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불화,탱화

쌍계사 雙磎寺

문성식 2015. 7. 7. 00:58
소재지 : 하동군 화개면 
원문참조 및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사진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8346.jpg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지리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이다.

 

이 절은 723년(성덕왕 23)에 의상(義湘)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에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상(頂相)을 모셔다가 삼신산(三神山)의 눈 쌓인 계곡 위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육조의 머리를 취한 뒤 귀국하였다.

 

그리고 한라산·금강산 등을 두루 다녔으나 눈이 있고 꽃이 피는 땅을 찾지 못하다가, 지리산에 오자 호랑이가 길을 안내하여 지금의 쌍계사 금당(金堂) 자리에 이르렀다. 그곳이 꿈에 지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혜능의 머리를 평장한 뒤 절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그 뒤 840년(문성왕 2)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중국에서 차(茶)의 종자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고 대가람을 중창하였다. 정강왕 때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벽암(碧巖)이 1632년(인조 10)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50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된 명부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된 팔상전, 노전(爐殿),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6호로 지정된 적묵당(寂默堂)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3호로 지정된 설선원(說禪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된 나한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된 육조정상탑전과 청학루(靑鶴樓)가 있다.

그리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된 천왕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된 금강문(金剛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된 일주문·대방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47호인 진감국사대공탑비(眞鑑國師大空塔碑)와 보물 제380호인 부도(浮屠), 보물 제925호인 팔상전영산회상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호인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5호인 불경책판이 있다. 대공탑비는 887년(진성여왕 1)에 진성여왕이 진감국사의 도덕과 법력(法力)을 흠모하여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이를 만들도록 한 것이다.

비문은 최치원(崔致遠)이 쓴 것으로 우리 나라 4대 금석문(金石文) 가운데 첫째로 꼽힌다. 이 밖에도 육조혜능의 초상화를 안치한 7층의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로 지정된 마애불(磨崖佛)과 아자방(亞字房)의 터가 있다. 관장하는 말사는 43개이며, 4개의 부속 암자가 있다.

 

절에서 500m 거리의 암자인 국사암(國師庵) 뜰에는 진감국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았다는 천년이 넘은 느릅나무 사천왕수(四天王樹)가 있고, 신라의 원효(元曉)와 의상이 도를 닦았고 1205년(희종 1) 보조국사(普照國師)가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그 시호를 딴 불일암(佛日庵)이 있다. 쌍계사 일원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역대조사

추월조능(秋月祖能)스님

조선 중종대(1506~1544)의 고승으로서, 벽송지엄선사(碧松智嚴祖師)의 心印을 이었다. 추월선사는 평생을 눕지 않고 용맹정진하였다 한다. 칠불암에서 주석할 때 밤중이 되면 돌을 짊어지고 경행(經行)하되, 쌍계사까지 가서 六祖頂相塔에 참배발원하고 돌아오는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수마(睡魔)를 조복시키고 조사관(祖師關)을 타파하였다.

돌을 지고 도를 닦던 어느날 호랑이를 만나게 되어 몸을 보시하고자 하였는데, 호랑이가 머리를 숙이며 거부하더니 이후부터 항상 곁에서 선사를 모시었다. 임종시에 호랑이에게 遺誡하기를 "사람의 財力을 소모시키지 말고 단지 산의 형상을 취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리를 바위에 갈무리했다가 石鐘을 만들어 봉안하려 하였으나, 선사의 유언에 따라 호랑이가 나타나 이를 저지하였다. 처능대각(處能大覺)스님은 『제칠불암칠영전(題七佛庵七影殿)』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靑荷는 원래 옥과 같은 芙蓉이요 찬 그림자 登階하여 碧松을 의지했네 淸虛의 성벽과 浮休의 자취여 秋月이 밝으니 느낌 또한 짙도다." 靑荷는 곧 法融의 호요, 부용은 곧 靈觀의 호이며, 등계는 곧 淨心의 호요, 벽송은 곧 智嚴의 호이며, 청허는 休靜의 호요, 부휴는 곧 善修의 호이며, 추월은 곧 祖能의 호이니, 이 일곱 대사의 진영을 칠불암의 觀音殿에 모셨다."

쌍계사 七佛庵에서 더 올라가면 뒤에 옥보대가 있고, 서북쪽 언덕에 부휴스님의 치아탑이 있으며, 그 아래에 추월조능스님의 부도가 있다. 순수하고 검소한 성품일 뿐만 아니라 견고한 용맹정진의 큰 힘을 얻은 분으로 수행자들의 수행자세에 모범이 되고 있다. 

휴정선사 휴정서산대선사 休靜西山大禪師

자는 玄應, 다른 호는 淸虛堂이다. 속성은 崔氏요 완산사람이며, 이름은 汝信이다. 아버지는 箕子殿 참봉인 世昌이고 어머니는 김씨로, 기이한 태몽을 꾸었다. 선사는 경진년(1520)에 태어났다.
21세에 崇仁長老 밑에서 삭발하였고 一禪和尙으로부터 계를 받았으며, 31세에 禪科에 합격하여 선교 양종판사에까지 이르렀다. 己丑獄事때 무고하게 감옥에 갇혔으나 선조가 명하여 석방토록 하고 御畵와 御詩를 하사하였으며, 산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사는 칼을 잡고 行在所에 나아갔으며, 선조의 명으로 八道都摠攝에 제수되었다. 선사가 문도들과 승려들을 나누어서 명나라 군대를 도우는 한편, 직접 싸움터로 나아가 수많은 적을 물리쳤으며, 御駕를 호송하여 도읍으로 돌아왔다. 선사가 옛날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왕은 이를 허락하면서, '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宗置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갑진년(선조 37년,1604)에 묘향산 圓寂庵에서 앉아 入寂하시니, 세수 85세요 선랍 65세였다. 저술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운수단(雲水壇)』『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當集)』8권이 간행되었으며 필적은 가늘면서도 힘이 있고 운치가 있다. 밀양 표충사(表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雙?이 나와 말하였다. "세간의 법과 출세간의 법이 안팎으로 상반되지 않음입니다. 예부터 불문에서 덕을 갖춘 분들 가운데 국가의 일에 힘을 쓰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우리 스님께서는 궁한 衲子이지만 한 마디 말로써 여러 임금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임금의 편지를 받고서 몸소 왜란에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끝내는 의리로 분발하여 승도들을 모아 협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천자의 토벌군(명나라 군대)이 지극히 찬양하였으며, 국토를 회복한 공훈과 명성이 중국과 일본에까지 알려졌습니다. 무릇 우리 스님의 마음에 어찌 일찍이 의도한 바 있었으리오마는 인연따라 자취를 나타내었기에 功用이 매우 높았습니다. 마음을 空有에 두고 충의에 빛나는 일을 하였으니, 어찌 따로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어머니 김씨는 선사를 잉태하였을때 기이한 꿈을 꾸었고, 태어나 세살이 되었을때 홀연히 한 늙은이가 찾아와서, "어린 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였다. 늙은이는 아이를 끌어안고 몇마디 주문을 외운 다음 머리를 어루만지며 이르기를, "마땅히 이름을 雲鶴이라 하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문을 나갔는데, 그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어려서 장난을 하고 놀때면 반드시 불교적인 놀이를 하였고, 자랄수록 풍채와 정신이 영특하고 빼어나 말을 하면 사람을 탄복하게 만들었으니, 州의 牧使에게까지 사랑을 받고 '奇童'이라 불리어졌다. 10세에 부모상을 당하여 의지할 바 없는 외톨이가 되자, 주의 목사가 경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균관에 나아가 공부를 하게 되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하여 뜻을 이루지 못함을 답답하게 여기다가, 친구들과 함께 남쪽으로 유람길에 올랐다. 마침내 두류산에 들어가 바위골짜기의 모든 빼어난 경치를 구경한 다음, 內典(불경)을 두루 열람하다가 홀연히 출가할 뜻을 발하여 동료들에게 이별의 시를 남겼다.

물을 길어 돌아오다 머리를 돌려보니
靑山은 무수히 白雲 속에 있구나

드디어 崇仁長老에게서 머리를 깎고 一禪和尙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때는 중종 35년(1540) 경자년으로 선사의 나이 21세였다. 靈觀大師를 찾아가 參問하고 인가를 얻은 다음 촌락을 遊行하다. 한낮에 닭울음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음이 있어 탄식하며 말하였다. "차라리 일생동안 어리석은 사람이 될지언정 鉛?阿師가 되지는 않겠노라" 하고는 붓을 잡고 '落葉' 이라 제목하여 시를 지었다.

머리는 희어져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옛사람들도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장부의 할 일은 능히 마쳤도다

이로부터 관동의 여러 명산을 떠돌아 다니며 노닐다가, 우연히 서울에 들어가 禪科에 합격하여 선교양종판사에까지 올랐으나 홀연히 자리를 버리고 풍악산(금강산)에 들어가 '三夢吟'을 지었다.

기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한 妖僧의 무고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으나, 본말을 명확히 밝히자 본래부터 그 명성을 듣고 있었던 선조가 곧바로 석방하라고 명하였고, 따로 불러 御製一色과 御?墨竹 병풍을 하사하였다. 선사가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 은혜에 감사하니 임금이 더욱 칭찬하고 후대하여 산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서쪽으로 行幸함에, 선사가 산을 나와 임금이 계시는 행재소에 나아가 알현하자 인금이 말씀하였다. "나라에 큰 난리가 있으니 山人인 그대 또한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에 선사는 눈물을 흘리며 "원컨대 죽을 때까지 싸우겠노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八道禪敎都摠攝의 제수를 명하였다. 선사가 여러 上足들에게 의승병을 모집할 것을 명하자. 惟政이 관동에서 일어났고, 處英이 호남에서 일어나 權慄과 병사를 합하여 행주산성에서 싸웠다. 선사는 스스로 문도 1천5백인을 거느리고 명나라 군대를 따라 나아가 평양을 수복하였다. 명나라의 經略 송응창, 提督 이여송 및 三協總兵 이하 모든 부장들이 선사의 명성을 듣고 다투어 첩을 보내 공경히 치하하였다. 어떤 이가 시를 보내 찬미하였으나, 예로써 공손히 사양하였다.

서울이 회복되어 上將軍이 먼저 수레를 돌려 돌아갔으므로, 선사는 승도 수백을 거느리고 임금을 호위하여 도읍으로 돌아왔다. 임금에게 청하기를 "신은 늙어서 머잖아 죽을 것이니, 원컨대 군대에 관한 일은 제자 惟政등에게 전부 맡기고 사직원을 내고 돌아가기를 바라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고, 호를 하사하였다.

원적암에서 示寂하기 전에 눈길을 무릅쓰고 묘향산에 있는 여러 암자를 두루 찾아 부처님께 예배하고 설법하였다. 방장으로 돌아와 목욕하고 위의를 갖추어 불전에 분향한 다음 붓을 들어 스스로의 진영에 題하였다.

팔십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또 유정과 처영 두 문인에게 이별의 편지를 보내고 결가부좌하여 입적하였다. 세수 85세, 선랍 65세였으며, 기이한 향기가 여러 날 동안 방안에 가득하였다. 다비 후 靈骨 1편과 사리 3립을 취하여 보현사와 안심사에 부도를 세웠다. 유정?자휴 등은 다시 頂骨 1편을 받들고 풍악산에 와서 사리 여러 과를 얻어 유점사 북쪽 언덕에 묻었다. 선사가 젊었을 때 영관대사의 법을 얻어 종풍을 떨쳤으니, 근대에는 그를 능가할 자가 없었다. 제자는 1천여 인인데 이름이 난 이만 하여도 70여인이나 되고, 능히 후학들을 지도하는 한 지방의 宗主가 20여인이 넘었으니, 참으로 훌륭하도다. 노년까지 해탈 자재로웠는데, 피상적인 무리들이 혹 戒를 뛰어넘은 선사의 자재로움을 의심하였으나 識者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게송은 명랑하여 놀랄만한 구절이 많았고, 필적은 활달하고 굳세고 운치가 있었으며, 행장을 서술함에 또한 이와 같음을 갖추었다. 아아, 선사의 幻身이 이미 재가 되었는데, 직접 경험한 것만 幻하지 않고 일편석으로 변하였으니, 어찌 몇 장의 글이 선사의 불후한 삶을 나타낼 수 있으리. 그러나 그 도가 너무나 높아 차마 자취를 없어지게 할 수 없기에 길이 세상에 전하고자 함이로다.

張維(효종의 장인)가 비문을 짓노라.

소요대사 逍遙太能스님

소요대선사행장 逍遙大禪師行狀

대선사의 법명은 太能이요 逍遙는 법호이다.
속성은 吳씨요, 호남 담양사람이다. 明宗17년 임술년(1562) 9월 어느날에 태어났으며, 그 어머니가 어떤 神僧으로부터 잔 글씨의 大乘經을 받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한다.

나면서부터 피부가 선명하고 골격이 씩씩하였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총명함을 나타내었다. 차츰 지각이 생겨남에 따라 탐욕을 멀리하고 道에 대해 듣기를 좋아하며 인자한 마음으로 보시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그 마을에서는 모두 聖童이라 불렀다.

13세에 白羊山으로 놀러갔다가 세상밖의 경계를 보고 곧 속세를 벗어날 뜻을 품어, 眞大師를 의지하여 삭발하고 經律을 배워 그 뜻을 철저히 밝히셨다. 그때 부휴대사가 속리산 法住寺와 海印寺에 왕래하며 교화하였으므로 스님은 나아가 화엄경을 배우고 그 오묘한 뜻을 다 얻으셨다.

부휴의 會上에 수백 명이 있었지만 오직 스님과 雲谷沖?와 松月應祥을 일컬어 法門의 三傑이라 하였다. 明나라 장군 이여송이 오랑캐를 치고 승리하여 돌아가는 길에 해인사에 머물다가, 대사의 단아함을 보고 부휴대사께 "伯樂의 마굿간에 뛰어난 말이 많구려"라고 하자, 부휴의 여러 제자들이 "태능이야말로 뛰어난 말입니다." 하였다.

스님은 이전부터 西山대사께서 妙香山에서 교화를 펴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西來의 뜻[西來意]'을 물으셨다. 서산대사는 첫눈에 스님이 법기임을 알아보시고, 곧 建幢을 시켜 바리(鉢)를 전한 다음 3년 동안 지도하였다. 이윽고 開堂說法을 하자 청중이 그 문하에 가득하였는데, 당시 스님의 나이는 20세였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산대사는 스님에게 法偈를 주셨다.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와
물위의 거품에 모두 살라 버린다
우스워라 소를 탄 사람이여
소를 타고서 다시 소를 찾누나

그뒤 남방으로 내려와 여러 宗匠을 찾아 두루 물어보았으나, 그 뜻을 알고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묘향산으로 가서 조사께 그 뜻을 물어 비로소 無生法忍을 얻고, 마음을 觀하며 성품에 맡겨 거리낌 없이 소요하니 머무는 곳마다 따르는 자가 구름처럼 달려오고 시냇물처럼 모여들어, 임제의 宗風을 크게 떨치셨다.

임진왜란 때 西山과 松雲이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로 나아가자, 스님은 佛殿에 齋를 베풀어 정성껏 그윽한 도움을 빌었으며, 병자년(1636,인조14년)에 남한산성을 쌓는 역사가 있었을 때에는 나라의 명령을 받들어 西城을 보완하고 뜻밖의 일에 대비하였으니,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그 마음은 서산이나 송운과 같은 길이요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가는 곳마다 스님이 법을 설하는 자리에는 잔나비가 경을 들으며 머리를 숙였고 뱀이 법을 듣고 허물을 벗었으니, 그 교화가 異類에까지 미침이 이와 같았다. 그리고 지리산의 新興寺와 燕谷寺를 창건할 때는 조정과 백성이 다 대사의 道化에 감화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이루었다. 인조 27년(1649) 기축년 11월 21일에, 스님은 열반을 이야기 하다가 붓을 찾아 臨終偈를 쓰셨다.

해탈이 해탈 아니거니
열반이 어찌 고향이겠는가
吹毛劍의 빛이 번쩍이나니
입으로 말하면 그 칼을 맞으리

드디어 열반에 드시니 붉은 무지개가 하늘에 뻗치고 묘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법랍 88세였다. 다비하는 날 저녁에는 靈骨이 불 밖으로 튀어나오고, 사리 2과가 축원에 의해 공중에 솟아올랐으므로, 燕谷寺, 金山寺,, 深源寺 세 곳에 탑을 세워 봉안하였다.

효종대왕은 潛邸에 계실 때부터 스님의 道를 듣고 그 高風을 흠모하였는데, 대사가 열반하셨다는 말을 듣고 못내 슬퍼하였으며, 4년 후인 임진년(1652) 봄에는 특별히 명하여 慧鑑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는 실로 특이한 恩典이다. 또 中使를 시켜 향과 폐물을 하사하고, 相臣인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을 시켜 비명을 지어 금산사에 세우게 하셨다. 문집 1권이 간행되어 세상에 나왔다.

불초 門下의 11세 法孫인 惠勤이 조계산 大學庵에서 삼가 쓰노라.

 

12.gif 지정문화재목록 및 해설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47]

쌍계사부도[보물 380

쌍계사대웅전[보물 500]

쌍계사팔상전영산회상도[보물925]

쌍계사대웅전삼세불탱[보물 1364]

쌍계사팔상전팔상탱[보물 1365]

쌍계사목조삼세불좌상및사보살입상[보물 1378]

쌍계사석등[경남 유형 28]

쌍계사일주문[경남 유형 86]

쌍계사팔상전[경남 유형 87]

쌍계사명부전[경남 유형 123]

쌍계사나한전[경남 유형 124]

육조정상탑전[경남 유형 125]

쌍계사천왕문[경남 유형 126]

쌍계사금강문[경남 유형 127]

쌍계사소장불경책판[경남 유형 185]

쌍계사삼장보살탱[경남 유형 384]

쌍계사팔상전신중탱[경남 유형 385]

쌍계사국사암아미타후불탱[경남 유형 386]

하동쌍계사사천왕상[경남 유형 413] 

 

12.gif 쌍계사 전래설화

삼법·대비 두 스님이 육조 대사의 사리를 중국 당나라로부터 모셔와 이곳에 모시고 절을 짓게 된 이야기가 각훈 스님의 「육조정상동래연기(六祖頂相東來緣起)」에 나와 있는데, 이는 곧 지금 쌍계사의 창건 배경이기도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법 스님은 평소 혜능 대사의 높은 덕망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714년(성덕왕 13) 육조 대사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견의 인연이 없음을 한탄 하였다.

그러다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인 금마 미륵사의 규정(圭晶) 스님이 당에서 돌아오며 육조가 직접 지은 법보단경(法寶壇經)을 가져와 그것을 읽어 보고는 가르침을 친히 듣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 삼법 스님은 그 글에서, "내가 간 후 5~6년에 나의 머리를 취할 사람이 있으리라." 하는 내용을 읽고 직접 당에 가서 그 정골을 신라로 가져오겠다고 마음먹었다.


721년(성덕왕 20)에 이르러 김유신(金庾信)의 부인이기도 했던 비구니 법정(法淨) 스님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당에 건너간 뒤 입당(入唐)한 후 경주 백률사의 스님 대비 스님을 만나 관련 정보를 얻고, 또한 장사 장정만의 도움을 입어 마침내 육조 혜능 대사의 정상(頂相)을 얻을 수 있었다.


삼범 스님은 대비 스님과 함께 귀국하였는데, 꿈에 한 노사(老師)가 현몽하여, "강주(康州) 지리산 아래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에 봉안하라."는 말을 받았다.
 
강주는 진주의 옛 이름이고, "설리갈화처"란 곧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이라는 뜻이다. 삼법, 대비 두 스님은 현몽대로 강주의 지리산 아래에 왔는데 때가 한 겨울인 12월이라 눈 때문에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난감해 하는 두 스님 앞에 한 쌍의 호랑이가 나타나서 길을 인도하였다. 함께 따라가 보니 큰 석문 안으로 터가 있었다. 그 곳은 봄날같이 따스하였으며 과연 칡꽃이 난만하게 피어 있었다. 두 스님은 바로 이곳이 인연처라 깨닫고 옥천사라는 절을 짓고 석함에다 정상을 봉안하였다.

 

12.gif 사찰풍경

 

봄이면 10길에 화려한 벚꽃들이 사람들을 향기로 취하게 하고, 여름이면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키는 불일폭포가 더위를 식혀주고, 가을이면 지리산을 물들인 오색단풍들이 유혹하고, 겨울이면 칠불암 아자방에서 정진에 몰두하는 수도승의 용맹정진을 느끼게 하는 도량! 바로 쌍계사입니다. 그러나 쌍계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이 자랑하는 멋과 맛 때문에 사찰이 지닌 진정한 보물을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니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잊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입니다.

 

쌍계사의 진정한 멋과 맛은 창건역사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흔적도 경내 곳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신라 성덕왕 21년에 대비 및 삼법 두 화상께서 당나라에서 “육조대사 혜능의 정상을 모셔다가 삼신산의 눈 쌓인 계곡 위 꽃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육조대사의 사리를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그 뒤 땅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가 호랑이의 인도로 이곳을 찾아 절을 지어 조사를 봉안하니 바로 옥천사입니다.

 

옥천사의 주인공이 바로 ‘육조정상탑’이다. 대웅전 왼편 아래쪽에 자리한 육조정상탑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육조정상탑에 나아가 참배하니 육조대사는 보이지 않고 7층 석탑만이 참배객을 맞이하고 있지요. 육조대사의 선풍은 아자방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옥천사에서 쌍계사로 사명이 바뀌게 된 것은 다름아닌 ‘차(茶)’때문입니다. 문성왕 2년에 우리 불교 범패종장이신 진감국사께서 중국유학을 마치시고 다종자를 가지고 오셔서 이곳 지리산 주변에 심으시고 대가람으로 중창하시니 뒤에 정강왕께서 선사의 도풍을 앙모하여 "쌍계사"라는 사명을 내리셨습니다. 쌍계교를 건너 조금 오르다 보면 길 좌우에 '雙磎'와 '石門'이라 새겨진 큰 바위를 만나게 된다. 신라 최고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 바위 글씨입니다. 이 '쌍계 석문'을 지나면 차 종자를 가져와 처음으로 심은 것을 기념하여 세운 차 시배비를 만나게 됩니다. 대 이슬을 먹고 자라 생로병사를 초월한 신선들이 즐겼다던 죽로작설차(竹露雀舌茶)의 향을 쫓아 쌍계사를 찾는 일은 품격 높은 여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쌍계사는 불교 음악 범패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진감국사가 중국에서 불교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민족에 맞는 범패를 만들어, 많은 범패 명인들을 배출한 교육장이 바로 팔영루입니다.

 

정면5간, 측면3간의 2층 누문인 팔영루는 쌍계사의 창건주인 진감국사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써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불교 노래인 어산(漁山) 범패를 작곡했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누각입니다.

 

최치원이 글을 지었다는 진감선사대공탑비에는 '그가 범패를 매우 잘하여 금옥 같은 소리가 구슬프게 퍼져 나가면 상쾌하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여 능히 제천(諸天)을 기쁘게 할 만하였다'라는 대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 인가 모르지만 쌍계사에는 범패 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팔영루에서 다시 범패가 울려 퍼지기를 기다려 봅니다.

 

한국불교뿐 아니라 한국문화와 생활에 절대적 영향을 주었던 진감국사 스님의 부도는 국사암에서 불일폭포방향으로 올라가면 친견할 수 있습니다.


12.gif 교통안내

1) 남원 - 19번국도 - 구례읍 - 구례 서시교에서 하동방면 19번국도 - 화개장터- 쌍계사

2) 남해고속도로 하동인터체인지 - 하동읍, 19번국도 - 화개면 탑리 쌍계사 방면 지방도 - 쌍계사

 

12.gif 현지교통

1) 하동에서 쌍계사행 버스이용, 1시간 간격 운행(26Km)-직행,완행 13회. 40분 소요.

2) 구례에서 쌍계사행 버스이용, 1시간 간격 운행(21Km)-완행 11회. 30분 소요

3)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쌍계사행 하루 2회, 3시간정도 소요.

4)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하동행 1시간 간격 운행. 13회 운행.

5)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화개행 하루 6회

           * 문의 : 하동터미널  055-883-2663

                       구례터미널  061-780-2731

                      부산서부터미널 051-322-8307

 

12.gif 입 장 료 

12.gif 주차시설

12.gif 도움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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