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정스님 어록

산방한담(山房閑談) / 자연인이 되어 보라

문성식 2016. 9. 22. 14:30

 
      자연인이 되어 보라 요 며칠 동안 겨울비가 촉촉이 내렸다. 오랜 가뭄으로 땅이 메마르고 숲 속의 나무들도 까칠해 있었는데, 이번에 내린 비로 땅에 물기가 스미고 나무들도 생기를 찾았다. 오랜만에 비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뻑뻑했던 내 속 뜰도 촉촉이 젖어드는 것 같았다. 끼니를 챙기기 위해 부엌에 들어가서도 전에 없이 휘파람이 새어 나오고 콧노래가 저절로 흥얼거려지려고 한다. 자연의 은혜란 이렇듯 우리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고 윤기를 보내준다. 알맞게 내린 비와 앞산에 서리는 안개에 댓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메마른 대지와 수목만을 적셔주는 게 아니라, 황량하고 거칠어진 사람의 마음까지도 촉촉하게 젖게 해주는 것이다. 어제는 뜰 구석구석에 널려 있던 가랑잎들을 갈퀴로 긁고 주워냈다. 얼어붙었던 낙엽이 볼썽사납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이번에 내린 비로 흙이 녹는 바람에 청소를 할 수 있었다. 오늘은 비를 들고 뜰을 한바탕 말끔히 쓸었다. 물기가 배어 있는 땅을 싸리비로 쓸고 있으니 내 마음이 지극히 평온하고 정결해지는 것 같았다. 비와 걸레를 들고 하는 청소란 단순히 뜰에 쌓인 티끌이나 방바닥과 마룻장에 낀 때만을 쓸고 닦아내는 일만은 아니다. 쓸고 닦아내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 마음속에 묻어 있는 티끌과 얼룩도 함께 쓸리고 닦이는 데에 청소의 또 다른 의미와 묘리가 있을 법하다. 이런 청소의 의미와 묘리를 생활에 여유가 있는 일부 도시 사람들은 스스로 포기를 하고 있다. 바쁘다는 이유로 혹은 일손이 달린다고 해서 (사실은 게으른 변명이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 세척을 청소부나 가정부에게 떠맡기고 있다. 청소부나 가정부의 어려운 생활을 돕는다는 뜻에서는 좋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분들은 어디까지나 생활수단으로서 시간당 얼마를 받는다는 조건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지 삶 그 자체의 의미와 묘리 쪽은 아니다. 그러니 그분들에게는 그분들에게 알맞은 일거리를 주어야 한다. 자신이나 가족들이 쓰는 방의 청소까지 타인의 손을 빈다는 것은 한번 생각해 볼일이 아닌가. 또 그 청소를 주부들만이 전담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자신의 생활환경은 자신의 손으로 정리정돈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기품이 삶의 질서가 되어야 한다. 내 자신이 배가 고픈데 누가 대신 음식을 먹어준다고 해서 내 배가 부를 수 있겠는가. 내 목마름은 내 발로 걸어가 물을 떠서 마실 때 해소된다. 내 몸소 우물가나 수도 쪽에 가지 않고 남을 시켜 물을 가져오게 한다면, 그 목마름은 잠시 다스려질 뿐 원천적으로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 (중략) … 아무리 바쁘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 살지라도 때로는 되돌아보며 사람의 일을 살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또 어떻게 사는 것이 보다 인간적인 삶인지를 가끔은 헤아려보아야 한다. 내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맞은 쪽의 처지에 내 자신의 삶을 비쳐볼 수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저마다 자기들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날씨가 물론 이대로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봄이 오기까지는 몇 차례의 모진 추위가 또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요 며칠 동안의 푸근하고 촉촉한 날씨는 한겨울 속에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새해에는 이번에 내린 겨울 속의 비처럼 메마르고 황량한 인간의 대지를 촉촉하고 부드럽게 적셔주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또한 정치와 경제, 그리고 각 분야의 담당자들이 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뜰에 비질을 하다가 허리를 펴고 앞산을 보니 엊그제처럼 오늘도 달무리 같은 안개가 산마루에 서려 있다. 숲에서는 꿩이 홰를 치며 운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다람쥐도 날씨가 풀려서인지 뽀르르 돌담 위로 뛰어간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함께 살아간다. <「텅빈 충만」중에서>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10년 12월- ㅡ 법정 스님 <산방한담(山房閑談)> 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