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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절이 사람을 만든다
주말이 아니라도 도시의 시외버스 정류장은 항상 붐비고 있다.
사람의 수가 늘고 생활이 다양해짐에 따라 유동 인구도 많아진다.
사람과 짐으로 혼잡을 이루면서도
이제는 조금씩 질서가 잡혀가는 걸 보면 흐뭇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서로 먼저 자리를 잡겠다고 앞을 다투기가 일쑤였는데,
요즘에는 어디를 가보아도
묵묵히 줄을 서서 차례대로 오르내린다.
그런데 이따금 우리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파렴치한 얌채들이 있어
공중 질서가 채 굳어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얼마 전 공주에서 부여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목격한 일이다.
다들 줄을 지어 차례대로 승차를 하고 있는데,
뒤늦게 온 한 사람은 무슨 묘기라도 보이듯
버젓이 창문으로 기어 올라가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아무도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짓은 1950년대에나 있었던 ‘묘기’가 아닌가.
씁쓸하고 불쾌한 풍경이었다.
서울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서는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려면
쇠파이프로 울타리를 친 긴 통로를 거쳐야 한다.
아마 새치기의 혼란을 막기 위한 배려에서였으리라.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대개가 무거운 짐이 있게 마련이다.
짐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는 연약한 부녀자와 노인들 틈을 비집고,
한 사내가 무슨 급한 볼일이라도 있다는 듯이
앞으로 앞으로 밀치고 가더니 먼저 차를 잡는다.
그 뻔뻔스런 40대의 사내 녀석을 보고
저게 바로 우리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회악의 암세포로구나 싶었다.
협동이란 함께 있고 같이 움직이는 질서요, 예절이다.
그러한 감정 속에는 자기 하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관념이나 고집이 있을 수 없다.
함께 있고 움직이는 그 속에서
사람과 사람은 서로 믿고 굳게 맺어질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이고 질서이며 예절인지
스스로 터득하는 노력이 없다면
겉으로는 잘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짐승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시외버스에는 차마다 금연석이 있고,
어떤 열차에는 금연칸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지난 가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새마을호 열차를 탈 때
금연칸이 있는 줄 비로소 알고 표를 사면서
아예 금연칸을 배정받았다.
그 칸은 나처럼 담배 연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만 탄 모양으로,
주로 어린이를 동반한 부녀자들과
몇 사람의 외국인도 섞여 있었다.
맑고 쾌적한 실내 분위기속에서
모처럼 여행의 즐거움이 부풀어 올랐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창 밖에 눈을 주고
나직이 휘파람으로 노래하는 한 아가씨를 건너다보고
나는 그녀에게 귤을 사주고 싶도록 천연스러워졌다.
대전을 지나서였다.
웬 담배 연기 냄샌가 해서 바라보니,
몇 자리 앞좌석에서 한 사내가 뻔뻔스럽게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저 녀석 보게, 금연칸에서 담배를 피우다니?
못된 녀석이네.
피우려거든 금연칸 아닌 데에 가서나 피울 일이지.’ 하고
혼자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바로 그 뒷자리에 앉은 여인이
먼저 시작하는 사람을 기다렸다는 듯이
버젓이 담배를 꼬나물고 연기를 내뿜었다.
지나가는 승무원이 제지했지만
그들은 그때뿐, 부산까지 마음 놓고 피워댔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문제가 있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
남들도 하는데 나는 왜 못 해?
나만 바보가 되라고?
자기 질서가 없으면 이런 논리에 휘말리게 된다.
자기 나름의 질서와 생활규범이 없으면 정당치 못한 일임에도
둘레의 분위기에 동화되고 마는 것이 범속한 일상인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한 승리자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한 개인의 일에 국한된 문제라면
누가 담배를 피우건 고함을 치건 참견할 바 아니지만,
이웃에 피해를 끼치게 되니 모른 체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호흡하는 공기를
더럽히는 것은 분명히 공중(公衆)의 적이요,
사회악이 아닐 수 없다.
예절은 아름다운 인간 행위의 표현이다.
예절을 익히려면 항시 함께 사는 이웃을
의식하고 인내와 극기를 길러야 한다.
우리 사회의 공중도덕은 많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중음식점 같은 데서는 어서 가져오지 않느냐고
고함을 쳐대는 아귀다툼을 보게 되고,
시골 버스 정류장의 공중변소는 너무도 한심스럽다.
정말 바깥사람들이 볼까 무섭다.
이것이 우리들의 현재 생활수준이고 공중 질서란 말인가.
다들 위대한 것만을 좋아하는 요즘은
시골읍 같은 데도 곧잘 아치 간판에
위대한 무슨 고을이라고 과시하는 데가 많다.
그러나 막상 그 위대한 고을의 공중 장소에 가서 보면
위대하다는 뜻이 무엇을 가리킴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 시대는 언어마저 혼란이 너무 심하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절대다수 서민 계층에서는
공중목욕탕을 이용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질서와 예절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곁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아랑곳없이
비눗물을 끼얹어 튀기는가 하면,
바닥에 벌렁 나자빠져 볼썽사나운 꼴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은 홀로 사는 게 아니라 수많은 이웃들과 함께 산다.
함께 살면서 서로가 배우고 고치고 익히는 동안 조금씩 성숙해간다.
성숙한 사람만이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약수터의 풍습을 보기로 하자.
대도시 사람들은 땅에서 나오는 물은 모두가 약수인줄 안다.
그만큼 수돗물은 이제 믿을 수 없도록 오염되어 있다는 소식이다.
그래서 이른 아침이면 우물가마다 장사진을 치고 있다.
마시고 조금씩 떠가는 거야 어쩌랴만,
어떤 사람들은 커다란 물통을 서너 개씩 가지고 와서
남의 사정은 무시한 채 혼자서만 탐욕스럽게 가득가득 채워간다.
기다리다 지쳐 물 한 모금 마셔보지도 못하고
맨입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서울 강남 봉은사 판전(版殿) 아래 우물에서는
아침마다 이런 풍경이 재현되고 있었다.
제대로 괼 여유도 주지 않고
박박 퍼내가는 우물을 보고 있으면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자기만을 알거나 자기 개인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더 물을 것도 없이 불행하다.
그들의 가슴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와 남 사이에 장벽이 없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꽃향기처럼 배어나온다.
사람은 이웃으로 향한 따뜻한 눈길과 손길에 의해서만
자아의 굴레에서 놓여 날 수 있다.
마음과 전 존재를 내주면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람이 된다.
이런 마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든다.
아무리 국민 소득이 늘고 교육열이 왕성하고
국제 경기에서 메달을 무더기로 쓸어온다 할지라도
인간의 아름다운 덕성인
예절과 공중 질서가 몸에 배지 않는다면
우리 겨레의 인간적인 자질과 품성은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 자신이 예절과 질서를 만들기도 하지만,
또한 그 예절과 질서가 우리를 만들어간다.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예절과 질서가 지켜질 때
우리도 명(名)과 실(實)이 상부한 문화 국민임을 자부할 수 있다.
위대하고 뛰어난 것은 정치인들의 연설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인간적인 양식과
품위 있는 행위에 달린 것임을 다 같이 기억해둬야 할 것 같다. 1982
-『산방한담』中에서-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12년 07월-
ㅡ 법정 스님 <산방한담(山房閑談)> 중에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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