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제4절 교리 문답
[37도품(三十七道品)]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과 단계는 무엇인가?
불교의 목적인 깨달음을 실현하고 또한 지혜를 얻기 위한 실천 수행법이란 뜻으로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 37보리분(三十七菩提分)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도를 닦는데 보조적인 역할이 되는 것’,
‘깨달아 가는 단계’에 나타난 4념처(四念處), 4정단(四正斷), 4여의족(四如意足),
5근(五根), 5력(五力), 7각분(七覺分), 8정도(八正道)의 수행법을 합한 것을 말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사념처 : 신념처(身念處)ㆍ수념처(受念處)ㆍ심몀처(心念處)ㆍ법념처(法念處)
- 사정단 : 단단(斷斷)ㆍ율의단(律儀斷)ㆍ수호단(隨護斷)ㆍ수단(修斷)
- 사여의족 : 욕(欲)ㆍ염(念)ㆍ정진(精進)ㆍ사유여의족(思惟如意足)
- 오근 : 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ㆍ염근(念根)ㆍ전근(定根)ㆍ혜근(慧根)
- 오력 : 신력(信力)ㆍ정진력(精進力)ㆍ염력(念力)ㆍ정력(定力)ㆍ혜력(慧力)
- 칠각분 : 택법각분(擇法覺分)ㆍ정진각분(精進覺分)ㆍ희각분(喜覺分)ㆍ제각분(除覺分)ㆍ
사작분(捨覺分)ㆍ정각분(定覺分)ㆍ염각분(念覺分)
- 팔정도 : 정견(正見)ㆍ정사(正思)ㆍ정업(正業)ㆍ정어(正語)ㆍ정명(正命)ㆍ
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
이는 신ㆍ수ㆍ심ㆍ법을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으로 보는 전도된 생각을 버리고
부정(不淨)ㆍ고(苦)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로 관하라는 것이며,
이미 일어난 악을 없애려고 부지런히 노력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을 미리 막으려고 부지런히 노력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부지런히 노력하며,
이미 일어난 선은 잘 길러 내어 더욱 증장하도록 부지런히 노력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갈등 없이 자기 확신의 땅에 마음의 뿌리를 내리게 하려는 것이며,
오근의 뿌리를 바탕으로 정진하여 불선법(不善法)에 동요되지 않고
나아가 모든 불선법을 엎어 버릴 힘을 얻도록 수행하라는 것이다.
또한 불도를 수행하는데 지혜로써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살펴서 골라내고 알아내야 하며,
마음이 혼침하거나 들뜨면 마음을 일깨우고 가라앉히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통을 소멸하여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닦아야 할
여덟 가지의 구체적인 중도적 실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 37도품은 삼학(三學)의 입장에서 보면,
사정단은 계학(戒學)에 해당하며, 사념처는 혜학(慧學)에 해당하고,
오근, 오력, 칠각분, 팔정도는 삼학을 모두 겸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모든 불자들이 닦아야 할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계정혜(戒定慧) 삼학이라고 할 수 있다.
[3해탈(三解脫)]
해탈의 실체는 무엇인가?
삼공(三空), 삼해탈문이라고도 한다.
즉 해탈을 얻어 가는 세 가지 방법으로
공해탈문(空解脫門)은 일체 만유가 모두 공(空)이라고 관하는 것이요,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은 공이기 때문에 상대적 차별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고,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은 일체 만유가 공이고 무상이기 때문에
원해서 구해야 할 것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여기서 해탈이란 고통으로 가득 찬 윤회로부터 단호하게 벗어나서
두 번 다시 생존의 세계에 이르지 않은 것을 말한다.
모든 욕망이 소멸하였다는 점에서는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열반(깨달음)과 같은 의미이다.
이러한 해탈은 다시 육체를 동반한 상태에서의 해탈인 ‘생신해탈(生身解脫)’과,
육체의 속박을 완전하게 벗어난 해탈인 ‘이신해탈(離身解脫)’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불교에서는 번뇌를 끊고서 마음의 속박을 없게 하여
신체를 갖춘 제자의 교육이나 사람들의 구제에 힘쓰는 이타적 해탈의 상태를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 나머지가 있는 불완전한 깨달음),’
죽음과 동시에 심신과 함께 속박을 떠나서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고 한다.
특히 부처님의 죽음을 ‘반열반(般涅槃 : 완전한 깨달음)’이라 하여 따로 구분한다.
그리고 초기불교에서는 윤회의 근본적인 원인인 욕망과
무지로부터 벗어난 심해탈(心解脫 : 마음에 탐욕을 없앤 것)과,
혜해탈(慧解脫 : 지혜에 의해 무명에서 벗어난 것) 등으로 구분함으로써
지혜와 선정을 동시에 갖춘 수행자를 지향하였다.
이러한 번뇌와 깨달음을 실체적 존재로서 파악하려는 부파불교의 해탈에 대한 해석은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깨달음 그 자체도 공이라고 파악한다.
즉 대승불교에서는 미혹함도 깨달음도, 윤회도 해탈도 실체가 없는데,
다만 인간의 고통은 아뢰야식에 의해서 이미지화된 환영(幻影)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다고 하여 명상의 실천에 의해서 깨닫고
나아가 다른 사람의 구제를 지향할 것을 주장하였다.
[일승(一乘)과 삼승(三乘)]
성불에 이르는 보살의 길은 하나인가?
승(乘)이란 타고 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한다는 견지에서 그 구제하는 교법이 하나뿐이고,
또 절대 진실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일승이라면,
삼승으로 설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길을
셋으로 분별하여 설한다는 것이다.
삼승은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을 말하는데,
성문승(聲聞乘)이란
가장 원시적인 해석으로는 부처님의 음성을 들은 불제자를 말하지만,
대승의 입장에서 보면 부처님의 교법인 사성제와 팔정도를 닦아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교법을 말하며,
연각승(緣覺乘)이란
12연기를 잘 닦아 모든 법의 인연을 잘 아는 길인 벽지불(隻支佛 : 구역에서는 緣覺,
신역에서는 獨覺)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교법을 말한다.
그리고 보살승(菩薩乘)이란
성불하기를 이상 목적으로 삼는 보살들이 수행하는 육바라밀 등의 법문을 말한다.
대개 성문승과 연각승은 소승, 보살승은 대승에 해당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두 승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고 있는데,
소승은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으며,
대승은 생사와 열반을 분별해서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아라한이나 벽지불을 자처하면서,
모든 부처님이 오로지 보살만을 교화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는 불자가 아니며,
또 스스로 이르기를 구경열반을 얻었다고 하면서 무상정등정각을 다시 구하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설하셨다.
한편 『법화경』에서는 불교를 실천하는 데에는 삼승의 수행 방법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유일한 부처의 입장인 일불승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는 삼승이 한결같이 성불에 이르는 보살의 길임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일승 사상은 성문이나 독각의 수행자들도
미래에는 성불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대승과 소승, 또는 삼승으로 상징되는 사회의 분열과 반목, 대립을 해소하여
조화와 평등의 통일된 사회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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