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기독교 영성(Christian Spirituality)

문성식 2021. 4. 28. 18:15



      기독교 영성(Christian Spirituality)

 


제 2장 영성발달을 위한 인간 이해와 성령의 역사        

 

A. 인간의 본질적 구조 

 

1. 삼분설(三分設)과 이분설(二分設)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는 “김씨 집안의 셋째 아들이요 성격은 내성적이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기의식을 우리는 <자아> 혹는 <자아의식>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제일 접근하기 쉽고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나>는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하여 특별한 생각 없이 “나는 나지, 별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하며 특별한 생각 없이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라는 인간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상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인가를 정확히 알아야, 나의 발전을 이루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라는 존재를 어떤 존재라고 하는가?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성경에 근거하여 <나>의 본질을 추구하다가 생긴 이론이 소위 <삼분설><이분설>, 혹은 <일분설>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교단별로 견해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통합측은 1분설, 합동측은 2분설, 그리고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침례교 등은 3분설을 주장한다.  성경은 3분설 혹은 2분설적 견해를 보여준다.

 

(1) <3분설> 입장의 성경 말씀들    

데살로니가 전저 5:23에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το πνευμα spirit)과 혼(η ψυχη soul)과 몸(το σωμα body)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는 인간이 [영 + 혼 + 몸]으로 구성된 것으로 나타난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ψυχη soul)과 영(πνευμαspirit)과 및 관절과 골수(joints and marrow)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라니”   이 말씀에서는 인간이 [영 + 혼 + 관절과 골수]로 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살전 5:23의 <몸>이 여기서는 <관절과 골수>로 표현되어 있을 뿐 같은 입장이다.

 

(2) <2분설> 입장의 성경 말씀

 마10:28 “몸(the body)은 죽여도 영혼(the soul)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σωμα body)과 영혼(ψυχη soul)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인간 = 몸(σωμα) + 영혼(ψυχη = 혼(원어) ]  

롬8:10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το σωμα body)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το πνευμα spirit)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 인간 = 몸(σωμα) + 영(πνευμα) ]

전도서 12:7 “흙(???? the dust)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the spirit ???? )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 인간 = 흙(??? 몸) + 신(영 ??? 하나님이 주신) ]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 the dust)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 ??שׁ? the breath of life)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a living being ??? שׁ?? )이 된지라”

[ 인간 = 흙(몸) + 생기(영) = 살아있는 혼(생명체)(??? שׁ??) ](=생물 ??? שׁ?? 창2:19)   

                                         

이 본문에서는 인간이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의미하며, 원어로 볼 때에 창 2:19의 “생물”고 동일하다.  이것은 생명체라는 입장에서는 인간과 생물이 동일하나, 그 차이는, 인간 창조에서는 하나님의 생기(영)가 흙으로 만든 몸 안에 불어넣어졌다는 것이다 여기 불어넣어진 생기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라고 본다(전12:7 참조).     

히브리서 12:9 “우리 육체(flesh σαρξ)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spirits πνευματα)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하지 않겠는냐” (cf. 요3:6 ).[ 인간 = 육체(σαρξ)(몸 + 혼적 요소 Calvin) + 영 πνευμα ]       ( Cf. 엡2:3 “육체의 욕심”(σαρξ) = <몸 +혼의 욕망>으로 봄)

 

롬 7:25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σαρξ)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인간(내자신) = 마음 + 육신(죄의 법을 섬김) ] 엡 4:22-24 “너희는 .. 옛 사람(old self)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new self)을 입으라 ”  [ 인간 = 옛 사람 + 새 사람( 하나님의 형상: 참 지식(골3:10), 의, 거룩 )]

                            

(3) 몸과 혼과 영에 대한 개별적 고찰 

     

1) <몸>(?שׂ? 육신)         

ㄱ) 인간의 뼈와 살을 포함한 육신 전체를 말한다(왕상21:27, 왕하 6:30) 

ㄴ)인간의 모든 영적 기능의 좌소가 되어, 하나님을 사모하여 부르짖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시119:120, 84:2)          

Cf. <육체 σαρξ>라고 할 때는 몸(육신)의 의미가 아니고, <몸 + 혼>의 기능을 합한 의미이다(엡2:3, 히12:9, 롬7:25)

 

2) <혼>(שׁ??)

 혼은 <영>이 육신에 작용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창2:7 인간 = 흙(육신) + 생기(영) = 살아있는 혼] 혼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ㄱ) 혼의 일반적 의미는 <생명>(life)이다(출 21:23, 4:19).           

ㄴ) 혼은 모든 지정의의 좌소이기도 하다.  한글개역은 <혼>(שׁ??)을 여러 가지로 번역한다. -- “마음”(민 21:4,삿 16:16), “뜻”(창 23:8-9, 시 105:22), “욕심”(전 6:7, 잠 23:2), “영혼”(겔 18:4), “생명”(레 17:11) 등등.          

ㄷ) 혼은 또한 의식하고 감독하는 주체로서의 인간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창 2:7). 

[인간 = 살아있는 혼]Oeheler “인간은 영을 갖고 있는 존재이나 그 자체는 영은 아니고 혼(שׁ??)이다.”Payne  “인간은 영을 갖고 있으나 그 자체는 혼이다. 인간은 그의 영으로서 사고하나 그 사고자는 혼이다.”

 

3) 인간의 영(???)

ㄱ) 영은 혼의 원동력(motive power)이다.  인간의 영(???)이 인간의 육신을 통하여 지정의의 어떤 개성적이요 인격적인 형태로 표현될 때 그것을 <혼 שׁ??>이라 불렀다.  구약은 <혼>을 인간의 지정의의 좌소로 보았으나, <영>은 더 근본적인 지정의의 좌소로 보았다.  그러나 한글개역은 <영>을 “마음”으로 번역하고 있다(창26:35 마음(???), 학1:14 마음(???), 대하36:22 마음(???)).          

ㄴ) 사람은 자기의 <영>의 작용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영을 새롭게 하는 역사가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함을 증거 한다.  다윗이 범죄 후 시51:10에 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하고 기도한데서 잘 나타난다.          

ㄷ) 한글개역은 <영 ???>을 주로 “마음”(심령)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마음과 영은 다르다(“상한 심령”(시51:17), “통회하는 마음”(사57:15) ).   

 

(4) 인간의 마음(??)  

   

ㄱ) 혼(שׁ??)과 마음(??)은 구별되어야 한다. 

 신약성경도 <혼>은 프쉬케(ψυχη)로 되어 있지, 마음을 가리키는 칼디아(καρδια)로 번역된 일은 없다.  김희보 교수에 의하면, “<혼>이란 영에 근원한 것으로 인간 육신 밖에서 들어온 외래적인 것이나, <마음>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육신의 일부분이요 하나의 생리학적 불가견의 기관이라.”고 한다.      

ㄴ) <마음>과 <혼>은 서로 다르나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인간의 <혼>은 오직 <마음>이란 기관을 통해서만 활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육신적인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마음>이 지정의(知情意)의 좌소가 된다.  <혼>의 지정의의 표현은, 오직 인간의 육신의 기관인 <마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인간의 육신의 모든 기관 중에서 보이지 않는 기관인 <마음>만이 오직 <혼>의 활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기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신에 있어서의 도덕적 신앙적 행위의 유일한 기초는 <마음>에 있다.  따라서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사람의 도덕적 신앙적 상태가 결정된다(신6:5,삼상16:7).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구속이 <새 마음>을 받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겔11:19, 마5:8, 눅6:45). ㄷ) 인간의 <지혜>의 좌소도 <마음>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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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34:10에 보면 “총명한자”(wise man)가 원문에 ‘마음을 바로 하는 자’라는 의미로 “마음의 사람들”(??? ?שׁ??)이라고 표현된다. 이와 같은 의미로 잠6:32의 “무지한자”는 원문에 ‘마음의 허무자’(?? ???)라고 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을 종합하면, 인간의 <영 πνευμα>과 <혼 ψυχη>은, 각기 지정의(知情意)의 인격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영>이 <혼>의 원동력이 되며, 특히 <영>이 새롭게 되는 일은 성령하나님의 역사로 가능함을 보여준다(시51:10 cf.요3:6).  그리고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영과 혼이 각기 <마음>으로 많이 번역되고 있는데, <마음>은 보이지 않은 <몸>의 한 기관으로, 혼의 모든 지정의의 표현은 이 마음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인간 자신이 <몸>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도록 지음 받았으나, 때로는 인간 인격이  <영과 육체>로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 <육체>( σαρξ)는 <혼과 몸>의 의미가 합해진 의미이다.

         

성령님께서 구원을 각 개인에게 적용하실 때에도 <영>에는 내적인 생명으로 역사하시고, <육체>(몸+혼)에는 외적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3:6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함으로, 중생시에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새 생명을 갖게 하신다.  그러나 승천 하신 후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든 육체 >(πασαν σαρκα) 위에 부어주어, 복음증거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심을 볼 수 있다.그래서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온전히 복음 사역에 수종들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을 알게 된다.


B. 두 종류의 성령 충만   

 

영성발달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성령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발달의 주도자는 분명히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 충만해지는데 있다.  그러데 이러한 성령 충만에는 내적 충만과 외적 충만이 있다. 

 

1. 내적 충만

내적 충만은 성령의 <영>(=영혼(한글개역))에 대한 사역 즉 생명적인 사역을 말한다. 요한복음 3:6에 의하면 중생시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거듭난다.  성령께서는 그 후 우리 영속에 내주하셔서 우리의 영을 하나님과 생명적으로 연합하게 하심으로(롬6:5, 요14:20) 성화되고 성장되게 하신다.  우리의 인격이 이렇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충만되어질 때, 이것을 <내적 충만>이라고 하며, 그 결과는 <성령의 9가지 열매>로 나타난다. 즉 갈5:22-23에 기록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9가지 열매를 맺게 된다.

 

2. 외적 충만     

 외적 충만이란 성령의 <육체 σαρξ(혼+몸)>에 대한 사역 곧 성령의 은사적 사역을 말한다.  은사는 주의 신령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신 도구(능력)이다.  성령의 은사적 사역은, 고전 12:7-11에 기록된 대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 통역 등등의 은사들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욜2:28에 약속된 “만민” 곧 “모든 육체”(?שׂ? ??) 위에 오순절부터 부어 주기로 약속하신 성령(오순절 성령 행2:14-17)을 받아(성령세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성령의 능력충만) 주로 나타나는데(행2:1-4, 눅24:49),  이것이 바로 성령의 <외적 충만>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이같이 두 종류의 성령 충만을 주시는 목적은, 먼저 거듭나게 함으로 <영>에 생명을 주어 변화시켜 거룩한 인격으로 성장시키고, 그 다음 마귀에게 종 노릇해온 <육체>(몸+혼)에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능력을 부어 주어, 자기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귀 곧 사탄>은 악한 왕국의 왕이요, <귀신들>은 그의 통치 아래 활동하는 타락한 천사들이다.  귀신들린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귀신을 향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꾸짖을 때, 처음에는 그 귀신이 <나는 과거에 죽은 누구누구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죽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귀신이 그 사람처럼 행동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을 속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속지 않고 계속 예수님의 이름과 그의 권세로 꾸짖고 추궁하면, 죽은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라는 자기의 본 정체를 밝히고 떠난다.   

 

<윤회설>을 말하는 불교의 경우, 사람이 죽어서 소도 되고 돼지도 된다는 것은,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이 죽으면, 그 안에 붙어 있던 귀신이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거나, 아니면 다른 짐승들에게 들어가 활동하다가, 그 짐승이 죽으면 또 다른 곳을 찾아 계속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하느냐 하면,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갈 영원한 멸망의 때까지 그렇게 한다(마12:43-45 참조).  이렇게 볼 때, 불교인들은 <귀신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꼴이며,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 분명한 영분별을 하게 되면 이러한 사실을 밝히 알 수 있게 된다.   

 

성령의 모든 은사를 친히 체험한 박철수 목사님에 의하면, 사람에게 들어가는 귀신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태어날 때 들어가 자기화된 귀신(성격 형성, 개성), 

둘째는 죄를 지을 때에 들어가게 되는 귀신,  그리고

셋째는 지나가다 슬쩍 사람에게 들어가는 귀신(거릿 귀신)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마 8:20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 당시 목수 일을 하셨으니, 목수간도 있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던 집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는가?  그것은, 당시 백성들 가운데 <영과 혼과 몸>이 신령한 집으로 건축되어 있지 못함으로, 주님이 내주 내재할 <신령한 집>이 없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베드로는, 벧전 2:4-5에서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와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하였을 것이다.   

 

인간 이해에 있어 두 종류의 성령 충만은 대단히 중요하다.  두 종류의 성령 충만으로 우리 <영>이 새로워지고 우리 육체(혼+몸)가 성령의 능력을 입게 될 때, 우리의 영성과 삶은 제대로 잘 발달되어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내 영에 임함으로 영이 변화되고 성령 충만하게 됨으로, 내 영의 지정의(知情意)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바로 깨달아, 선악을 바로 분별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보다 성숙해질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생기는 <윤리 도덕적인 감정>은 <혼적인 감정>으로서 죽고 썩을 것이지만, 영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생명적이며 실제적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아무리 <조카를 사랑 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머니로부터 흘러나오는 <모성애>는 아니다.  왜냐하면 모성애는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육신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기 때문에 고마워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육신적인 것, 혼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 하나님이 내 영혼의 친아버지가 되었음을 깨닫고 감사해서 사랑하는 것은 <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그 사랑의 농도에 있어서 전혀 차원이 다르다.  두 종류의 성령충만을 통해서, 우리는 <영>에 역사하는 것과 <육체>(혼+몸)에 역사하는 것이 다름을, 사랑의 느낌으로도 이렇게 입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