 바로 양귀비가 여도사 생활을 할 때 얻은 호이다. 이때 현종은 아들 수왕에게는 다소 미안했든지 위씨(韋氏) 성을 가진 여인을 아내로 삼도록 배려하였다.
<목욕하러 가는 양귀비>
현종은 자기의 품으로 돌아온 양귀비를 위해 궁궐을 하나 마련해주고 그것을 태진궁(太眞宮)이라 하였으니, 그로부터 이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양귀비는 공식으로 황후 책봉을 받은 적은 없으나, 천보(天寶) 4년(745)에 '귀비(貴妃)'에 책봉된 이후 이미 고인이 되고 없는 황후의 위치를 대신하다시피 하였다. 양귀비는 섹스에 상당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먼저 사촌 오빠 양국충(楊國忠)으로부터 섹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여, 수왕(壽王)에게서 기초를 닦고, 현종을 만남으로써 기교상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구름같은 머리, 꽃다운 얼굴, 황금 비녀,
연꽃 휘장속에서 지새운 따사로운 봄밤.
봄밤이 너무 짧아 해가 높이 솟았구나.
이때부터 황제는 조회에도 안 나오네.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고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는 밤에 현종은 양귀비의 처소로 가서 낮게 드리운 비단 휘장 안에서 양귀비와 밤새워 사랑을 나누고 백년해로를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양귀비에 대한 현종의 총애는 극도에 달했던 것이다.
후궁에 미인들은 3천이나 되었지만,
3천명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네.
황금 궁전에서 화장 마치고 기다리는 밤,
백옥 누각에서 잔치 끝나면 피어나는 봄.
언니들과 오빠들도 모두 제후의 서열,
집안에도 찬란하게 서광이 비치구나.
마침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아들보다 딸 낳기를 더 소망했다네.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양귀비가 '귀비(貴妃)'에 책봉된 이후로 그녀의 죽은 부친은 대위제국공(大尉齊國公)에 추서되고, 숙부는 광록경(光祿卿)에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큰오빠는 홍로경(鴻로卿), 작은오빠는 시어사(侍御史), 남동생은 사공(司公)에 임명되었으며, 큰언니 옥패(玉佩)는 한국부인(韓國夫人), 셋째언니 옥쟁(玉箏)은 괵국부인(國夫人), 여덟째언니 옥차(玉釵)는 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현종의 극진한 총애로 단숨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양귀비의 형제자매들은 그 세력이 강대해져 궁궐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막강 권세를 과시하며 많은 사람들을 농락했다. 특히 그녀의 셋째 언니 괵국부인의 집에는 전국 각지에서 청탁을 하러 찾아오는 관리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그들이 바치는 진상품들로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한번은 괵국부인이 궁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주와 부마의 행열과 마주쳤는데, 서로 길을 양보하지 않다가 큰 싸움이 일어나고 말았다. 마침내 이 사실을 알게 된 현종은 평소 공주에게 주었던 물건들을 모두 빼앗고 부마의 관직마저 박탈하였다. 궁궐 내에서 그들의 위치가 공주나 부마보다도 위에 있었던 것이다.
양귀비의 언니들도 비록 양귀비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모두 뛰어난 미색을 갖춘 여인들이었다. 어느날 현종은 괵국부인과 눈이 맞아 양귀비를 배신하고 그녀와도 정사를 벌였다.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양귀비의 마음 속에는 질투의 불길이 솟아올랐으며, 그래서 현종이 또다시 양귀비에게 괵국부인을 입궐시키라고 하자 그녀는 현종의 명을 거역하였던 것이다. 급기야는 이 일로 현종과 대판 싸움을 벌이게 되고, 크게 노한 현종은 고력사(高力士)에게 명하여 양귀비를 양국충의 집으로 쫓아보내게 했다.
당시에 승상이었던 양국충은 양씨(楊氏) 집안에서 양귀비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아주 음흉한 성격의 소유자인 양국충은 젊은 시절에는 고향 영락(永樂)에서 술과 노름으로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 후에 군에 입대하여 전쟁에서는 용맹을 떨쳤지만, 평소에는 늘 사람들을 괴롭히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결국 직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났다.
그 뒤 다시 선우중통(鮮于仲通)의 집에서 집안일을 관리하면서 하인들의 돈을 가로채 양귀비의 집으로 도망쳤다. 그때 양국충은 지금의 괵국부인인 양옥쟁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던 사이었다. 따라서 괵국부인으로 인해 시끄러워진 이번 일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승상 양국충이었던 것이다.
양씨 일문의 운명이 양귀비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국충은 고력사와 합심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화해시키기로 하고, 현종과 양귀비를 화청지(華淸池)로 보냈다. 화청지의 물속에서 반쯤 드러난 양귀비의 아름다운 육체를 본 67세의 현종은 결국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26세의 양귀비를 품에 안음으로써 그간의 번뇌를 단번에 씻을 수 있었다. 다음 장에 실려 있는 양귀비의 입욕 조각상을 보면 바로 이때의 양귀비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두 간신의 노력으로 다시금 양귀비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된 현종은 양귀비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였다. 양귀비의 품속에서 환락에 빠져 유희와 쾌락에 정신을 잃은 현종에게서 더이상 지난날 성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현종은 전기에는 두 명의 명재상 요숭(姚崇)과 송폭(宋爆)의 보좌로 '개원성세(開元盛世)'를 이루어냈지만, 후기에는 두 명의 간신 이림보(李林甫)와 양국충의 전횡으로 '천보대란(天寶大亂)'을 맞이하였다. '천보대란'이란 바로 당나라를 쇠망의 길로 이끌고 양귀비를 죽음의 길로 데려간 '안록산의 난'을 말한다.
영주(營州) 유역(柳域)의 호인(胡人) 출신인 안록산은 처음에는 변방의 일개 군졸에 불과했으나, 후에는 세 지역을 다스리는 절도사로 승승장구하면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다. 안록산이 이렇게 세력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양귀비 때문이었다.
천보 6년(747) 정월 현종은 변방의 절도사 안록산을 환영하는 연회를 흥경궁(興慶宮)에서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안록산과 양귀비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후 안록산은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안록산을 양귀비는 수양아들로 삼았다. 안록산은 양귀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아양을 다 떨었고, 양귀비는그러한 안록산의 우람한 몸집을, 특히 그의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좋아했다고 한다. 안록산은 현종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자주 입궐하여 양귀비를 만났으며, 양귀비는 그를 화청지로 데려가 목욕을 시켜주곤 했다. 심지어 목욕이 끝난 다음에는 오색천으로 요람을 만들어 안록산을 어린애처럼 굴게 하고 그를 요람에 눕히기도 하였다. 수십명의 궁녀가 요람을 흔들어 양귀비 앞에 올 때 마다 안록산은 그녀를 "엄마" 하고 불렀다. 40대 후반의 아들을 둔 20대의 젊은 엄마, 그들은 아마도 변태적인 사랑을 좋아했던 것 같다. 한번은 안록산이 양귀비를 품에 안고 그녀의 신체 중 가장 부드러운 부위를 힘껏 비비자 뜻밖에 그녀의 젖가슴에 상처가 나게 되었다. 결국 현종에게 들통이 나지 않기 위해서는 붉은 비단 천으로 가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중국어로는 "허즈(诃子)" 또는 "뚜떠우(肚兜)"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브래지어의 시초'라고 한다.
원래 양국충은 안록산과 연합하여 이림보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림보가 먼저 죽자 그들 사이에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양귀비를 등에 업고 점점 그 세력을 확대해 가는 안록산에게 위협을 느낀 양국충은 현종 앞에서 자주 안록산을 비방하기 시작하였다. 양귀비는 자기 애인을 비방하는 양국충의 말을 그대로 안록산에게 전하게 되었고, 그후 안록산은 양국충에게 반감을 가지고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현종은 안록산이 반역을 꾀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마다 양귀비가 안록산을 변호해 주어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양귀비는 조정의 일마저도 마음대로 주물렀던 것이다.
어양(魚陽)의 북소리 천지를 뒤흔들어,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깨뜨려 버렸다.
구중궁궐에 불길이 솟아 오르고,
수천만의 수레는 서남으로 피난갔다. (백거이의 <장한가 > 중에서)
755년 마침내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의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長安)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현종은 깜짝 놀라 가랑비 내리는 한여름 새벽에 승상 위견소(韋見素), 양국충, 양귀비 자매와 소수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장안성 연추문(延秋門)을 벗어나 서쪽으로 방향을 잡은 일행은 마외파(馬嵬坡, 지금의 섬서성 흥평<興平>)에 이르렀으나, 병사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현종에게 양국충과 양귀비를 비롯한 양씨 일족들을 모두 죽이기를 강요했다. 결국 양국충과 일족들의 목이 잘리고 시신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양귀비도 어쩔 수 없이 마외역관 앞의 배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하였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
비취 깃발 흔들흔들 가다가 서다가,
서쪽으로 성문을 나서기 백리 남짓,
육군(六軍)이 꿈쩍 않아 어쩌지도 못하고,
어여쁜 여인은 말 앞에서 죽어갔네!
꽃 비녀 떨어져도 집는 사람 하나 없고,
비취 깃털, 공작 비녀, 옥비녀도 버려졌네.
황제는 얼굴 가린채 구해주지 못하고,
돌아보는 얼굴엔 피눈물만 흘렀네.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양귀비의 묘> - 섬서성 흥평현 마외파
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후 당현종은 태상황(太上皇)이 되었고, 그의 아들 숙종(肅宗)이 난을 평정하면서 황제라 칭하였다. 현종은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도 죽은 양귀비를 잊지 못하고 얼마나 그리워하였는지 모른다.
저녁이면 날아드는 반딧불에 그리움은 더해지고,
외로운 등잔불을 돋우느라 잠 못이루네.
서서히 울리는 종소리에 밤은 더욱 길어져,
반짝이는 은하수에 동이 트려 하는구나.
싸늘한 원앙 기와 서리꽃 피어나니,
차가운 비취 이불 뉘와 함께 같이할까?
아득히 사별하여 해가 다시 지나가도,
영혼은 꿈속으로 찾아오지 아니하네.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그리고는 당대의 대시인 백거이는 <장한가(長恨歌)>에서 마지막으로 그들의 비극을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장구한 천지도 끊일 날이 있겠지만, 이들의 한은 끊일 날이 없으리라."
양귀비의 죽음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일설에 의하면 안록산의 난 때 양귀비가 죽지 않고 일본 상인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는 양귀비에 관한 이갸기와 함께 그녀의 유물과 사당, 무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양귀비가 3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30년간을 활동하다가 68세에 죽었다는 것이다.
흔히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수화'(羞花: 꽃이 부끄러워 한다)라는 말을 쓴다.
하루는(아직 현종을 만나기 이전) 양귀비가 정원에서 꽃구경을 하다가 무성하게 꽃이 핀 모란과 월계화 등을 보고 덧없이 지나가는 청춘을 아쉬워하였다. 그래서 "꽃아! 꽃아! 너는 해마다 다시 피어나지만 나는 언제나 빛을 보겠느냐?"라는 한탄과 함께 눈물을 흘리하면서 그 꽃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갑자기 꽃받침이 오그라들고 꽃잎이 말려들어갔다. 그녀가 만진 꽃은 바로 함수초(含羞草)였던 것이다. 이때 한 궁녀가 그러한 광경을 보았다. 그후 그 궁녀는 가는 곳마다 "양귀비가 꽃과 아름다움을 견주었는데 꽃들이 모두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고 소문을 내었으며, 여기에서 "수화(羞花)"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출처 :미녹시기 원문보기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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