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송 병 선(宋秉璿, 1836. 8. 24 ~ 1905. 12. 30)

문성식 2015. 8. 31. 23:39

송병선 대쪽처럼 곧은 조선의 선비, 목숨 걸고 올린 구국의 상소 

“오늘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게 되고 백성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일제가 만일 기필코 제멋대로 무례하게 군다면 300개의 고을 안에 어찌 얼굴에 피 칠을 하고 닥치는 난을 막을 사람이 없겠습니까.”- 선생의 을사조약 파기 상소 중에서

대학자 송시열의 후손, 집안 어른들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위정척사의 사상을 가지게 돼

송병선 이미지 1

송 병 선(宋秉璿, 1836. 8. 24 ~ 1905. 12. 30) 선생은 조선이 근대로 이양되는 과도기에 태어나 봉건 질서의 붕괴와 외세의 침략을 목도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국가를 되살리기 위한 성리학자로서의 고민과 갈등, 그리고 행동양상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선생은 충남 회덕(懷德)의 석남(현재의 대전광역시 대덕구)에서 태어났다. 호는 연재(淵齋).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선대 가운데는 조선 성리학계에 두드러지는 인물들이 있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인물은 선생의 9대조인 송시열(宋時烈)이다.

 

송시열의 주요한 사상적 특징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의리정신(義理精神)으로, 이는 9대손인 선생에게도 가학적 전통으로 계승되었고, 이러한 가학의 전통은 국망의 위기 속에서 선생이 국권회복의 기치를 올릴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가학의 전통은 권상하(權尙夏)와 한원진(韓元震)을 거쳐 송능상(宋能相)·송환기(宋煥箕)·송치규(宋穉圭)·송달수(宋達洙)·송근수(宋近洙) 등의 후손들을 통해 기호학맥으로 이어졌다. 송병선 선생의 학통 전승을 열거하면 이렇다.

 

송시열 _ 권상하 _ 한원진 _ 송능상 _ 송환기·김정묵 _ 송치규 _ 송달수·송근수 _ 송병선·송병순

선생은 9세 때부터 백부 송달수에게 ≪소학≫을 배우고, 숙부 송근수 밑에서 수학하였다. 송달수(1808~1858)는 조선후기 성리학계를 이분하였던 호락(湖洛)논쟁을 떠나 성리학자들이 스스로 본연의 연구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면서, 순수 학문적 자세를 주장한 인물이었다. 또한 송근수(1818~1903)는 1882년 좌의정 재임 시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교섭에 반대하여 사직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였다. 나아가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발표되자 ‘전통질서 중의 하나인 복제(服制)를 함부로 바꿀 수 없음’을 역설하면서 위정척사의 정신을 구현한 인물이다. 순수 학문적 자세와 척사적 성향을 지닌 사승(師承)관계를 통하여 선생 역시 성리학 본연의 학문자세와 외세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견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송시열대로부터 이어지는 이러한 가계와 학통으로 말미암아 선생은 19세기 말 외세 위협의 대외적 위기 속에서 유학자로서 행동해야 할 바를 진지하게 고민하였고, 그 고민의 결과는 위정척사사상으로 나타난다.

“강화도조약은 나라가 무너지는 시발점” “나라 위태롭게 하는 것을 ‘척사’해야,” 수십 차례 상소

선생은 송달수와 송근수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양하면서 이상수(李象秀)․박성양(朴性陽)․정해필(鄭海弼)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당시 혼란스러운 조국의 운명을 고민하면서 서로 간에 사상적 무장을 독려하면서 수학하였다. 이 가운데 송달수 문하인 이상수(1820~1882)는 민씨 정권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한편, 몇 차례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도(道)가 아니면 처(處)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관직에 오르지 않았던 인물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선생과 교유하면서 서로 간에 논의했던 ‘척사의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박성양(1809~1890) 또한 송근수의 천거로 관직에 들어서 사헌부지평․호조참의․동부승지․호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문물의 유입이 가져올 폐해를 경계하면서 외세의 침입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하여 <생육신사적고(生六臣事蹟考)>와 <국조칠선생찬(國朝七先生贊)>, <강문팔사찬(江門八士贊)>, <생육신찬(生六臣贊)>> 등의 논설을 통해 의리사상 및 성리학의 도통계승을 역설하였다. 정해필(1831~1887) 역시 송달수 문하에 출입한 인물로 선생에게 ‘중용(中庸)의 연천지의(淵泉之義)’로써 학문을 격려하여 ‘연재(淵齋)’라는 호를 추천한 인물이다.

송병선 선생의 상소문(1877)

이러한 인물들과의 교유는 자연스럽게 서로 간에 사상적인 교감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어떻게 위기를 극복해야 할 지 하는 고민에 대한 결과로 선생이 위정척사사상을 형성하는 데에 도움을 받은 것으로 파악된다. 그 사상적 의지가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은 1865년 5월 만동묘(萬東廟)가 철폐되면서이다. 선생은 만동묘가 철폐되자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의 간행작업을 시작하였다. ≪송자대전수차≫는 송시열의 ≪송자대전(宋子大全)≫ 가운데 난해한 구절을 뽑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쓴 것이다. 그런데 만동묘 철폐의 시점에서 이러한 작업을 시작한 선생의 의도는 바로 송시열의 ‘의리론’을 계승하고, 대중으로 확산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나아가 이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여 국내정세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어 선생은 우리나라의 역사사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 사료는 ≪동감강목(東鑑綱目)≫의 기초 자료로서, ≪춘추≫와 ≪통감강목≫에서 제시된 의리사관을 정립하여 역사의식을 체계화하고, 국가의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즉 선생은 유림의 상징인 만동묘 철폐에 대한 상대적인 반응으로 성리학적 가치를 지켜나가고자 하는 위정의식을 표출하였고, 그 행동양상이 ≪송자대전수차≫ 작업을 통한 의리론 확산과 ≪동감강목≫ 편찬을 통한 역사의식 확립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선생의 초기 척사의식은 <벽사설(闢邪說)>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선생은 ‘정(正)’의 대상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의 기본질서이며, ‘사(邪)’의 대상은 양묵(楊黙)의 학을 비롯한 불교와 천주교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천주교의 교리 가운데 예수를 하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에 대해 인륜을 끊는 행위이며, 제사를 금지하는 것에 대해 영혼을 믿지 못하여 스스로 오류에 빠지는 일이라고 하여 천주교 및 서양세력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주자가 엮은 ≪근사록(近思錄)≫과 같이 조광조․이황․이이․김장생․송시열 다섯 학자의 학설과 유훈을 채록한 ≪근사속록(近思續錄)≫에서 보다 잘 나타난다. 선생은 “다섯 선생의 글을 읽고 큰 뜻을 품어 오랫동안 천여 조의 글을 모아 … 한 책을 만드니 무릇 진실을 구하고, 힘을 쓰고, 자기를 처신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道)에 미칠 것이며 이단(異端)을 판별하여 성현(聖賢)의 일을 볼 것이다”라고 하여, ‘척사’(이단을 판별)를 통해 ‘위정’(성현의 일)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강화도조약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며, 결국에는 조선의 망국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위정척사의 대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선생은 초기 위정과 척사의 대상을 성리학적 유교질서와 이단으로 한정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르면 척사의 대상은 나라의 위기를 초래하는 일체의 외부 세력, 위정의 대상은 유교질서 나아가 국가·조국으로 구체화하였다. 나아가 이제 외세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는 군사력 양성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고, 이를 통해 국권을 수호해야 함을 통찰한 것이다.

 

선생은 이러한 사상과 논리를 국정운영에 반영하기 위하여 행동에 돌입하였다. 여론을 규합하고 정권을 상대로 적극적인 타결책을 제시하며, 현실로 다가온 국망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문인들을 규합하고, 수십 차례의 상소를 통해 외세로부터 국가를 보존할 수 있는 보다 강력하고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주창하였다.

각지 돌며 우국 강연. 143명의 사우들과 1,100여 명의 문인들을 규합, 결국 항일의 길로 나가

선생은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고자 우선 동지들을 규합하고 사상적 무장을 확대하고자 제자를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선생이 선택한 방법론은 유림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조선을 사상적으로 지탱해 온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전파하고, 정신적 무장을 강조하면서 진취적인 기상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그 실천으로 선생은 1867년 옥천 이지당(二止堂)에서의 강회활동을 시작으로 기국정(杞菊亭, 1889.8), 영산의 풍천당(楓川堂, 1893.4), 금산의 용강서당(龍江書堂, 1898.9), 임피의 낙영당(樂英堂, 1901.4), 고암서당(考巖書堂, 1905.3) 등지에서 강회를 개최하고, 서천의 풍옥헌(風玉軒, 1901.4), 성주의 노강(老江, 1901.9) 등지에서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였다. 이밖에 영동의 빙옥정(冰玉亭)에서 강론하였고(1891.4), 그해 7월 무주 구천동에 서벽정(棲碧亭)을 중건하여 매년 봄․가을로 선비들을 모아 강학(講學)하였다. 이러한 명망에 무주군수 조병유(趙秉瑜)는 인근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선생에게 강론을 청하기도 하였으며(1897.4), 경남 거창의 병산서재(屛山書齋, 1901.9), 경상도 지례의 세심대(洗心臺, 1904.7) 등지에서도 활발한 강론활동을 펼쳤다.

 

특히 전북 임피 낙영당에서의 강회 때에는 화서학파의 거두이자 태인의병을 이끌었던 최익현(崔益鉉)이 참석하여 선생의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하였고, 이외에 임피향약(1891.4), 회덕향약(1905.5) 등 향약을 통해 지역사회의 결집을 주도하였다. 선생은 1867년 옥천 이지당에서의 강회활동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충청지역은 물론 전라, 경상도 등지에서 유림들과의 접촉을 통해 위정척사운동의 여론 확산을 도모하면서 문인들을 규합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그 결과 선생은 143명의 사우들과 1,100여 명의 문인들을 규합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전국규모의 문인분포는 선생의 영향력이 일부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교지(1884). 송병선 선생을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겸 성균관 제주(祭酒) 시강원찬선(侍講院贊善) 경연관(經筵官)으로 임명한다는 내용

 

대개 유학자는 거주지 또는 출생지를 중심으로 문인들이 형성되었지만, 선생의 경우에는 전국에 걸쳐 문인들이 다수 분포하는 현상을 보였다. 이처럼 선생이 전국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하였던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인력보급과 국권회복의 토대마련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전국 각지에서 정기연(鄭璣淵, 경산)․이병운(李柄運, 대구)․안규용(安圭容, 보성)․박병하(朴炳夏, 고부)․노종용(盧種龍, 광주)․조종덕(趙鍾悳, 순천)․장기홍(張基洪, 동복)·조용승(趙鏞昇, 풍천), 이학순(李學純)․이내수(李來修, 연산) 등의 항일투사들을 양성하였다. 이들은 선생의 을사조약 파기운동에 참여하거나 자결 및 의병, 의열투쟁 등으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정기연과 이병운은 선생의 을사조약 파기운동에 함께 참여하였고, 박병하는 자결·순국하였으며, 안규용․장기홍․노종용․조종덕은 후학을 양성하는데 주력하였고, 조용승은 대한광복회 황해도지부에 참여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외에 의병을 이끌었던 노응규(盧應奎), 3·1운동을 주도하였던 송홍(宋鴻) 등이 제자로 확인되며, 아우인 송병순(宋秉珣)을 비롯하여 이학순(李學純)․조장하(趙章夏) 등은 선생과 교유하면서 영향을 받아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자결하였다.

“말의 길을 열어 과실(過失)을 들을 것.” 관직 제안을 거부하고, ‘신사봉사’ 8개조 등 상소 올려

선생은 1877년부터 태능참봉(泰陵參奉), 서연관(書筵官)·경연관(經筵官) 등을 시작으로 1903년까지 총 23차례에 걸쳐 관직에 천거되었지만 모두 거부한다.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 도(道)를 부지(扶持)하는 것’이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외세에 흔들리던 조선말기의 사회 속에서 당대의 유학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분별한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선생은 정부의 미온한 대처에 일침을 가하였다. 1879년 국왕의 관직제수에 사양하는 상소를 통하여 성학(聖學)에 힘써 현량한 인재를 육성하고 이들을 국가의 요직에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선생이 말하는 성학은 학문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조선 근간의 사상체계를 총괄하는 유교질서를 의미하는 동시에 사상적인 무장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신사척사운동이 한창이던 1881년 선생은 뜻하지 않게 외국의 선박이 출입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통상을 체결하기에 이르는 위급한 지경이 되었다고 하여, 국가의 보전과 자치자강을 위하여 군대를 갖추어 훈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 같은 총 20여 회 이상의 상소를 통해 선생은 내수의 정비, 강력한 군사력 배양, 외세의 척결을 줄기차게 주창하여 국정에 반영시키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881년의 신사봉사(辛巳封事) 8개조이다. 이는 성리학의 정진, 언로의 개방, 국가정통성 확립, 국가기강 확립, 재정절약, 인사정책 일신, 조세경감, 왜세(倭勢)척결 등 8가지 현안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것이다. 여기서 선생은 제1조와 8조에서 위정척사의 대의를 밝히고 있다. 즉 위정의 대상으로 성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는데 이는 국왕부터 철저히 성리학으로 무장하여 전 국민이 사상적으로 절대 동요되지 말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척사의 대상으로는 왜(倭)와 사교(邪敎)를 꼽고 있는데,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의 시각에서 일제를 비롯한 서구사상 일체에 대한 척결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제1조 성학에 힘써 마음과 뜻을 바로잡을 것.
제2조 말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 과실을 들을 것.
제3조 세자를 보좌함으로써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할 것.
제4조 상과 벌을 미덥게 하여 기강을 세울 것.
제5조 검소한 덕을 밝혀서 재용을 절약할 것.
제6조 벼슬자리를 중시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것.
제7조 공물의 진상을 정지하여 일의 근본을 보존할 것.
제8조 왜국과의 화의를 배척하고 예수교를 단절할 것.

 

이상 8조목으로 이루어진 신사봉사를 통해 선생은 국가의 기강확립과 민생안정으로 대내적 안정을 도모하고, 일제를 비롯한 외세를 철저히 배격하여 국권회복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884년 정부의 의복제도 변경에 귀추를 기울이며 ‘기본질서인 의복제도가 변화된다면, 나라의 기본질서 또한 보장될 수 없다’고 하여, 갑신변복령(甲申變服令)을 유교질서의 붕괴로 여기면서 위정의 신념을 보다 강력히 표출하였다. 즉 외세의 영향으로 의복제도가 변화된다면, 나라의 기본질서와 국권 또한 보장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선생의 끊임없는 노력은 선생의 문인과 당대 지식인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고 여론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실례로 화서학파의 김평묵(金平黙)은 “선생의 <신사봉사>가 윤리강상(倫理綱常)을 부지하게 하였고, 서양의 오랑캐들이 경각심을 갖게 하였다”라고 하면서 선생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결국 선생이 20여 차례 이상의 상소를 통해 추구하였던 것은 대대적인 국정운영 정비를 통한 내수강화와 외세로부터의 주권보호와 독립이었던 것이다.

송병선 선생의 간찰. 간찰은 간지에 쓴 편지를 말한다.

을사조약 파기 운동 벌이고 임금과 직접 대면하여 직언

을사조약이 늑결(勒結)되자 선생은 즉각 조약의 파기와 5적의 처단을 제기하였다. 선생은 을사조약의 늑결로 종사(宗社)는 망하고 나라는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 결국 노예의 지경에 빠질 것을 지적하면서, 조약의 파기 및 을사 5적의 처단을 통해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기울어져 가는 국가의 운명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선생은 일제의 위협 속에서 늑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이것으로 인해 일본에 예속될 것임을 통찰하면서, 이러한 위기의 책임이 내부의 간신배들과 이를 간파하지 못한 국왕에게 있음을 지적하였다. 나아가 비판에 머물지 않고 모든 국민들의 동참으로 국난을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선생은 을사조약을 파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선 외교적 관계를 이용한 국제여론의 형성으로 조약의 무효화를 꾀하였다. 각국의 사신들에게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것임을 알리고자 하였으며, 또 조약의 체결이 나라의 공적인 행정절차에 의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여 여러 나라에 그 평가를 의뢰하고 조약을 무효화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선생의 노력은 이미 일제에게 종속된 정치권에 더 이상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다. 이에 선생은 국왕을 직접 만나 의지를 펼치고, 국권회복의 대명제를 천명하도록 설득시키고자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수십 차례 관직제수를 거부하면서 한 평생을 재야의 선비로 고민하고 행동하였던 선생으로서는 큰 결단이었다. 이때 함께 을사조약 파기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로는 선생의 제자 가운데 정기연․이병운 등이 있었다. 정기연은 선생의 문인들이 스승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자정(自靖)하게 될 것을 염려하자, “한번 나아가 간(諫)하다가 죽는 자리인데 어찌 자정으로 자처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문인들의 동요를 막고, 선생의 을사조약 파기 운동을 적극 지지하면서 동참하였다. 이병운은 스승의 을사조약 파기 운동에 동참하였다가, 그 후 선생이 자결하자 망국의 한을 개탄하면서 고향인 대구에 채국정(採菊亭)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들과 함께 서울에 상경한 선생은 드디어 국왕을 직접 대면한 자리에서 국망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10가지의 시책을 제시하였다.

첫째, 모든 적(賊)을 참(斬)하여 왕법을 바로잡을 것.
둘째, 현자(賢者)를 등용하여 각 부에 임용할 것.
셋째, 의(義)로써 각국 공사관에 변론할 것.
넷째, 기강을 세워 명분을 바로잡을 것.
다섯째, 어사를 파견하여 민정을 순찰할 것.
여섯째, 재정을 정비하여 국력을 배양할 것.
일곱째, 학문을 바로잡아 인재를 기를 것.
여덟째, 사설(邪說)을 금지하여 적당(賊黨)을 물리칠 것.
아홉째, 법률을 밝혀 사송(詞訟)을 정비할 것.
열번째, 군력을 배양하여 비상시에 대비할 것.

여기서 선생은 각국 공사관에 우리정부의 입장을 표명할 것과 외국에 대응할 수 있는 군대의 양성을 주장하였다. 행간에 흐르는 핵심은 무엇보다 일제에 맞설 수 있도록 내수를 급히 정비하고, 군사력을 양성하여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이미 중국․러시아․영국․미국 등 조선을 둘러싼 강대국들로부터 조선의 강점을 용인 받고, 조선 정부를 장악한 상황 하에서 선생의 주장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꿈같이 들렸다.

일본 순사에 의해 강제 귀향 조처 당한 후 나이 칠십에 “도(道)의 수호를 위해” 자결

국왕을 움직여 일제를 배격할 수 있는 정책을 도모하는 데에 실패한 선생은 수일 동안 서울에 머무르며 재차 국왕을 독대하고자 하였으나 좀처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이 사이 이러한 선생의 강력한 의지와 행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일제였다. 일제는 선생을 침략정책의 장애물이라 인식하였던 것 같다. 특히 선생의 서울상경과 국왕면담, 선생을 추종하는 제자그룹 등을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경무사 윤철규(尹喆圭)로 하여금 선생을 유인케 하여 대전으로 압송하였다. 선생은 당시의 긴박하고 처절했던 상황을 마지막 남긴 유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시골에 파묻혀 있는 신 송병선은 이제 목숨을 끊겠습니다. 삼가 북쪽을 향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성상(聖上)께 영결을 고합니다. 신은 역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폐지하는 데 대한 일로써 상소문과 차자문(箚子文)을 올리고 처분을 기다린 지 며칠이 되었는데, 그간 여러 번 접견을 청하였으나 폐하의 몸이 편치 않다고 하기에 대궐문에서 명(命)을 기다렸습니다. 경무사 윤철규가 신에게 와서 권고하기를, ‘합문(閤門)에 들어가 엎드려 있자면 앓은 몸으로는 근력이 허락 치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더니 신의 몸을 억지로 부축하여 교자에 태웠습니다 교자의 문이 내려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성 밖에 당도하였는데 순검과 일본순사들이 황제의 지시로 보호한다는 핑계를 대고 신의 몸을 수색하고 갖은 욕을 보이더니 강제로 기차에 태워 곧장 신을 고향으로 쫓아버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은 진실로 애석하지 않으나 조정에 치욕을 끼친 것은 어떠하며 산림(山林)들에게 끼친 부끄러움은 어떠하겠습니까. …”

 

12월 28일 대전으로 압송되어 온 다음날 선생은 70세의 노구로 조국을 위하여, 후세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고민하다가 끝내 유소(遺疏)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선생의 마지막 상소이자 제자들에 대한 행동 지침이 되었다. 그리고 음독한 후, 후손과 제자들을 모아 ‘도(道)의 수호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마지막 유지와 함께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이때 선생이 의미하였던 ‘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미 이 나라를 지탱하는 국민이요, 민족이요, 바로 조국인 것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발행2012.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