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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의궤(4)

문성식 2015. 8. 15. 19:07

왕실의 장례를 기록한 의궤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4) 외규장각 의궤는 우리 선조들의 철저한 기록정신을 바탕으로 제작된 조선왕실의 행사보고서이며,<br>
		국왕이 직접 보았던 어람용 책의 품격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조선시대 왕실 의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죽음과 관련된 의식이었다. 특히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서, 임종과 장례 준비, 무덤의 조성, 장례 행렬, 삼년상 동안의 제사, 삼년상 후의 부묘(祔廟) 등이 모두 엄숙하고 성대하면서도 절제된 예에 따라 치러졌다. 외규장각 의궤 총 297책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상장례(喪葬禮) 관련 의궤로 그 분량은 전체의 2/3 가량 된다.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莊烈王后國葬都監儀軌), 1688(숙종 14), 2책, 48.3×37.9㎝, 유일본(상)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의 장례에 관한 의궤로 상․하 2책 중 도청, 일방, 별공작의 업무가 기록된 상책만 남아 있다. 발인 반차도를 보면, 왕비의 재궁(梓宮)을 실은 대여(大轝)의 좌우에는 보삽(黼翣), 불삽(黻翣), 화삽(畵翣) 각 2명, 집탁호군 16명이 나누어 서고, 그 밖으로 좌우 각 6명이 장막을 쳐서 외인(外人)들이 볼 수 없게 하였다.

장례 준비 위원회, 삼도감(三都監)의 설치

왕실의 장례는 그 대상에 따라 명칭과 규모가 달랐다.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 세자와 세자빈의 장례는 예장(禮葬)이라고 하였다. 왕이 장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왕이 승하한 당일로 장례 절차를 담당할 임시 관서인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 등 삼도감(三都監)이 설치되었다. 대개 좌의정이 이를 총괄할 총호사로 임명되고 이하 담당관리가 차출되었다. 장례의 총괄과 국장 행렬은 국장도감이, 시신을 수습하여 빈소를 차리고 상복을 만드는 일은 빈전도감이, 장지에서 묘소를 만드는 일은 산릉도감이 담당하였다. 또 장례를 치른 후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혼전을 담당하는 혼전도감이 별도로 설치되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빈전도감이 함께 업무를 담당하여 빈전혼전도감으로 불렸다.

현빈예장도감의궤(賢嬪禮葬都監儀軌), 1751(영조 27), 2책, 47.6×34.6㎝, 유일본(상)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빈인 현빈(賢嬪, 1715~1751) 조씨의 장례 절차에 관한 의궤이다. 현빈은 1727년 가례를 올렸으나 이듬해 효장세자가 요절하여 홀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재궁(梓宮)을 실은 대여의 뒤로는 배왕대장(陪往大將), 종사관 2명, 예장도감 일방 감조관 2명에 이어 곡(哭)을 담당하는 궁인(宮人) 14명이 너울을 쓰고 말을 타고 따라가는데, 곡궁인의 주위는 흰 베로 만든 장막으로 둘러막았다.

임종에서 입관까지, 빈전의 설치

왕이 임종할 때에는 세자와 대신을 불러 왕위를 넘겨준다는 마지막 유언을 하였는데 이를 고명(誥命)이라 하였다. 고명을 받은 신하는 왕의 유교(遺敎)를 작성하였다. 왕이 승하(昇遐)하면 머리를 동쪽으로 눕히고 왕의 입과 코 사이에 고운 햇솜을 얹어 왕의 죽음을 확인한 후 곡(哭)을 하였다. 죽음이 확인되면 내시가 왕의 평상복을 가지고 궁궐 지붕에 올라가 “상위 복(上位復)”이라고 외치며 죽은 자의 혼을 불러오는 초혼의식을 행하였다. 이후 5일 간은 왕의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장례 준비를 진행했다.

국왕이 승하가 선언되면 왕세자 이하 신료들은 흰 옷으로 갈아입고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며 애도했다. 그 다음으로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의복을 갈아 입히는 습(襲), 시신의 입에 쌀과 진주 등을 채우는 반함(飯含) 의식을 치르고, 3일째와 5일째는 옷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는 소렴(小殮)과 대렴(大殮)을 진행하였다. 5일이 지나도 왕의 혼이 돌아오지 않으면 입관하였다. 염습을 마친 시신은 재궁(梓宮: 관)에 넣고 다시 찬궁(欑宮)이라는 집 모양의 구조물에 안치하여 빈전에 모셨다. 발인하기까지 시신을 모시는 전각을 바로 빈전이라고 하였다. 통상 승하 6일째는 왕세자가 성복(成服)을 한 후 애도 속에서 즉위식이 이루어졌다. 예법에 따라 입관 후 5개월 동안 빈전에 시신을 안치하였다가 국장을 치렀는데, 이 기간 동안 빈전의 제사와 호위는 빈전도감이 담당하였다.

효종빈전혼전도감의궤(孝宗殯殿魂殿都監儀軌), 1659(현종 즉위), 1책, 52.1×38.4㎝
효종(孝宗, 1619~1659)의 시신 염습(殮襲)과 안치(安置)를 담당한 빈전도감과 장례 후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담당하는 혼전도감의 일을 기록한 의궤이다. 책머리에 소선(素扇), 명정(銘旌), 영좌(靈座), 찬궁(欑宮), 영침(靈寢) 등 빈전도감에서 담당한 12종의 기물의 도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의궤는 빈전도감의궤와 혼전도감의궤가 1책으로 합부되어 있다.

사후의 궁궐, 산릉의 조성

살아있는 왕의 공간이 궁궐이라면 죽은 왕의 공간은 왕릉이었다. 왕릉 공사는 수개월 동안 수천 명이 동원되는 대규모 공사로, 산릉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왕릉 조성의 시작은 명당을 찾는 일이었다. 왕은 생전에 남면(南面)하였기 때문에 왕릉 역시 남향으로 축조되었다.

왕릉의 입구에 설치된 붉은 색의 신문(神門), 즉 홍살문은 능역의 신성함을 알리는 표지이자 출입문 역할을 하였다. 왕릉은 시신을 모신 현궁(玄宮)이 있는 봉분과 봉분 아래 정자각(丁字閣)을 비롯한 제사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왕의 묘호와 행적을 기록한 비석을 모신 각을 세웠고, 그 외 제사를 준비하는 부속 건물을 주변에 배치하였다.

봉분의 지하에는 재궁을 안치하는 현궁을 축조하기 위해서 먼저 사각형으로 광(壙)을 파고 그 안에 두 개의 석실을 만들었다. 왕의 시신은 서쪽, 왕비의 시신은 동쪽에 안치하였다. 석실 외벽과 광 사이의 빈 공간은 석회와 숯으로 채워 넣어 습기와 벌레를 방지하는 동시에 단단하게 만들었다. 석실의 위는 석회, 고운 모래, 황토를 섞은 삼물(三物)로 다지고 주위를 병풍석으로 두른 후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 봉분의 주위는 난간석을 두르고 북, 동, 서 3면에 곡장(曲墻)을 세워 능을 보호하였고, 그 앞에는 혼령이 노니는 혼유석(魂遊石)과 함께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문인석, 무인석, 석호(石虎), 석양(石羊), 장명등(長明燈) 등의 석물을 배치하였다. 특히 왕릉의 석물은 조선시대 석조 공예의 정수라고 할 만큼 그 표현 수준이 뛰어났다.

현륭원원소도감의궤(顯隆園園所都監儀軌), 1789(정조 13), 1책, 49.9×36.9㎝
수원부 화산(花山)에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새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한 내용을 정리한 의궤이다.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세자와 세자빈, 왕비가 아닌 왕의 생모 등의 무덤은 원(園)이라 하였다. 원래 상, 하 2책으로 구성되었는데, 본 의궤는 상책만 남아 있다. 책머리에는 원상각(園上閣)을 비롯한 건물, 녹로(轆轤), 각종 석물(石物) 등 29개의 도설과 찬궁의 네 벽에 붙인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린 사수도(四獸圖)가 수록되어 있다. (좌)사수도 중 백호와 주작, (우)문인석과 무인석 도설

발인에서 반우까지, 국장 행렬

헌종국장도감의궤(憲宗國葬都監儀軌), 1849(철종 즉위), 3책, 46.4×32.6
헌종(憲宗, 1827~1849)의 국장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총 4책으로 구성된 중 1,3,4책에 해당하는 3책만 있으며, 3책 모두 초록색 비단 표지와 변철(邊鐵) 등 제작 당시의 장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 중 삼방의궤에는 시책(諡冊), 시보(諡寶), 애책(哀冊), 증옥(贈玉), 증백(贈帛), 삽선(翣扇), 만장(輓章), 제기(祭器) 등의 채색 도식(圖式)이 있어 재료와 제작 방법을 알 수 있다.

빈전에 모신 재궁을 장지(葬地)인 산릉까지 모시는 의식은 왕이 임종한 지 5개월이 되는 달에서 길일(吉日)을 골라 치렀다. 국장 하루 전 왕이 빈전을 여는 계빈의(啓殯儀)를 올리고, 상여가 출발하기 전 조전의(祖奠儀), 견전의(遣奠儀)를 차례로 지낸 후 발인(發靷)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의식은 국장도감이 주관하였다.

국장 행렬은 재궁을 대여에 옮겨 실은 후 대여 앞 호군이 흔드는 탁(鐸: 방울의 일종) 소리를 신호로 궁궐을 떠나 노제(路祭)를 거쳐 장지로 향했다. 장지가 위치한 지역의 수령이 행렬을 인도하고, 그 뒤로 국장도감의 주요 책임자, 호위군사와 각종 의장기·의장물을 든 기수, 악대, 선왕(先王)을 위한 고명(誥命), 책(冊), 보(寶), 인(印), 향로 등을 모신 가마, 신주를 모신 가마, 제기를 비롯한 각종 집기류를 실은 채색 가마, 만장(輓章: 죽은 사람을 애도하며 지은 글), 좁은 길을 지날 때 관을 모시는 가마인 견여(肩轝), 왕의 재궁을 실은 대여(大轝), 국장도감과 중앙 관청의 관리들, 곡을 담당하는 궁인(宮人) 등이 행렬을 이루었고, 그 후미에는 호위군사와 기수대가 배치되었다. 국장 행렬이 장지에 도착하면 찬궁에서 재궁을 꺼내어 무덤의 지하석실인 현궁에 들였다.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1752(영조 28), 2책, 48.7×36.0㎝
상책 발인반차도 중 대여 부분.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는 세 살의 어린 나이에 죽은 사도세자의 맏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의 장례에 관한 의궤로, 상, 하 2책이다. 상책에는 반차도가 수록되었는데, 행렬의 전반부에 소(筲), 사기(沙器), 악기(樂器), 복완(服玩) 등을 실은 채색 가마와 그 좌우로 죽산마(竹散馬), 죽안마(竹鞍馬) 등의 의장물이 배치되었다.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1752(영조 28), 2책, 48.7×36.0㎝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 하책의 복완 도설 부분. 하책 이방의궤에는 면류관, 푸른 색 겉옷[衣], 치마[裳] 등 의소세손의 각종 복완이 선명한 색감의 채색 도설로 수록되었다.

외규장각 의궤(4) 이미지 1

국장 후 다시 돌아온 신주는 혼전에 모시고 3년 동안 제사를 지냈다. 이 의례는 혼전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삼년상이 끝난 후 신주는 종묘에 모시는 부묘의식을 거쳐 종묘에 모셔졌다. 이것으로 3년간에 걸친 국장이 마무리되었다.

유새롬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발행2011.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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