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궁궐,왕릉 이야기

왕릉이야기. 추존 원종-장릉

문성식 2010. 8. 26. 20:46

 

  추존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 - 장릉(章陵)

 

 

장릉 -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김포읍 풍무리 산 141-1
사 적 : 제 202 호

章陵의 특징
 제16대 인조(仁祖)의 아버지인 추존(追尊)된 元宗(이부:{定遠君} ;1580-1619)과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具氏 ; 1578-1626)의 章陵은 사후에 추숭(追崇)된 능이기에 쌍분(雙墳)의 형식으로 다소 소략하면서도 위풍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의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은 생략했으나 봉분 밑 부분에 얕은 보호석(保護石)을 두르고 있어 대원군(大院君)의 묘제(墓制)가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원종은 광해군대(光海君代)에 승하했는데, 인조 즉위후 대원군(大院君)으로 추숭되어 현재 위치에 흥경원(興慶園)으로 조성되었다가 인조 10년(1632년)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어 인헌왕후릉(仁獻王后陵)과 함께 장릉(章陵)으로 능호(陵號)를 정하고 개수(改修)를 한 것입니다. 1637년(인조 5년)에는 능원에 불이 났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주변의 금정사(金井寺)는 장릉의 원찰(願刹)로 자리잡아 오고 있습니다.

 추존의 약사(略史)
 선조(宣祖)의  후궁들 중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소생에는 4명의 군(君)이 있었는데, 셋째 정원군(定遠君)이 인조(仁祖)의 아버지로 후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됩니다.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기도 했던 정원군은 자신의 세 아들 중 능창군(綾昌君)을 신경희 등이 왕위에 추대하려던 일이 수포로 돌아가{1615년(광해군 7년)} 능창군이 유배되어 사사(賜死)되는 일을 겪는 등 불우한 일생을 보내다가 1619년 40세의 나이로 승하해 양주군에 안장되었습니다.
 3년 뒤 인조가 즉위한 후 대원군으로 추존되고 다시 원종(元宗)으로 추존되고 시호를 공량(恭良)이라 하여 장릉(章陵)으로 천장해 왕릉의 규모로 자리잡게 됩니다.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具氏)는 좌찬성(左贊成)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태어나 3남{인조, 능원(綾原),능창(綾昌)군}을 두었으나 남편의 생존시에는 자식의 죽음을 보는 등 불우하게 지내다가 인조의 즉위를 말년에 보면서 기쁨을 찾아 부부인(府夫人)에 진봉되고 인조 10년{1623년)에 원종(元宗) 추존과 함께 왕후로 추봉되었으나 역시 4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정원군(定遠君)과 함께 추존되어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시호를 받게 됩니다.

 선조(宣祖)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이 너무 늦게 탄생한 것이 권력의 혼란을 야기시킨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광해군대의 역사는 내적 모순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한 필요불가결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처 :문화 사랑 오솔길 원문보기   글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