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 - 제3절 불교 교리의 전개 - 1. 중관 - 3) 중관 논리

문성식 2016. 11. 2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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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가르침】
      제3절 불교 교리의 전개 1. 중관
        3) 중관 논리 ‘중관(中觀)’이란 용어는 『중론』에 대한 주석서인 길장(吉藏 : 549~623년)의 『중관론소(中觀論疏)』에서 나온 것으로 ‘중도적으로 관찰한다’ 또는 ‘중도적으로 분석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런데 중도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불고불락(不苦不樂)과 같이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적 수행관 모두를 비판하는 ‘실천적 중도’이고, 다른 하나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비유비무(非有非無)와 같은 ‘사상적 중도’이다. 중관 논리에서 ‘중도적으로 관찰한다’고 하는 것은 이 중 후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불생불멸, 불상부단 등의 경구에서 보듯이 여기서 말하는 중도는 ‘가운데의 길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생과 소멸, 상주와 단멸, 있음과 없음 등은 우리 생각의 양극단이다. 우리의 생각은 극단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있는 것을 부정하면 없는 줄 알고, 발생을 부정하면 소멸인 줄 알며, 상주함을 부정하면 단멸인 줄 안다. 이것이 소위 흑백논리이다. 흑을 부정하면 백인 줄 아는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 생각은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중관학에서는 흑과 백의 양극단 모두를 부정한다. 흑도 틀리고 백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흑과 백이 혼합된 회색이 옳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흑과 백이 모두 틀렸음을 알려 줄 뿐이다. 새롭게 알려 줄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삼론종의 길장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불렀다. 파사현정이란 잘못된 것을 파하는 행위 자체가 그대로 옳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중관학에서 말하는 중도의 진정한 뜻이다. 중도의 ‘중’자에는 이렇게 ‘양극단 모두 틀렸다’는 비판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텅 비어 있음’을 의미하는 ‘공’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중관학에서는 흑백 논리적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생각에서 모순을 지적해 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과거의 아비달마 교학에서 뿐만 아니라, ‘바람이 분다’거나 ‘비가 내린다’, ‘내가 살아 있다’는 등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에서도 논리적 모순은 발생한다. 왜냐하면 ‘일상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관학 논서가 난해한 이유는, 반논리(反論理)인 중관 논리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관 논서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난해하기 그지없는 아비달마 교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중관 논리의 난해한 교리들은 우리의 일상적 삶과 연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중관학의 견지에서 볼 때, 비단 아비달마 교학만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사유 전체가 모순에 빠져 있다. 아비달마 교학의 모순은 우리의 사유가 갖는 총론적 모순의 각론에 해당할 뿐이다. 중관적 방식, 중관 논리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사유, 우리의 생각은 논리적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논리적 사유란, 개념을 ‘설정’하고, 그렇게 설정된 개념들을 연결하여 ‘판단’을 만들고, 판단들을 모아 삼단논법과 같은 ‘추론식’을 작성함으로써 진행된다. 그러나 반논리학인 중관학에서는 공과 연기의 교설에 의거하여 개념의 실재성을 비판하고, 사구부정(四句否定)의 논리에 의해 모든 판단의 사실성을 비판하며, 상반된 추론을 제시함으로써 어떤 추론의 타당성을 비판한다. 결국 논리적으로 작동되는 우리의 사유 그 자체를 모두 비판한다. 그러면 이러한 비판 중 일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지금 우리 눈앞에 어떤 길이의 막대기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누군가가 이 막대기의 길이가 어떠하냐고 우리에게 물었을 때, 우리는 길다고 대답할 수도 있고 짧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이보다 짧은 막대를 염두에 두고, 비교했다면 ‘길다’고 대답할 것이고, 이보다 긴 막대를 염두에 두었다면 ‘짧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동일한 막대기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막대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에 따라 이렇게 그 대답이 달라진다. 이것이 연기와 공의 의미다. 긴 것이 있기 때문에 짧은 것이 있는 것이고, 짧은 것이 있기에 긴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막대의 길이는 원래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다. 이 막대의 길이는 공하다. ‘이 막대의 본래적 길이는 없다’는 것을 ‘이 막대의 길이에 자성이 없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길이, 모든 크기가 이와 마찬가지다. 작은방을 염두에 두면 이 방은 큰방이 되고, 더 큰방을 염두에 두면, 이 방은 작은방이 된다. 이 방의 원래 크기는 공하다. 잘 생김과 못 생김, 부유함과 가난함, 현명함과 어리석음 등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동일한 사람이 상황에 따라 이쪽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저쪽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상대적인 개념들을 예로 들어 공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마치 수학문제에서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가 있듯이,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할 때 그 모든 것들 중에는 공함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이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반야심경』에서는 ‘눈도 없고, 그 대상인 색도 없다’고 설하는데, 『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해명한다. ‘눈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마치 칼날로 칼날 자체를 자르지 못하듯이, 나의 눈으로 나의 눈 그 자체를 볼 수는 없다. 불은 뜨거운 것이 그 본성이고, 물은 축축한 것이 본성이듯이 눈은 ‘보는 힘’을 본성으로 갖는다. 혹자는 거울에 비추어 보면 자신의 눈을 볼 수 있다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거울에 비친 눈은 ‘대상세계인 색[色境]’의 일부이지, ‘보는 힘[能見性]’을 갖는 것이 아니기에 진정한 눈이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스스로 보려 하든, 거울에 비추어 보든 나의 눈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눈이 없다는 것이다. 또 이렇게 눈[能見]이 없기에 그 대상[所見]인 색도 있을 수 없다. 마치 짧은 것을 염두에 두어야 긴 것이라는 의미가 발생하듯이, 눈을 염두에 두어야 눈에 비친 대상이라는 생각이 발생하게 되는데, 눈이 없다면 그 대상도 있을 수 없다. 또 눈[能見인 眼根]도 없고 대상[所見인 色境]도 없다면, 그 양자의 관계인 봄[眼識]도 있을 수가 없다. 위에 인용한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라는 반문은 이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