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52.jpg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충남 연기군 비암사에서 발견된 세 석상(石像) 중 가장 작은 것으로, 4면에 모두 조각이 있으나 앞면이 위주임은 다른 석상과 같다. 위의 옥개(屋蓋)와 아래 대좌가 모두 한 돌로 이루어지고 네 귀에는 둥근 기둥 모양을 새겨서 감실(龕室)을 표현하였다. 앞뒷면은 T자형을 이루었으며 측면은 위로 오를수록 좁아져 있다.

먼저 앞면 중앙에는 보살좌상 1구(軀)만이 전면 가득히 새겨졌는데, 4각형 대좌에 앉아 왼발은 내리고 오른발은 왼발 위에 얹어 이른바 반가좌(半跏坐)를 하였으며 오른손은 들어서 턱에 대고 이른바 사유형(思惟形)을 보이고 있다. 보관(寶冠)을 쓰고 목걸이 ·두광(頭光) 등 장엄구를 갖추었으며 천의(天衣)는 두 팔에 걸쳐서 길게 대좌에 이르고 있다. 머리 위에는 천개(天蓋)가 새겨졌으며 다시 그 위에 보주(寶珠)와 영락(瓔珞)이 장식되었다. 밑면은 장방형을 이루었는데, 그 중앙에 둥근 화병을 놓고 그 좌우에는 꿇어앉은 인물상을 배치하였다. 지물(持物)로 미루어 승려와 공양상(供養像)으로 보인다.

위에는 나뭇잎이 얽힌 지붕이 있고 그것을 받치는 가늘고 긴 두리기둥의 기둥머리와 중간에는 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처음 보는 유례이다. 다음에 측면에는 좌우에 각기 같은 모양의 연화좌 위에 서 있는 보살상을 1구씩 새겼는데 머리 정면에 보탑(寶塔)이 있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둥근 보주(寶珠)를 들고 있다. 천의(天衣)와 치마의 양식은 앞면의 의상과 같으며 하면에는 또한 꿇어앉은 공양상 1구가 새겨졌는데, 이들 보살 입상이나 그 밑의 공양상이 모두 앞면을 향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이 같은 점에서 앞면의 반가상을 주존(主尊)으로 삼아서 삼존형식(三尊形式)을 의도한 작가의 뜻을 알 수가 있다.

끝으로 후면은 전면과는 달리 곡면(曲面)을 이루었는데, 조각은 매우 간단하여 1기(基)의 보탑을 가득히 새겨 놓았다. 이 탑은 2단의 기단이 놓이고 그 위에 타원형의 탑신(塔身)이 마련되고 다시 그 위로는 평판(平板)을 놓고 대소 3주의 상륜(相輪)이 꽂혀 있다. 이 같은 모양의 탑형은 아마도 한국(韓國)에서 가장 오랜 것이라 하겠는데, 이같이 탑을 후면에 새긴 것은 전면에 새겨진 주존상(主尊像)과의 관계에서 그 존명(尊名)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석상은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 유행된 미륵신앙(彌勒信仰)을 배경으로 삼아 크게 발달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양식의 귀중한 유품이며, 작기는 하나 손상이 없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이 4면 석상에 있어서 정면의 보살은 측면의 2상과 더불어 미륵삼존으로서의 조형 양식을 보이는 것이며, 후면의 보탑은 또한 미래불(未來佛)로서의 미륵보살의 표상을 새긴 것으로 해석된다. 이 곳 비암사의 3개 비상(碑像) 중 형태가 큰 다른 2상이 모두 그 곳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의하여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는데, 그들과 함께 이 미륵석상을 조성한 것은 또한 그 당시의 믿음을 오늘에 잘 전하여 주는 것이다.

이 미륵반가석상의 조성 연대는 그 조각 솜씨로 미루어 이곳에서 함께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국보(國寶) 제(第)106호(號))과 같은 673년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멸망한 지 멀지 않은 시기에 그 영역에서 조성된 이들 석상은 백제의 석조 미술을 오늘에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