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 - 제3절 불교 교리의 전개 - 1. 중관 - 4) 공의 자가당착과 이제설

문성식 2016. 11. 2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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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가르침】
      제3절 불교 교리의 전개 1. 중관
        4) 공의 자가당착과 이제설 중관학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일체의 존재는 물론이고 일체의 판단, 일체의 사유를 모두 비판한다. 그러나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아비달마 교학에서 논리적 모순을 지적해 내는 중관학이지만, 아비달마 교학의 효용성조차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관학에서는 아비달마 교학을 대하는 실재론적 태도가 범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할 뿐이다. 『대지도론』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보살은 모든 존재가 사연(四緣)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관찰하여 알지만 사연이 확고히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 … 반야바라밀에서는 다만 사견(邪見)을 제거하는 것이지 사연을 파하는 것은 아니다.’ 아비달마 교학 역시 부처님의 교설을 담고 있는 훌륭한 뗏목인 것이다. 뗏목이 없다면 우리는 강을 건널 수조차 없다. 그리고 중관학에서 ‘언어와 생각에 의해 구성된 모든 것은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는 점을 가르치긴 하지만, 중관학 역시 ‘언어와 생각’을 이용하여 공을 논증하기에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회쟁론』의 적대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만일 모든 것이 공하다면 모든 것이 공하다는 그 말도 공할 테니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 다시 말해 ‘모든 이론이 다 틀렸다’고 할 경우 ‘모든 이론이 다 틀렸다’는 말도 ‘이론’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역시 ‘틀린 것’이어야 한다는 식의 지적이다. 용수는 이에 대해서도 깔끔하게 해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깨끗한 벽에 ‘낙서금지’라는 말을 쓸 경우 그 말도 낙서에 속하기에 자가당착에 빠진다. 그러나 누군가가 먼저 벽에 낙서를 해 놓았을 때, 그 위에 ‘낙서금지’라는 말을 쓸 경우에는 그 ‘낙서금지’라는 말 역시 낙서이기에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말이긴 하지만, 앞으로의 다른 낙서를 금지시켜 주는 효용이 있다. 다른 모든 불교 교리가 그러하듯이 중관학 역시 응병여약(應病興藥)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중론』의 적대자는 ‘모든 것이 공하다’고 주장할 경우 사성제도 부정하고 삼보도 부정하게 된다고 말하며 공의 교리의 부당성을 지적한다. 사실 ‘모든 것이 공하다’면 계율도 공하기에 계율을 지킬 필요도 없고, 보시도 공하기에 남에게 베풀 필요도 없고, 사성제도 없고, 삼보도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용수는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라는 이제설(二諦說)을 제시하며 이를 비판하고 있다. 진제란 깨달음에 관한 진리로 구극의 진실을 말하며 속제는 세속사람의 아는 바 도리를 일컫는다. 즉 계율을 지키고, 남에게 베풀고, 사성제를 관찰하고, 삼보를 공경하라는 것이 속제적 교설이라면, 그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진제적 교설이다. 따라서 진제와 속제를 균등하게 실천해야 진정한 불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속제를 모르고 진제만 추구할 경우 가치판단이 상실되는 공견에 빠져 막행 막식하는 폐인이 되기 쉽고, 진제를 모르고 속제만 추구할 경우 기껏해야 하늘나라에 태어날 뿐 결코 해탈할 수 없다. 『중론』에서는 이러한 공견의 위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온갖 사견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공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일 공이 있다는 견해를 다시 갖는 자가 있다면, 어떤 부처님께서도 그런 자를 구제하지 못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