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순교자묘 聖地ㅡ합덕읍 신리ㅡ신리 순교자묘 성지
▲신리 성지
▲신리 성지 위치도
▲당진 신리성지 위치도
▲당진 신리 다블뤼 주교 유적지
▲신리 순교자 묘 성지
충청도 내포 지방으로 조선 천주교 초창기부터 마무리 박해 때까지 신앙의 요람지로서 많은 신자와 순교자들을 끊임없이 배출해 낸 지하 공동체가 있었던 곳이다. 이 공동체는 신리 성지를 중심으로 한 거더리, 세거리, 소덜, 강계, 양촌 등 주변 마을이었다. 성지는 지금도 신리란 이름과 함께 남아 있다. 신리 성지는 20여 평 되는 목조 건물로 1815년에 지은 초가집이었다.
이곳에서 배교자 이선이(李先伊)의 밀고에 의해 1866년 3월 11일 안 다블뤼 주교가 잡힘으로써 수 많은 무명, 유명의 순교자를 내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1863년 안 주교 부재시 이웃집에 난 불이 옮겨 붙어 귀중한 자료들이 다 타 버렸다. 지금도 그 때 불에 탄 서까래, 대들보가 그대로 남아 있다.
교난 중에 이 마을의 부호였던 박경래의 소유가 되었다. 1927년 합덕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페랭(Perrin, Philipe, 백 비리버 문필) 신부가 이 집을 사들여 서울교구 부주교로 승품하신 원 아드리아노 라리보 주교님께 주교 승품 기념품으로 바쳤다.
그러나 건물만 교회 소유가 되고 대지는 여전히 박경래의 소유였는데, 순교기념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박경래가 대지 전부를 천주교 유지 재단에 기증하였고 후에 그 자신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초가였던 이 집은 1954년 성모 성년 기념으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벽, 기둥, 서까래, 대들보, 주춧돌은 원래 집에 있었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1964년 다시 수리를 하면서 상량문을 다시 써서 올렸는데 대들보의 상량문에는 『天主降生 1815年 嘉慶 21年 丙子 2月 18日 辰時 上樑 (1954年 祝聖), 1964年 3月 23日 修理, 新里公所, 人間眞理 在於永生』이라고 씌여있다. 당시까지도 신리 공소는 초가집이었으나, 훗날 함석 지붕을 새로 이었다가 2003년 10월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2004년 4월 원형대로 초가집으로 준공식을 갖었다.
▲휴계소
▲성 다블뤼 신부 사제관, 손자선 성인 생가
이곳은 다블뤼 주교가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와 함께 전라도 강경 황산포에 첫걸음을 내딛은 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시기까지 21년간 지내셨던 장소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조선 교구 제 5대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안 주교는 1845년 7월 하순 상해로 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신부와 함께 그 해 10월 12일 전라도 강경의 황산포(黃山浦)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그는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1866년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됐다.
이 집에서 다블뤼 안 주교와 여러 신부들은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그리고 병오박해 당시 순교한 신부 등과 평신도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한국 가톨릭 교회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었다. 그는 이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교구장으로부터 위촉받고 1857년부터 이를 위해 새 자료를 발굴해 그것을 프랑스어로 옮겼으며 목격 증인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해 그는 윤지충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해 1862년 모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1863년에 그의 집에 불이 나 조선말과 한문으로 된 치명 일기와 주석책 등 귀중한 자료가 모두 타 버렸기 때문에 이 책은 한층 가치 있는 것이 됐다.
바로 이 집에서 수집, 기록한 순교사 및 역사 자료 7권이 1862년 10월 홍콩의 리부아 신부를 통해 파리로 전해져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두 권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낮이면 문을 잠그고 숨어서「한불사전」, 「한글문법」, 「불한사전」, 「달레의 천주 교회사」의 기초가 된 자료수집, 문헌 번역, 순교자 행적을 기록하였다.
여사울이 초기 교회의 못자리였다면, 신리 일대는 박해 후기의 사적지였다. 내포 공동체는 거듭되는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언제나 새로운 지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성인 손자선 토마스를 기억하고 있다.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분으로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이다.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Daveluy) 주교(1817-1866)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 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각고 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만들어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
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해지기가 퍽 어려웠고 더더욱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심하였으나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한국말을 잘하고 또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저 유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하여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안 주교는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자 3일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동반 순교자인 민 신부와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너 포악한 형벌을 받았다.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어 그의 처형은 서울 대신 충청도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안 주교 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은 곧 서울을 떠나 3월 30일 수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는데 마침 이날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고 당일 사형집행을 굳이 요구하여 청대로 실행되었다.
형장인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 지방의 강가인데 순교 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안 주교의 그 때 나이는 49세,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 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성 다블뤼 주교 상
▲신리성지 성당, 사제관 봉헌비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두 마을이 구분되어 있지만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더리와 신리는 결국 같은 지역으로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블뤼 주교는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 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주교는 그 때 이웃에 있던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와 위앵(Huin, 閔) 신부를 불러오게 하여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복사인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어 위앵 신부가 멀지 않은 소재(예산군 봉산면 금치리)에서 체포되었고, 오매트르 신부가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신문에 이어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이 그들 일행에 포함되었다. 그런 다음 이들 5명은 새 처형 장소로 결정된 '갈매못'(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 수영)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굳이 이 곳까지 순교자들을 끌고 와서 처형한 이유는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 집에는 안 주교가 체포되기 바로 전날인 1866년 3월 11일 고향의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보낸 눈물겨운 최후의 편지가 기념으로 액자 속에 끼워져 있다.
이 편지는 만주의 베롤(Verolls, 方) 주교에게 보내 프랑스에 있는 부모에게 전달하게 한,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으로 올린 글(上書)이었다. 베르뇌 주교를 도와 9년 동안을 부주교로서 그리고 주교의 순교 후 조선 교구의 5대 주교가 된 지 21일 만에 장엄하게 순교한 것이다.
손자선 토마스도 다블뤼 주교와 함께 체포되어 1866년 순교하였다. 이처럼 여사울은 내포 교회가 시작된 곳이며 신리는 내포 교회가 박해를 극복해 나가던 교우촌이었고, 갈매못은 성인들의 순교터였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끈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 끈은 오늘의 교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생명선과 같은 것이 되었다.
다블뤼 주교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에서 시성됐다.
▲성 다블뤼 주교 사제관
▲손자선 성인 생가, 성 손자선 토마스(1838-1866, 농부, 병인박해 때 교수)
손자선은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3대째 내려오는 교우집안으로, 아버지와 형은 1868년 무진년 박해 때 순교하였고, 그의 당숙 손 니콜라오도 순교하였다. 부인과 함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중심으로 전교했으며 순교 자료를 모아 성직자들에게 전하였다.
1866년 3월 거더리에서 안 다블뤼 주교가 체포된 후 덕산 관아로부터 압수한 물건을 찾아가라는 기별을 받았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손 토마스는 혼자 덕산 관아로 가서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이때 원님이 천주교 신자냐고 묻자, 그는 신자임을 밝히면서 자신은 사실 죽음도 두렵지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배교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토마스는 그 자리에서 즉각 체포되었고, 원님은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를 썼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게 하였다. 그리고는 포졸들이 토마스의 입에 온갖 쓰레기를 쏟아 부으며 "야, 좋지!" 하고 놀려댔다. 토마스가 "좋습니다" 하고 응수하자, 포졸들은 "그래, 무엇이 좋단 말이냐?" 하고 되물었다.
"나는 며칠동안 세수를 못했는데 여러분들이 내 얼굴을 씻어주고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를 흘리게 한 죄인에게는 이같이 좋은 일이 없으며 또한 목이 몹시 탔는데 쓸개와 식초 대신 이런 것들을 내 입에 넣어주니 나는 마치 내가 범한 죄들을 마셔버리는 듯하여 무척 즐겁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후 토마스는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며 더욱 참혹한 형벌을 받았고, 마침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손자선은 그곳 원님이 "네가 끝까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 네 손으로 네 살점을 떼내든지 아니면 피를 보이든지 하여라" 하고 말하자 즉시 자기 이빨로 손등을 물어 뜯었다.
원님도 어쩔 도리가 없어 "이젠 너는 살 길이 없구나" 하자 "죽어도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1866년 3월 30일 공주 옥에서 목을 졸려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손자선 성인 생가 내부
▲성 다블뤼 주교 사제관 부억
▲성 다블뤼 주교 사제관 후면
▲순교복자기념비
▲신리성지 성당
▲신리성지 성당
▲신리성지 성당
▲사제관
▲성당 입구 성화
▲성당 입구 청동문
▲청동문 부조
▲청동문 부조
▲신리 성당 내부
▲신리 성당 내부
▲신리 성당 내부
▲신리 성당 내부 제대및 십자고상
▲신리 성당 내부 제대
▲감실
▲성 모자상
▲성수대
▲성체조배실
▲성체조배실
▲성체조배실 성인상
▲성체조배실 위앵신부
▲야외성당 벽면 대형 부조상
2010년 7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옆에 조성된 야외성당은 정면에 ‘순교자들의 부활’을 주제로 한 대형 부조상을 설치했다. 조각가 김종필(라파엘) 형제의 작품으로 중앙 조형물은 예수 그리스도가 강복하는 모습, 왼쪽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 앞에서 성 오메트르 신부와 황석두 성인이 하늘을 향해 팔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 오른쪽 조형물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성 위앵 신부, 손자선 성인이 기도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야외성당 벽면 대형 부조상
▲야외 미사처
신리 성지 성당 (주임 : 김 성 태, 요 셉 신부)은 넓은 마룻 바닥이 야외에 새로 만들어져있어 순례자들 에게 더 필요한 공간이 마련 되었다. 충남도비와 군비로2010년3월부터6월 말까지 삼협건설 에서 시공을 맡아 공사를 했다. 잔디광장도 넓어지고 다블뤼 주교관도 더 고풍스럽게, 담장과 휴식장을 을 만들어 순례자들이 쉴수 있는 공간도 생겨났다.
▲야외 미사처, 예수 그리스도가 강복하는 모습
▲야외 미사처 , 왼쪽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 앞에서 성 오메트르 신부와 황석두 성인이 하늘을 향해 팔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
▲야외 미사처, 오른쪽 조형물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성 위앵 신부, 손자선 성인이 기도하는 장면
▲성당의 종
▲기념탑
▲성 모자상
▲성 모자상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1처
▲십자가의 길 2처
▲십자가의 길 3처
▲십자가의 길 4처
▲십자가의 길 5처
▲십자가의 길 6처
▲십자가의 길 7처
▲십자가의 길 8처
▲십자가의 길 9처
▲십자가의 길 10처
▲십자가의 길 11처
▲십자가의 길 12처
▲십자가의 길 13처
▲십자가의 길 14처
◆십자가의 길 14 처(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
◆순교자
◆ 성 민 루가 위앵 (Huin) 신부(1836-1866)
한국 성은 민(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인 민 신부는 1861년 사제가 된 후 1865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도착지인 충청도 내포에 머물면서 안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안 주교의 지시로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악형을 겪은 후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형장이 충청도 수영으로 결정되어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3월 30일 수영에 도착, 그곳 '갈매못'에서 당일로 군문효수 되었다. 그는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 품에 안겼다.
◆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Aumaitre) 신부(1837-1866)
한국성은 오(吳),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한 프랑스인 선교사. 프랑스 '앙굴램' 교구 출신인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는 1862년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 1863년 6월 임지인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경기도 수원 근방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히고 곧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에서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나 1866년 박해가 일어나고 동년 3월 안 주교가 체포되자 한때 피신코자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못 이루고 다시 '거더리'로 돌아와 즉시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동반 순교자인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일단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충청도 수영 '갈매못'에서 3월 30일 처형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다음 두 번째 칼날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1813-1866)
일명 '재건'으로도 불리는 성 황석두 루가는 충청도 연풍에서 양반집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성장하여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보러 상경하던 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다. 그 후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해가면서 교리서적을 탐독하였고 그 결과 박대하던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였다. 이같이 뛰어난 덕행과 교리지식으로 그는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또 회장으로 활동했다. 또 고 페레올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생활을 하였다.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여 교회서적 출판에도 참여했다.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안 주교를 몇 십리나 따라가 결국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3월 23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54세로 순교했다.
▲신리 성지 전시실
▲전시실
▲전시실
▲전시실
▲전시실
▲전시실
▲전시실
▲세거리 공소에서 사용하던 제대
▲조선교구 역대주교
▲무명 순교자의 십자가
▲순교자 예배석
▲성 손자선 가족 순교자 14기 묘
합덕읍 대전리 성인 손자선 선산인 야산에 약 40기가 산재해 있다. 성인 손자선 토마스의 유해는 신리 교우들이 거두어 그가 평생을 두고 살아온 신리에서 가까운 그의 선산에 묻었다. 그의 발 옆에는 그가 옥중에서 써 보낸 편지를 그의 술잔에 담아 묻음의 표지로 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두로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이 산에는 다만 손자선 성인의 무덤뿐만이 아니라, 무명의 순교자들도 많이 묻혀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하였다.
▲성 손자선 가족 순교자 14기 묘
▲성 손자선 가족 순교자 14기 묘
▲무명 순교자의 묘, 제1차 파묘
과연 1972년에 그 산 일부가 개발되어 94,400평이 과수원으로 개발되었는데 그때 32기의 연고자 없는 고총이 파묘되었을 때 묘마다 목이 없었고 시신만 나왔다고 목격자들은 말하고있다.
또한 묘마다 묵주가 나왔는데 그 양이 그때 시골 바가지로 한 바가지 정도나 될 만큼 모두어 있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대원군이 천주교인들을 목베어 죽이고 목은 수효를 확인하기 위해 가져가고 시신만을 버렸다고 한다.
32기의 시신은 그 당시 강계에 살던 손석윤씨가 10여 명의 교우를 데리고 와서 사과 상자 4개에 담아서 지고 그곳에서 1km 떨어진 어떤 공동 묘지에 일렬 횡대로 6봉분에 나누어 합장하였다고 한다. 이 이장 장소는 합덕읍 대전리 소재의 중상부에서 서남향으로 6기의 분묘가 발견되었다.
무명 순교자 (목이 없는 시신) 묘
▲무명 순교자 묘
◆제2차 파묘
또 그 산 일부가 개발되어 공장이 들어서기 때문에 그때에도 14기가 파묘되었는데 현재 당진군 합덕읍 대전리 공동묘지 중상부 동북향으로 14기의 묘는 1985년 4월경에 김병국(金炳國)씨가 동료 김영기(金永寄), 최동철(崔東喆)씨와 함께 이장한 무명 순교자 묘이다.
김병국씨는 이곳 신리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전해 들은 얘기로 이 지역의 대부분의 땅이 치명자 손씨 땅이었고, 손 성인의 묘와 많은 순교자가 이곳에 묻혀 있다고 한다.
특히 대전리120-8에 있는 10수 기의 묘는 손씨 가문의 치명자 묘라는 사실을 구전으로 듣고 익히 알고 있던중 이 묘역을 포함한 이 일대가 공장 용지로 개발됨에 따라 지주 서종순(徐鍾淳)씨로부터 묘 이장 작업 청탁이 있기에 상기 동료와 함께 작업중 십자가(길이 약 10cm)가 채굴되고 손씨 문중 치명자라는 구전도 듣고 해서 정중히 이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나온 십자가는 굴삭기 기사가 일도 안하고 따라다니면서 달라고 해서 주었다고 한다. 14기의 묘는 구전으로 전하는바 손씨 치명자 가족묘로 전해 오고 있다.
▲무명 순교자의 묘
▲무명 순교자의 묘
▲무명 순교자의 묘
◆신리성지 순교자 명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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