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 - 제3절 불교 교리의 전개 - 2. 유식 (2)

문성식 2016. 11. 24.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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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가르침】
      제3절 불교 교리의 전개 2. 유식 (2)
        3) 모든 존재에 대한 3가지 조망 -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의 3성설 아비달마와 중관과 유식사상은 법(法 : 우리가 체험하는 현상의 구성요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승 교학서인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75가지 법들 하나하나가 모두 실체[自性]가 있다고 간주하는 반면, 중관학에서는 그런 모든 법들이 궁극적으로는 무자성(無自性)하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이런 법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자성이 있음을 조망하였다. 이런 세 가지 자성을 삼성(三性)이라고 하는데, 첫째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고, 둘째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며, 셋째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변계소집성이란 우리말로 ‘두루 분별된 자성’이라고 풀이되며, 의타기성은 ‘다른 것에 의존한 자성’, 원성실성은 ‘완전히 성취된 자성’으로 풀이된다. 그러면 이런 삼성의 의미를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서 설명해 보자. 누군가가 ‘긴 막대’가 실제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통해 그에게 원래 ‘긴 막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려 줄 수 있다. 긴 막대가 있다는 생각은 짧은 막대와의 대비를 통해 발생한 것이다. 더 긴 막대와 비교할 경우에는 동일한 막대가 짧은 막대가 된다. 따라서 어디서나 항상 긴 막대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설명을 통해 애초에 ‘긴 막대’가 실재한다고 착각했던 사람은 ‘긴 막대’란 것이 공하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실제 있다고 착각된 ‘긴 막대’는 ‘변계 소집된 것’이며, 다른 짧은 막대와의 비교를 통해 존재하게 되는 ‘긴 막대’는 ‘의타기한 것’이다. 그리고 길이란 이렇게 상대적인 것이기에 그 막대에 본래적 길이가 없다는 진실은 ‘원성실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살펴보면 중관학에서 논증하는 공성(空性)은 삼성 중 원성실성에 해당하고, 비판의 대상이 되는 갖가지 법들은 변계소집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중관학에서는 변계소집된 자성을 비판하며 원성실한 진제적 공만을 추구할 뿐이었는데, 유식학에서는 양자를 매개하는 것으로 모든 법들의 자성에 대한 의타기적 조망을 추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타기적 조망은 연기적 조망이다. 그리고 ‘아뢰야식’과 ‘갖가지 법들’의 연기적 관계에 의해 세상만사를 상세하게 해석하는 이론이 바로 유식학의 아뢰야연기론인 것이다. 4) 아뢰야연기론 - 두 가지 인과응보 그러면 이러한 아뢰야연기론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착한 행동이든, 악한 행동이든 우리가 짓는 모든 업들은 씨앗[種子]으로 아뢰야식에 저장되었다가, 성숙한 후 적정한 시기가 되면 다시 우리가 체험하는 길흉화복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자업 자득적인 인과응보이다. 그런데 유식학에서는 이 이외에 또 다른 인과응보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인지적(認知的) 성향이 겪게 되는 인과응보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은연중에 갖게 된 세계관과 자아관(自我觀)은 씨앗과 같은 상태로 아뢰야식 내에 저장되었다가, 미래 혹은 내생에도 우리로 하여금 그와 동일한 세계관과 자아관을 갖게 한다. 이는 우리의 인지(認知)에서 일어나는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과응보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업의 씨앗이 초래하는 인과응보와 자아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지의 씨앗이 야기하는 인과응보가 그것이다. 업의 씨앗은 문자 그대로 ‘업종자’라고 불리고, 세계관이나 자아관과 같은 인지의 씨앗은 우리의 언어적 능력과 관계되기에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 불린다. ‘전생에 남을 많이 해친 사람은 삼악도에 떨어져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남을 많이 도운 사람은 삼선취에 태어나 행복한 삶을 산다’는 말은 업종자와 관계되고, ‘전생에 이기적이었던 사람은 현생에도 이기적이다’라거나, ‘전생에 물을 무서워하던 사람은 현생에도 물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명언종자와 관계된다. 가치의 측면에서 볼 때 세상만사, 즉 만법은 선(善), 악(惡), 무기(無記)의 세 종류로 분류된다. 이 중 무기법은 선법도 악법도 아닌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업종자는 선인락과 악인고과(善因樂果 惡因苦果)의 인과응보를 발생케 하고 명언종자의 경우는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의 인과응보를 발생케 한다. 업종자의 경우 인(因)은 선악이나 과(果)는 무기성(無記性)인 육도(六道)의 고락이고, 명언종자의 경우 인도 선악이고 과도 선악이다. 그래서 업종자를 ‘이숙습기(異熟習氣 : 성질을 달리하여 익은 습기)’라고 부르고 명언종자를 ‘등류습기(等流習氣 : 같은 흐름을 갖는 습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습기란 아뢰야식에 훈습된 기운으로 종자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이숙습기와 등류습기는 아뢰야식 내에 형성된 후 우리가 짓는 갖가지 업의 기운을 받아 성숙해 가다가[因能變] 시기가 무르익으면 발현되어[果能變] 우리가 체험하는 주관[見分]과 객관[相分]의 세상만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5) 수행과 깨달음 유식학에서는 연기된 세계, 즉 의타기한 법들의 세계를 아뢰야식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한다. 그리고 그런 법들 중 번뇌에 해당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는 것이 유식학의 수행법이다. 번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자아에 대한 집착인 번뇌장(煩惱障)이고 다른 하나는 갖가지 법들에 자성이 있다고 집착하는 소지장(所知障)이다. 번뇌장은 정서적 장애, 소지장은 인지적 장애라고 풀이할 수 있다. 번뇌장과 소지장을 포괄하는 ‘근본 번뇌’에 해당하는 것은 ① 탐욕, ② 분노, ③ 어리석음, ④ 교만, ⑤ 불교에 대한 의심, ⑥ 몸이 있다고 생각하는 유신견(有身見), ⑦ 전생과 내생에 대해 갖가지로 생각하는 변집견(邊執見), ⑧ 인과응보를 부정하는 사견(邪見), ⑨ 잘못된 종교의식을 신봉하는 계금취견(戒禁取見), ⑩ 이런 세계관들을 의식화하여 집착하는 견취견(見取見)인데, 이런 10가지 근본번뇌는 5위100법 중 심소법에 속한다. 이런 번뇌들을 하나하나 제거함으로써 우리는 성불의 길로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성불을 위한 보살의 길을 크게 다섯 단계로 구분한다. 수행의 준비단계에 해당하는 자량위(資糧位), 주관과 객관이 각각 공함을 관찰하는 가행위(加行位), 만법유식을 체득하고 사성제를 관찰하는 통달위(通達位), 십지(十地) 수행에 들어가는 수습위(修習位), 그리고 보리와 열반을 얻어 성불하는 구경위(究竟位)가 그것이다. 이 중 자량위에서 시작하여 통달위를 마치기까지 1아승기겁(= 1무량겁)의 세월이 걸리고, 수습위의 십지 중 초지에서 제7지까지 이르는데 1아승기겁이 걸리며, 제8지에서 제10지까지 향상하는데 다시 1아승기겁이 걸린다. 자량위 이후 총 3아승기겁이라는 상상을 초월한 세월이 흘러야 보살도가 완성되어 성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불하게 되면 안식에서 아뢰야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총 8식은 모두 부처의 지혜로 바뀌는데, 이를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부른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의 전5식은 신구의(身口意)로 신통력을 보이는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제6의식은 변재(辯才)가 출중한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제7마나식은 자타평등의 대자비심을 발하는 평등성지(平等性智)로, 제8아뢰야식은 세상만사를 비추는 대원경지(大圓鏡智)로 전환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