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1881호 서울 창의문(彰義門)
종목 | 보물 제188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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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 1-1번지 등 4필지 |
지정일 | 2015.12.02 |
수량 | 1동(정면 3칸, 측면 2칸 )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서울특별시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지리설에서 이 문을 열어놓으면 궁궐과 왕조에게 액을 불러온다는 미신으로 풍수학자 최양선이 건의하여 폐쇄하였다. 때때로 임시 개방을 하기도 하였는데, 예로 1422년(세종 4년)에 도성을 정비하는 일을 원활히 하고자 창의문과 숙정문을 연 일이 있다. 이후 한동안 열어 두던 창의문은 1446년(세종 28년) 4월에 닫혔다. 1469년(예종 1년) 3월에도 문을 닫으라는 명이 있었다. 1623년(광해군 14년)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과 창의문을 통과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영조 때에는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의 청으로 창의문을 개수하기로 하여, 1741년(영조 17년) 6월 16일 문루를 설치하였다. 보물 제1881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건물이다. 서울 성곽의 4소문(四小門) 가운데 하나로 일명 ‘자하문(紫霞門)’이라고 한다.
1396년(태조 5)에 도성 8문의 하나로 창건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이후로는 폐쇄되어 일반적인 출입은 금지되었고 다만 왕명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통행을 허가하였다. 창의문이 경복궁을 내리누르는 위치에 있다는 풍수지리설적 해석 때문에, 문은 세웠으나 수백년간 사용하지 않았고 국가적인 공역(工役)을 수행할 때처럼 긴요한 경우에 한하여 성문을 열었다. 현재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956년에 이 문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墨書)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741년 6월 16일에 상량(上樑)을 하였다고 적혀 있어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건물의 건축적 성격을 보면 숭례문이나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석축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작은 규모로 쌓고 그 위에 세운 단층 문루이다. 가구(架構) 방식은 평주(平柱)의 주두(柱頭) 위에 바로 대들보를 얹고 이 위에 다시 화반형(華盤形) 부재를 놓아 마룻보와 중도리의 짜임을 받쳤다. 마룻보 위에는 사다리꼴에 가까운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뜬창방·장여·도리로 짜여진 마룻도리를 받고 있다. 천장은 서까래를 모두 노출시킨 연등천장[椽背天障]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 물매는 가파르지 않다. 마루마다 회반죽을 바르고 취두[鷲頭 : 매 머리모양의 장식]·용두(龍頭)·잡상(雜像)을 배열하고 추녀 끝의 사래[蛇羅]에는 토수(吐首 : 龍頭나 鬼頭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현재 문 서쪽으로 도로가 나 있어 통행로로 이용되고 있으므로 이 문은 여전히 닫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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