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그 후7] 에피소드
사제의 길로 이끌어주신 어머니께 감사
인생을 돌이켜보면 사람들 앞에 내세울 만한 게 별로 없다. 그런데도 평화신문 독자들에게 이 지면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행여나 내 자랑이나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다.
내 구술을 받아 정리하는 김 바오로 기자가 "오늘은 아주 쉬운 질문만 할테니 지체없이 즉답을 해주면 좋겠다"면서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어떤 면을 찾아내려고 하는 건지 질문 내용이 하나 같이 쉬운 듯 하면서도 까다롭다.
-늙으면 섭섭한 게 많다고 하는데?
"노인네가 노여움 탄다는 말이 있다. 자식들 뜻은 그런 게 아닌데 그들 언행에 섭섭함을 느끼는 일종의 소외감이다. 나는 청력이 떨어져 보청기를 껴도 말이 잘 안 들릴 때가 있다. 이를테면 나를 찾아온 손님들이 자기들끼리 뭔가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웃는데 난 영문을 몰라 소외감(?)을 느끼곤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연세 많은 분들이 자주 '내가 어서 죽어야지'라고 말하는데 그게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런 거짓말한 적 있나?
"매일 한다.(웃음) 나이가 85살이다. 내일 죽는다고 해서 빨리 죽었다고 얘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은 사람들이 '건강하게'라는 말은 빼고 '오래 사십시오'라고 인사하는데, 장수(長壽)가 육체적으로 얼마나 고달픈 지 모르고 하는 인사 같다. 요즘은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 심정이다."
-살아오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은?
"신부가 된 것이다.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신학교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신부 외에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은?
"결혼해서 처자식과 오순도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골 오두막집, 얼마나 정겨운 풍경인가."
-사제직 외에 동경한 것은?
"코흘리개 시절 꿈은 읍내에 점포를 차려 돈을 버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사를 하지 않길 잘했다. 나 같은 사람은 허구한 날 사기를 당해 알거지 되기 십상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도 동경했다. 유학시절, 오스트리아 빈에서 잠시 서정길 대주교님 병 수발을 들 때 값싼 입석표를 끊어 음악회에 자주 갔다. 열정적으로 지휘봉을 휘두르는 지휘자의 손 끝에서 선율이 흘러 나오는 것 같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많은 어휘를 함축해 아름답게 표현하는 시인도 부럽다."
-좋아하는 시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 특히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대목을 좋아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되는 서시도 참 좋은 시지만 감히 읊어볼 생각을 못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게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애송시 한 편 읊어달라.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고은 '가을편지')
-애창곡은?
"온 국민의 애창곡 '사랑해 당신을'. 예전엔 '저 별은 나의 별'을 자주 불렀는데 앙코르 요청을 받으면 '등대'를 이어 부르곤했다."
-별과 등대, 어둠 속 길잡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잡기(雜技)는?
"신부님들 실력에는 못미쳤지만 신학생 시절에 장기를 제법 잘 뒀다. 신부님들이 차포(車包) 떼주면 이길 때가 많았다. 덕분에 오징어를 자주 얻어 먹었다. 화투는 고스톱보다 6백(600점 먼저 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을 좀 쳤다. 저녁식사 후 명동성당 구내를 산책하다 가톨릭회관에 붙어있던 성모병원 간호수녀님들 방에 들러 가끔 쳤다. 할머니 수녀님 한 분이 그걸 꽤 좋아하셨다."
-십자가와 성경을 제외한 애장품은?
"성 김대건 신부님 성해 일부분, 성모상, 칫솔, 면도기, 그리고 20년 넘게 차고 있는 손목시계."
-운전을 잘 한다면 지금 차를 몰고 가보고 싶은 곳은?
"특별히 가보고 싶은 곳은 없다. 젊었을 때 그런 질문을 받았으면 대답할 게 많았을 텐데…."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다면 어느 나라를?
"뉴질랜드. 공기가 맑고 경치가 좋다. 언젠가 한 번 갔을 때 다음에 또 오겠다고 했는데 여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도 한번 다녀가라는 재촉을 받았다."
-하느님께서 단 하루만 허락하신다면?
"'하루는 너무 짧습니다' 하고 하소연을 해야 하나? 아니다. '하느님 제가 당신을 배반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신 사랑을 믿으며 당신 품에 들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겠다."
-새내기 직장인이라면 연봉을 얼마나 기대하겠나?
"1000만원 정도."
-그 돈으로 어떻게 가족 부양하고 집 장만할 건가?
"한달에 80만원 정도면 밥 먹고 전철 타고 다니고, 물도 사 마시고……. 그래도 20만원 정도 남을 것 같은데."
-3만원으로 여자 친구와 하루 데이트를 한다면?
"점심 먹고 영화보고 분위기 좋은 데 가서 저녁식사하겠다."
-요즘 2명이 영화보려고 해도 1만 5000원은 가져야 하는데?
"영화표값이 언제 그렇게 올랐냐? 밥값보다 더 들겠네. 그럼 빵이나 햄버거 사갖고 북한산에 올라가면 어떨까?"
-하늘나라에서 어머니를 만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고맙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사제의 길로 인도해주셔서 한 생을 잘 살다가 왔습니다. 속상하고 힘들었던 일도 털어놓고 싶은 게 좀 있기는 하지만."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30년 가까이 내 발이 돼준 운전기사 김형태(요한) 형제. 성실하고 운전 잘하고 마음씨가 곱다."
-추기경 김수환은 ( )다.
"추기경 김수환은 바보다.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사랑과 진실 그 자체인 것을 잘 알면서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사니까."
-하늘나라에 갔을 때 하느님이 잘못을 지적하며 꾸짖으신다면?
"'그래도 좀 억울합니다' 하고 항변을 해야 하나. 하느님은 인자하신 분이니까 모든 허물을 덮어 주실 것이라 믿는다."
-22세기 사람들이 추기경 김수환을 어떻게 기억해주길 바라나?
"글쎄…. 참 못난 사람이라고 기억하지 않을까? 훌륭하지는 않아도 조금 괜찮은 구석이 있는 성직자로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기는 한데."
-묘비에 남기고 싶은 말은?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 1).
[평화신문, 제926호(2007년 6월 24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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