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2.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2) 교학의 발전
통일신라시대는 한국 불교학의 전성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불교이론들이 발전하였다.
당나라와의 활발한 문화교류를 배경으로
새로운 불교이론들이 지체 없이 수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기초로 하여 불교이론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시기였다.
특히 독자적인 교학체계를 수립한 원측, 원효, 의상 등의 불교학은
신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불교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동아시아의 불교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원측과 유식사상
통일신라시대 교학연구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원측(613~696년)이었다.
전기에 의하면, 원측은 신라의 왕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3세에 출가한 후 10여 세의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에서 여러 유명한 불교학자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범어와 서역 여러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는 등
불교학을 연구할 수 있는 소양을 쌓아 나갔다.
젊은 시절에 이미 불교학자로서의 명성을 쌓았던 그는,
645년 현장(玄斡, 600~664년)이 인도에서 유식학(唯識學)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후에는
이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여 유식학자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하였다.
특히 658년에 황실에 의해 서명사(西明寺)가 개창된 후에는
그 곳에 머무르면서 유식학의 강의와 주석서 집필에 몰두하였고,
노년에는 측천무후의 발원에 의해 추진된 불경 번역사업에 초청되어
증의(證義)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해심밀경소』, 『성유식론소』, 『유가론소』 등을 비롯한 10여 종이 있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해심밀경소』, 『인왕경소』, 『반야심경찬』 등이다.
또한 다른 문헌에서 인용하고 있는 내용을 모은 『성유식론소』의 복원본이
근대에 편집되었다.
원측의 저술 중 대부분은 현장이 번역한 신유식의 경론들에 대한 주석서로서
신유식의 이론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현장에 의해 소개된 신유식의 이론은 원측에 의해 사상적으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장은 경론의 번역에 집중하느라 유식학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저술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신유식의 이론적 체계화는
원측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측은 저술에서 자신이 이전에 수학하였던 구유식인 섭론학과
현장이 소개한 신유식의 이론적 차이를 자세히 분석한 뒤,
신유식의 이론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원측의 저술에는 신유식의 비판의 대상이 된 구유식의 이론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구유식의 소양을 가지고 있던 원측이
구유식과 신유식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원측의 제자로는 신라 출신인 승장과 도증이 알려져 있는데,
승장(勝莊)은 원측 사후 그의 부도를 건립했으며,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서 불경의 번역작업 등에 참여하였다.
도증(道證)은 원측이 입적하기 전인 692년에 신라에 귀국하였으며,
그를 통하여 원측의 사상이 신라에 전해지게 되었다.
도증에게는 7종의 유식학 저술이 있었는데 모두 흩어지고,
다만 『성유식론요집』의 단편만이 규기 문도들의 저술에 비판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도증은 이 책에서 성유식론에 대한 원측, 규기 등 여섯 명의 주석을 종합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원측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다.
도증이 원측의 유식학을 전하기 이전에도 신라에서는 유식학이 연구되고 있었다.
원효는 현장이 번역한 논서의 내용을 이전의 유식학 논서들과 대조하여
종합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주로 구유식의 입장에서 신유식을 이해하려는 입장이었다.
백제 출신으로 통일 직후에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의영(義榮)도
구유식의 입장에 서 있었다.
일본 문헌에 인용된 내용에 따르면 그는 신유식의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1)을
강하게 비판하였다고 한다.
경흥 또한 백제 출신으로서 신문왕(681~691년)에게 국로(國老)로서 존경받았고,
10여 종의 유식학 주석서를 저술했지만,
현재는 그 단편만이 전해지고 있어 상세한 사상적 입장을 알기는 어렵다.
의상에게 화엄학에 대하여 질문한 적이 있는 의적(義寂) 역시
원래는 유식학자로 그의 『성유식론미상결(成唯識論未詳訣)』이
도증의 『성유식론요집』에 인용되어 있다.
도증의 귀국 이후에 활동한 유식학자로서는 도륜(道倫)과 태현(太賢)이 있다.
도륜은 『유가론기(瑜伽論記)』 100권을 지어서
중국과 신라 승려들의 견해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으며,
태현은 20여 종의 유식학 관련 저술을 남겼다.
특히 태현은 후대에 신라 유식학의 조사로서 추앙받았는데,
그의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에는 원측과 규기의 견해가 대등하게 인용되고 있다.
의상과 화엄사상
유식학과 함께 통일신라의 불교학을 대표하는 것이 화엄학이다.
화엄학은 『화엄경』의 내용에 기초하여 모든 존재의 상호연관성과
부처와 중생의 동일성을 해명하고자 했던 사상으로서
당나라 초기에 지엄(智儼, 602~668년)에 의해서 기본적 이론체계가 마련되었다.
신라의 화엄학은 중국에 유학하여 지엄 문하에서 직접 배우고 돌아온
의상에 의해 성립되었다.
의상(義湘, 625~702년)은 경주의 귀족 출신으로서
10여 세에 출가하여 국내에서 불교학을 연마하였으며,
문무왕 원년(661)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에서는 장안 근처에 있는 종남산으로 들어가
지엄 문하에서 화엄학을 수학하고 지엄 입적 후 문무왕 11년(671)에 신라로 돌아왔다.
귀국 이후 처음에는 자신이 출가했던 경주의 황복사에 머물다가
얼마 후 문도들과 함께 태백산으로 들어가 부석사를 창건한 뒤
그 곳에서 화엄학을 강의하며 지냈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그가 저술한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에 잘 나타나 있다.
『일승법계도』는 화엄사상의 핵심을 7언 30구의 시로 요약한 법계도시(法界圖詩)와
그에 대한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법계도시는 문장의 순서가 상하좌우로 회전하는 반시(槃詩)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법계도인(法界圖印)이라고도 불리며,
지엄의 입적 직전에 교학의 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어 바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의상은 모든 존재가 본질적으로 서로 원융하며,
부분과 전체, 순간과 영원, 중생과 부처가 동질적이라고 말한다.
현상세계의 차별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서로 의지함으로써 각각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상은 모두가 차별이 없는 중도(中道)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의상은 상즉상입(相卽相入)과 십현문(十玄門),
육상(六相) 등의 이론들을 차용하고 있다.
이것은 지엄에 의해 창안된 화엄사상의 핵심적 이론들이었다.
특히 상즉상입을 설명하기 위한 구체적 논증으로 제시한 수전법(數錢法)은
지엄의 강의에 기초하여 의상이 창안한 것으로
후대 화엄사상의 이론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로서 널리 이용되었다.
이처럼 화엄사상의 핵심을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는 『일승법계도』는
실로 의상사상의 요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의상의 문도들은
이 책에 의거하여 화엄사상을 전개해 갔다.
이 밖에도 의상은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등의
화엄학에 관한 저술이 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의상은 화엄사상의 요체를 간명하게 정리하고
이를 실천하는 수행방법을 체계화하는 데 힘썼던 반면에,
화엄학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거나 다른 불교의 이론과 비교하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화엄학 저술들은 모두 간단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로지 실천을 중시했다는 점이 그 특징으로 꼽힌다.
이는 그와 동문이었던 법장이 화엄학의 이론을 체계화하기 위해서
방대한 저술을 남기고, 다른 교학과 화엄학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점이라 할 것이다.
의상에게는 많은 문도들이 있었는데,
특히 진정, 지통, 양원, 상원, 도신, 표훈 등이 유명하였다.
의상의 화엄학은 처음에는 문도들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유포되었지만,
신림과 법융, 표훈 등이 활약했던 8세기 중반 이후에는
불교계의 주요한 흐름으로 확립되었다.
하지만 신라의 유식학자들이 다양한 이론을 공부하고
여러 경전에 주석을 붙였던 것과는 달리,
의상의 문도들은 화엄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고
다른 불교이론들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의상의 문도들이 그의 학풍을 전수하여 교학의 체계화보다는
화엄사상의 구체적 실천을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원효의 화쟁사상
통일신라의 불교학에 중요한 획을 그었던 것은 바로 원효(元曉, 617~686년)의 교학이었다.
유식학과 화엄학의 연구자들이 중국에서 배웠거나
중국에서 들어온 이론에 토대를 두고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갔던 것과 달리
원효는 중국의 불교학 이론들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하였다.
그의 교학체계는 신라 불교학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그의 사상은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에 의해서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원효는 경주 근처 압량군(현재 경산군 지역)에서 나마(奈麻)의 관등을 갖는
중급관료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십대의 나이에 출가한 후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수학했던 그는
진덕여왕 4년(650)에 의상과 함께 중국 유학을 시도했지만
고구려의 해상 봉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송고승전』에서는, 이 때 원효가 무덤 속에서 해골의 물을 마시고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을 깨닫게 되어 중국 유학을 포기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원효는 중국에서 전래된 경전과 주석서들을 스스로 해석하고
이를 전통적인 교학과 조화시키면서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성립시켜 갔다.
현재 알려진 원효의 저술들을 살펴보면,
그는 그 당시에 연구되고 있었던 거의 대부분의 불교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각의 사상에 대하여 독자적인 이해를 제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가자로서의 생활원리에 충실하고자 했던 의상과 달리
원효는 일반 사회의 문제들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통일 전쟁기인 661년 겨울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원효는 당나라가 보낸 암호문서를 해독하여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게 하였고,
과부가 된 공주와 결혼하여 설총(薛聰)을 낳아 유학자로 키우기도 하였다.
원효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보살의 중생제도와 대중교화를 중시하였는데,
특히 유마거사와 같은 승속불이적(僧俗不二的)인 태도를 중시했다.
원효가 왕실의 공주와 결혼하게 된 배경에는
통일전쟁을 주도했던 왕실과의 공감도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성들에게 덕을 베푸는 정치를 강조한 왕실의 모습이
중생제도를 중시한 원효의 사상과 통하는 면이 많기 때문이다.
원효가 처음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불교사상은
반야공관(般若空觀)사상 및 법화와 열반의 일승(一乘)사상이었다.
불교 대중화의 선배였던 혜공과 대안은 모두 반야공관사상의 대가로서
원효는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반야공관사상을 수학하였다.
그리고 원효는 중국 유학에 실패한 이후에,
의상과 함께 백제 지역으로 옮겨 와 있던 보덕을 찾아가서 열반경을 수학하기도 하였다.
법화경과 열반경은 모든 가르침들이 결국은 하나로 귀결되며,
중생들이 모두 참다운 가르침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일승사상의 대표적인 경전들이었다.
이처럼 원효는 처음에는 반야공관사상과 일승사상을 주로 수학했지만
얼마 후에는 당시 중국에서 성행하고 있던 유식학을 적극적으로 공부하였다.
그는 중국 유학을 단념한 후 중국에서 전래된 저작들을 통하여
유식학의 내용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이를 해설하는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원효의 유식학 관련 저술은 14종 40여 권으로, 총 90여 종에 가까운
그의 저술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분야이다.
그런데 유식학은 현상계의 유적(有的) 측면을 분석하고
소승과 대승의 차이를 강조하는 삼승(三乘)의 교학으로서,
원효가 초기에 수학했던 반야공관사상 및 일승사상과는 대립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특히 유식학은 성불할 수 없는 중생이 있다는 오성각별설을 주장하여
모든 중생의 성불을 주장하는 일승사상과는 서로 모순되는 입장이었다.
원효는 이후 이러한 사상적 차이를 해명하고 조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 과정에서 독자적인 사상체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원효가 반야공관 및 일승사상과 유식학의 사상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주목한 것은 기신론의 사상체계였다.
기신론에서는 일체 존재들은 중생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마음, 즉 일심(一心)의 발현이며,
그것은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구분되지만,
양자는 동일한 마음의 고요한 측면과 움직이는 측면을 구분한 것으로서
실제로는 하나로 동일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원효는 기신론의 사상을 여러 불교이론을 종합하는 사상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대승기신론별기』에서 기신론이야말로
“여러 논서들 중에서 우두머리요, 많은 논쟁을 없앨 수 있는 주인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기신론을 높이 평가한 원효는
기신론에서 이야기하는 일심을 대승의 핵심사상으로 파악하기에 이른다.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존재들은 일심의 발현과 다를 바 없으며,
그 일심은 모든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 대승사상의 핵심이라고 파악한 뒤,
불법의 목적은 이러한 일심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와 동시에 원효는 금강삼매경을 중시하였는데,
차별이 없는 절대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는 관행(觀行)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금강삼매경의 핵심을 ‘일미관행(一味觀行)’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일미’란 차별이 없는 절대적인 경지를 가리킨다.
여기서 ‘일(一)’은 나누어지기 이전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체로서의 하나이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금강삼매경의 내용은
기신론의 일심을 체득하기 위한 체계적인 수행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와 같이 원효는 기신론에 입각한 자신의 교학체계에 입각하여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 냄으로써 『금강삼매경론』을 공관사상에 그치지 않고
차별과 무차별을 초월한 진리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는 사상을 제시한 경전으로 읽어 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금강삼매경의 내용은 일승과 삼승,
공관과 유식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원효는 기신론과 금강삼매경에 의거하여, 서로 대립하는 이론들은
진리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이해하여 조화시킨 뒤,
불교의 근본 목적은 차별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인 일심을 체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서로 대립되는 이론들이 실제로는 대립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
원효의 화쟁(和諍)사상은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원효는
그 당시 불교학에서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이야기되는 개념들이
실상은 동일한 진리의 모습을 다른 차원에서 다른 방법에 의해 설명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진리의 참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언어의 개념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효의 사상은 신라의 불교계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영향을 주었으나,
그의 사상체계를 그대로 계승한 이들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한편, 신라의 불교가 교학 방면에서 발전한 것은 인쇄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불국사를 조성하면서 법당 앞에 세운 석가탑에 봉안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8세기 초엽 목판으로 인쇄된 경전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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