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을 찾는 사람들
우리는 모두 삶에 지쳐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대해 회의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진실로 밝고 명랑한 사회가 될 수 있는지 의심합니다. 나라에서 무슨 말을 해도 교회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여러분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나라도 교회도 신임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회의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보다 나은 앞날을 기대하면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아쉬운 것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인정이 아쉽고 이해와 진실이 아쉽습니다. 나를 받아 줄 따뜻한 마음, 나를 일으켜 줄 힘찬 팔, 나의 모든 상처를 어루만져 줄 부드러운 손길은 없는지, 모두가 이 같은 동경에 젖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리움을 지닌 채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절망 직전에 서 있으면서도 참으로 인생의 의미는 없는지, 빛은 없는지 계속 찾고 있습니다.
오늘의 세계를 날로 더욱 심각한 불행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강대국들이 독점 지배하는 경제와 권력 정치 체제입니다. 이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세계 속의 불의, 특히 그 때문에 시련과 타격을 받고 있는 약소국들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고질적 부패와 사회 불안의 연원이 현재의 부조리한 권력과 금력의 정치 체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진실로 과감한 혁신이 없으면 부정 부패일소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국민 대중과 영세민들의 생활 향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국 인간 회복과 새 나라의 역사 참조를 단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실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인간과 그 양심을 믿고 살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지금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정부나 교회나 사회 지도층은 국민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 양심의 외침을 질식시켜서는 안 됩니다.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 혁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겨레는 그 어느 것도 원치 않습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그런 움직임에 대해서는 불의에 대해서와 같이 강력히 저항합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일 뿐 아니라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숭고한 정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의로운 정신과 행동입니다. 모든 이의 마음속에 식어 가는 애국 애족심을 다시 불태울 수 있는 참신한 정치, 인간 존엄성과 사회 정의에 입각한 시정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모든 이의 소망을 볼 수 있습니다. 국가 안에서는 모든 이가, 국제적으로는 모든 국가가 평등하고 서로 권익을 돌보며 일체감을 갖는 사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의 성취를 강생하신 그리스도의 생활과 신비를 제외하고 어디서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베푸신 사랑, 그분이 지키신 정의, 그분이 요구하신 신뢰, 한마디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와 사랑입니다. 정의와 사랑이 없는 곳에 평화와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 사회의 안정과 질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특히 국민이면서 동시에 스스로가 먼저 참된 강생의 신비를 깊이 깨닫고 그의 사랑과 정의 안에 단결해야겠습니다.
우리들이 사회와 정부를 향해서는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우리 안에 정의의 실천이 없다면 우리는 위선자가 되는 것이고 강생하신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교회, 특히 나를 포함한 교회의 지도층, 성직자, 수도자들은 이 정신을 가졌습니까? 이 사랑을 가졌습니까?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이 역사의 심야를 밝혀야 할 중대한 사명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반성이 있고 그 반성을 토대로 교회 자체의 혁신이 있을 때, 그리고 정의와 사랑의 행동이 있을 때, 우리 교회는 참으로 한국 사회 안에 그리스도를 강생케 할 것입니다. 이 사회와 나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일치시키는 성사, 즉 일치의 도구와 표지로서의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교회 헌장 1항)
=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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