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박재혁(朴載赫,1895. 5. 17 ~ 1921. 5. 11)

문성식 2015. 8. 31. 23:38

박재혁 “독립은 무력으로 찾는 것.” 부산경찰서 폭탄 파괴한 의열단원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 박재혁 선생, 옥중 말씀 중에서(1921)

홀어머니 아래 꿋꿋하게 자라 부산상업학교 입학. 고교 시절부터 독립운동 모색

박재혁 이미지 1

박재혁(朴載赫,1895. 5. 17 ~ 1921. 5. 11) 선생은 1895년 5월 17일 부산 범일동에서 부친 박광선(朴光善)과 모친 이치수(李致守)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자손이 귀한 집의 3대 독자였기에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하였다. 그러나 15세 되던 해 부친이 별세하자 집안의 생계는 어머니가 맡게 되면서 생활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어머니와 여동생 박명진(朴明振)의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선생을 교육시키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사립육영학교(현재 부산진초등학교)에 들어가 근대적 교육을 받았다. 선생이 다닌 사립육영학교는 1909년 4월 대한제국 정부의 허가를 받고 1911년 5월 부산진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 부산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고 전신, 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세 되던 1915년 3월 22일 졸업하였다. 학창 시절 선생은 최천택(崔天澤)․오택(吳澤)과 절친하게 사귀어 의형제를 맺었다. 이들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면서 부산 지역을 대표하는 민족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국권이 상실된 이후 상업학교에 다니면서 선생과 동지들은 나라를 되찾는 일에 의기투합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이 처음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며 민족의식을 갖게 된 것은 최천택 등 동지들과 교류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로 1910년 이후 부산상업학교에 입학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친구인 최천택이 훗날 남긴 글에 따르면, “암암리에 동지 규합에 힘을 기울여 박재혁․김인태(金仁泰)․김병태(金鉼泰)․김영주(金永柱)․장지형(張志亨,장건상 조카)․오택 등 친구들과 매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전도를 모의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선생은 상업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반일 민족운동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이를 실천하는 일에 투신하였던 것이다.

나이 열여덟에 <구세단> 조직하여 항일 잡지 발간하다 체포돼 모진 고문 당해

선생과 최천택은 가장 먼저 반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위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에 선생과 최천택은 한말의 대표적인 역사가인 현채(玄采)가 지은 보통교과 동국역사를 여러 학생들에게 읽히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선생의 친구인 최천택이었다. 최천택은 부산상업학교 2학년 때인 1912년 비밀리에 일제가 금지한 역사책인 보통교과 동국역사를 등사하여 동지들에게 나누어 주다가 체포되었다. 최천택이 배포한 보통교과 동국역사는 1899년 소학교용 국사교과서로서 국한문혼용체로 편찬한 것이나, 1910년 11월에 일제에 의해 금서가 되었던 것이다. 최천택은 이 책을 등사하여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읽혀 우리나라 역사를 알게 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해 간 것이다.

 

이 같은 사건을 주도한 최천택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0여 일간 고문과 추궁을 받다가 석방되었다. 그 후인 1913년 선생과 최천택은 동국역사 배포사건 때의 동지인 김병태․박흥민․왕치덕(王致德)․조영상(趙榮相)․오택․김인태․김영주․장지형 등 16명과 더불어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였다. 구세단의 설립 목적은 조국광복에 이바지하기 위해 항일투사의 국내 연락처 역할을 하고, 유사시에는 비밀결사대로 활동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구세단은 매월 한 번씩 등사판 잡지를 발간하여 경남 일대의 청년들에게 비밀리에 나누어주면서 동지를 규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활동을 한 지 6개월 만에 경찰에 조직이 탄로나 주도자가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구속된 동지들로는 선생을 비롯하여 오택․박흥규․김인태 등 4명으로 1주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부형(父兄)들은 이들을 구명하기 위해 구세단을 자진 해체한다는 조건으로 석방을 요구하였고, 협상이 잘 진행되어 풀려날 수 있었다.

 

<부산서의 폭탄 소요>(부산일보 1920년 9월 14일자 호외 사본)
부산일보에서 의열단원 박재혁(朴載赫)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하한 사건 경위를 보도한 것

“조국독립을 위해 청춘의 일편단심을 합한다.” 밀양의 일합사와 부산의 구세단 동지들을 규합

구세단 사건이 있은 이후 선생과 최천택은 1914년 울산․경주․김해․밀양 등지를 다니며 또 다시 뜻있는 청년들과 접촉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최천택은 밀양에서 훗날 의열단장이 된 김원봉(金元鳳)을 만나게 되었다. 이후 김원봉은 최천택의 도움으로 중국 천진의 독일계 학교인 덕화학당(德華學堂)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병탄된 이후 국내에는 각 지역에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미 선생 등은 부산에서 구세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또 밀양지역에는 일합사(一合社)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일합사의 정확한 조직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대략 김원봉이 중국유학을 가기 이전인 1914~15년경으로 판단된다.“조국 독립을 위하여 청춘의 일편단심을 합한다”는 뜻에서 조직명을 일합사로 지은 것이다. 부산의 구세단과 밀양의 일합사의 조직 구성원들은 모두 국권을 되찾기 위해 암중모색하고 있던 청년학생들이었다. 이에 부산의 구세단과 밀양의 일합사는 김인태(金鐵城·김철성이라고도 함)가 매개가 되어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자명의 수기 중 박재혁의 의거를 서술한 부분 (양면 따로 되어 있던 것을 하나로 합친 것)

상해와 싱가포르 옮겨 다니며 무역업 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 접촉.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한 선생과 동지들은 계속해서 부산 경남지역의 항일의식을 가진 청년들과 접촉하면서 국내외에 걸친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독립운동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계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1916년 4월 부산전기가스회사 전차 차장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친척인 박국선(朴國善)이 경영하는 경북 왜관의 곡물무역상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선생이 취업한 곡물상은 많은 현금을 거래하였으므로 이곳에서 700원이라는 거금을 조달해 1917년 6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선생은 구세단 활동 직후 접촉한 바 있는 김원봉과 만났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선생의 절친한 친우인 최천택이 김원봉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해에서 선생이 무슨 활동을 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무역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을 모색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선생은 1918년 6월 부산으로 돌아와 수개월 동안 머물다가 다시 상해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선생이 부산과 상해를 왕래한 이유는 단순한 무역활동을 위해 다닌 것은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명확한 활동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중국에서 다시 싱가포르로 가 그곳에서 남양무역회사에 취직하였다고 한다. 당시 선생이 무엇 때문에 싱가포르에 갔는가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사(丁巳, 1917년) 6월 (곡물무역상-필자) 주인에게 청(請)하여 700여원 자금을 얻어 상해로 들어갔고, 다음해 6월 집으로 돌아와 여러 달을 지내다가 또 상해 및 싱가포르(新嘉坡)로 가 무역에 종사하였다.

 

이 같은 <기려수필>의 기록을 통해 선생이 싱가포르에서 무역업에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인삼무역상들이 상해를 거쳐 싱가포르를 왕래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선생도 인삼무역에 종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당시 인삼 무역상점은 단순한 영업점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거점이었고, 선생이 싱가포르에서 인삼 무역을 할 당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싱가포르에서 무역업을 하던 선생은 1920년 4월경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선생이 상해로 온 이유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것은 선생이 상해에서 김원봉과 만나 의열투쟁 방식의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김원봉을 만나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기로 결심한 뒤 가사를 정리하기 위해 그 해 4월 19일 부산으로 다시 귀환하였던 것이다.

중국 상해에서 의열단 입단하고 일제를 타격하기 위해 대마도 거쳐 부산으로 입국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吉林)에서 창립되어 중국 관내지역과 국내 및 일본을 주무대로 활동하였는데, 1920년대 전반기 강도 높은 암살과 파괴 방식으로 의열 투쟁을 벌인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였다. 의열단은 선언서에서 ①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② 일본 천황 및 각 관공리, ③ 정탐노(偵探奴) 및 매국노(賣國奴), ④ 적의 일체 시설물 등을 응징대상으로 지목하였다. 의열단이 폭력적인 방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등(我等)에는 아직 병경(兵警)과 감옥이 없으므로 피등(彼等)에 대한 저제 방법(抵制方法)은 오직 단총(短銃), 살검(殺劒), 폭탄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의열단은 창단 직후 국내의 주요 일제기관들에 대한 동시 투탄거사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상해에서 어렵게 구한 폭탄 16개와 폭약․권총․탄환 등을 곡물 운송품으로 위장하여, 1920년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중국 안동현(安東縣)으로부터 국내로 밀송해서 밀양과 진영(進永) 두 곳의 비밀 아지트에 보관하여 두었다. 동시에 황상규와 단원 10명을 국내로 잠입시켜 서울․부산․마산․밀양에 배치하여 임무를 분담케 하였다. 그러나 폭탄 밀송 및 은닉 사실이 경찰에 탐지되어, 관련자 20명이 체포됨으로써 거사는 좌절되었다.

 

이에 의열단에서는 다수의 단원들이 피체된 데 대하여 복수한다는 뜻에서 선생의 거사를 추진하게 되었다. 부산에 간 선생은 몇 개월간 최천택․오택 등과 협의하며 가사를 정리한 뒤, 김원봉이 송금한 100원을 받아 그 해 8월 6일 상해로 다시 건너갔다. 상해에서 김원봉의 거사 지시를 받은 선생은 재차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본래 선생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시모노세키(下關)로 가서 그곳에서 부산으로 들어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모노세키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들어가는 것은 많은 위험성이 있었다. 연락선을 타고 내릴 때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나가사키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치지 않고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을 거쳐 9월 7일경 부산으로 귀국한 것이다.

일본 형사들의 감시 받다가 부산경찰서 파괴하기로 결심하고 실행

부산에 도착하기 전에 선생은 상해에서 김원봉과 협의하여 폭탄 1개, 군자금 3백 원, 여비 50원을 받았다. 부산에서 의거를 단행하기 전까지 선생은 동지인 최천택․김영주와 더불어 동래 온천, 해운대, 범어사 원효암 등지에서 거사를 모의하였다. 선생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곳을 골라 폭파하려고 하였다. 범어사 원효암에서 거사의 대상을 물색하고 있을 무렵 일제의 경찰에서는 선생의 입국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매우 궁금하게 여겨 탐문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형사들은 선생의 동지인 오택 등 주변 인물들에게 입국목적을 캐묻고 다녔다.

 

원래 선생은 민족 독립과 조국 광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의열투쟁을 통해 일제에게 타격을 가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강고한 독립의지를 밝혀 조국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인 총독부를 폭파하려고 하였으나, 선생의 입국 사실이 일제경찰에 의해 탐문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선생은 하루빨리 거사를 단행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부산에서 일제 식민통치와 식민지배의 상징인 부산경찰서를 파괴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선생이 의거를 단행할 당시 부산지역에서는 항일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 특히 1920년 9월 부산부두노동자 총파업이 발생하여 어수선한 상태에서 이에 불꽃을 붙인 사건이 바로 선생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의거였다.

중국 고서상으로 위장하고, 고서에 폭탄 숨겨 부산경찰서장 앞에서 터뜨려…선생도 함께 부상

선생은 일제가 자신의 입국 목적을 알기 전에 거사를 단행하려고 최천택과 함께 용두산공원에 올라가 부산경찰서 주변을 정찰하고 기념으로 사진촬영도 하였다. 그리고 거사 당일인 9월 14일 오후 선생과 최천택은 지금의 부산진시장 부근인 영가대에서 전차를 타고 가다가 부산역에서 함께 내렸다. 이후 선생은 거사를 단행하기 위해 부산경찰서로 가고, 최천택은 부근에서 이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선생은 중국인으로 가장한 뒤 중국 고서상(古書商)으로 행세하며 폭탄을 고서에 숨겼다. 9월 14일 오후 2시 30분경 선생은 경찰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에게 진기한 고서가 있다고 하면서 면회를 청하였다. 왜냐하면 하시모토 경찰서장은 중국 고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하시모토는 경상남북도 경무부 관내 수석 서장으로 가장 고위직에 있었다. 선생은 경찰서장 집무실로 인도되어 탁자에 마주 앉게 되었다. 하시모토와 마주앉은 선생은 보자기를 펴면서 진기한 중국 고서를 꺼내는 척하면서 폭탄을 끄집어내어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리고 선생은 정색을 하고 유창한 일본말로 독립투사들을 잡아 괴롭힌 죄를 꾸짖으면서 즉시 폭탄을 마루에 내려쳤다. 이에 폭음과 함께 폭탄이 터지면서 흰 연기가 방안을 가득 채워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게 되었다.

 

폭탄 파편에 맞아 하시모토 경찰서장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곧 경찰서 안에 있던 경찰들이 뛰쳐나왔다. 선생도 폭탄이 터지면서 오른쪽 무릎 뼈에 중상을 입어 현장에서 피체되고 말았다. 부상을 당한 선생은 부산부립병원에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고, 하시모토 경찰서장은 병원으로 옮겨지는 도중 절명하였다. 부산경찰서 부근에서 거사를 지켜보기로 한 동지 최천택은 폭발음이 있은 후 선생이 나오지 않자 거사가 실패한 것으로 판단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약 40분 후 경찰이 들이 닥쳐 그 또한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고 평소 경찰의 주목을 받고 있던 선생의 동지들인 김영주와 오택 등도 붙잡히고 말았다.

잔혹한 식민통치기관 부산경찰서 서장 폭사. 선생은 사형 선고…법정의 방청객 모두 울어

<박재혁은 결국 사형-제2심의 무기징역을 파기하고 어제 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동아일보 1921년 4월 1일자 기사 사본)
박재혁 선생께서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로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고등법원에서는 복심법원 판결을 깨뜨리고 1심과 같이 사형을 선고 하였다는 내용의 기사.

 

부산부립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선생은 경찰서에 끌려가 다시 취조를 받았다. 선생은 누구의 사주도 받지 않고 누구와 공모하지도 않고 거사는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제경찰은 사건의 교사자로 김원봉을 지목하였고, 공범자라고 하여 최천택․김영주․오택․김병태․김기득․박창수 등을 검거하였다. 그리고 검거된 이른바 ‘공범자’들에 대해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으나, 이들 또한 공범사실을 완강히 부인하여 10월 16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 나왔다.

 

선생은 부산지방법원에서 1920년 11월 2일 사형 언도를 받고, 1921년 2월 14일에는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상소한 경성고등법원에서 3월 31일자로 사형을 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이 언도되자 선생의 어머니와 누이동생뿐만 아니라 방청객 모두 따라 울었다.

 

선생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의거가 있은 지 두 달 후인 1920년 11월에는 밀양경찰서가 의열단원 최수봉에 의해 폭탄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921년 9월에는 의열단원 김익상이 총독부에 들어가 폭탄을 던지고 상해로 무사히 귀환하였으며, 1922년 3월에는 김익상과 오성륜 등에 의해 일제 군부의 거물로 대외 침략정책에 앞잡이 역할을 수행하던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처단하기 위한 거사가 결행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선생의 의거를 필두로 의열단에서는 제2차 국내의 적(敵) 기관 총공격 추진, 일본 왕궁 투탄(김지섭 의거) 등 투탄 및 침략 수뇌 격살 의거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의거 뒤에 항일 거사들 줄을 이어…“왜놈 손에 죽느니 내 스스로 죽겠다.” 단식 순국

<대구에 수감중인 박재혁은 병사-폐병으로 십일일에 사망>(동아일보 1921년 5월 17일자 기사 사본) 박재혁 선생의 순국 소식과 장례를 치른 경위를 전하고 있다

 

사형이 확정됨에 따라 선생은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여기서 혹독한 고문과 폭탄으로 인한 상처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무렵 동지인 최천택이 자주 면회를 갔다. 폭발 당시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이로 인해 선생의 보행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면회를 온 최천택에게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고 태연자약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1921년 5월 5일 최천택이 다시 면회를 갔을 때, 선생은 “왜놈 손에 사형 당하기 싫어 단식 중”이라고 하면서 최천택이 가지고 간 달걀 꾸러미를 도로 내어 주었다. 그 후 선생은 5월 11일, 결국 단식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선생이 단식으로 순국하였다는 비보를 접한 동지 최천택은 대구형무소에서 유해를 인수하여 부산진역으로 운구해 왔다. 역 앞에는 선생의 순국소식을 듣고 몰려온 친척과 동지들뿐만 아니라, 부산시민들이 모여 애도를 표하였다. 동아일보 1921년 5월 17일자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대구감옥에서 오직 죽을 날을 기다리든 부산서 폭탄범인 박재혁은 지난 십일일에 그 감옥에서 사망하였는데, 그 시체는 십사일 오후에 고향인 고관(古館)정거장에 도착하였는데 정거장에는 그 친척과 친구가 다수히 나왔으며 부산경찰서에서는 경찰이 다수히 출장하여 두려운 폭탄범인의 시체까지 경계를 하였더라.

 

장례는 부산진 좌천동 공동묘지에서 일제의 엄격한 감시 아래 남자 2명과 여자 3명의 가족만 참여케 하고, 입관 때에도 인부 2명만 사용하도록 하며 타인이 참가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였다. 해방 후 선생의 시신은 정공단(鄭公壇)에 합사되었다가 1969년 4월 동작동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어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집필
김도형 | 독립기념관 연구원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발행2012.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