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도(佩刀)에 대한 문헌자료(文獻資料)는 장덕필씨(張德必氏)가 보관(保管)하고 있는 추원록(追遠錄)에 수록(收錄)된 내용(內容)중에 본조(本朝) 어재안양공록권문(御財安襄公錄卷文)에 의하면 일등(一等)으로부터 삼등공신(三等功臣)의 명단(名單)과 간단한 약력(略歷)을 밝히고 부구물(附舊物)로는 진사시백패(進士試白牌)-로 주문(註文)에 의하면 생원백패견실부전(生員白牌見失不傳)이라 하였으며 홍패(紅牌) 은배(銀盃)-패도(佩刀)-이라 하고 주문(註文)에 도병장순금룡두도실중죽피칙량두상골중앙사처이은조결속방삽은첨자기말량복(刀柄粧純金龍頭刀室中竹皮則兩頭象骨中央四處以銀條結束傍삽銀添刺其末兩服)이라 하였으며 이상사건재가묘(以上四件在家廟)라 하였다.

또한 옥적일(玉笛一) 앵무배일쌍(鸚鵡杯一雙) 화일(和一) 이상삼건재외예손예천권봉의가(以上三件在外裔孫醴泉權鳳儀家), 어사사율일질재외예손풍기남명복가(御賜社律一帙在外裔孫豊基南明復家) 화상화계가묘봉안(畵傷花溪家廟奉安)이라 하였다.

이상(以上)과 같이 어사(御賜)된 유품(遺品) 중 종가묘(宗家廟)에 현존물(現存物)은 패도(佩刀)가 있으며 은배(銀盃)는 한국전란(韓國戰亂)을 전후(前後)하여 도란(盜亂)을 당하였다고 한다.

실(實)은 전란시(戰亂時) 현존(現存)하는 패도(佩刀)도 함께 분실(紛失)당하였으나 수년전(數年前) 장덕필씨(張德必氏)의 선친(先親)께서 현몽(現夢)에 의하여 모정(茅亭)안 땅속에서 찾아내게 되었다고 한다.

패도(佩刀)는 오랜 세월(歲月) 지하(地下)에 매몰(埋沒)되었던 관계로 패도(佩刀)의 도실일부(刀室一部)가 부식(腐蝕)되어 당초(當初)의 모습을 약간(若干) 잊고 있다.

추원록(追遠錄)에 밝힌 바와 같이 파수(把手)는 호화찬란(豪華燦爛)한 두문장식(頭紋裝飾)에 표면(表面)에는 금(金)을 도금(鍍金)하였다.

파수두(把手頭)에는 용구(龍口)를 마련하였으며 조각(彫刻)은 용(龍)의 수각(首角)을 비롯하여 휘화찬란(揮華燦爛)한 모발문(毛髮紋)과 비늘 등을 묘사하였다.

도실재료(刀室材料)는 죽피(竹皮)로 하였으며 실두(室頭)에는 상아재(象牙材)로 장식(裝飾)하였는데 도실(刀室)과 두(頭)를 고정(固定)시키기 위하여 은사(銀絲)로서 오개처(五個處)로 구분(區分)하여 결속(結束)하였는데 상아(象牙)를 결속(結束)한 은사(銀絲)는 삼조(三條)로 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이조(二條)씩으로 결속(結束)하였다.

은사(銀絲)로 결속(結束)한 도실(刀室)의 신상(身上)에는 도봉환(刀封環)을 마련하고 결속(結束)을 고정(固定)시키기 위하여 실두(室頭)로부터 실미(室尾)에 이르도록 길게 결속장식(結束裝飾)을 하고 있다.

죽피(竹皮)의 도실(刀室)은 현재(現在) 표면(表面)과 미단부분(尾端部分)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부식(腐蝕)당하여 있는데 특히 말단부분(末端部分)은 거의 손실(損失)되어 있는 실정(實情)이다.

비록 도실(刀室)의 표면(表面)이 손상(損傷)을 당(當)하였다 하나 일부(一部) 금속제품(金屬製品)을 그대로 남기고 있어 도실(刀室)의 모습은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資料)가 될 수 있으며 특(特)히 세조조(世祖朝)의 왕실(王室) 및 귀족공예(貴族工藝)에 속(屬)하는 유품(遺品)이라는데 주목(注目)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