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군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다
1894년 1월 10일 저녁, 전라도 정읍 말목장터에서 울리는 때아닌 풍물소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수천을 헤아리는 군중들이 모이자 그들 앞에 5척 단신의 사내 하나가 섰다. 키는 작았지만, 담력은 산같이 컸고 눈은 샛별같이 빛났다던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이다.
“우리가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이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고 저 악랄한 지주나 관료 손에 들어간 지 오래되었습니다. … 그런데도 중앙의 대소 신료들은 자기 잇속 채우기에만 정신이 빠져 있습니다. 여기에 조병갑마저 다시 부임해와 어제의 행패를 오늘 또 하고자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할 것입니다. 부디 저 탐관오리들을 물리치고 이 나라를 바로잡는 대열에 앞장섭시다. 자, 날이 밝기 전에 곧바로 고부 관아로 쳐들어갑시다.”
듣고 있던 군중들은 한 맺힌 함성을 토해냈고, 전봉준은 이들을 두 패로 나누어 고부 관아로 향했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탐관오리에게 잃고
전봉준은 1855년 아버지 전창혁(全彰赫)과 어머니 언양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봉준의 집안은 고조부 때만 해도 벼슬을 했던 양반 가문이었으나 이후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몰락해갔던 것으로 보인다. 고창읍 당촌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전봉준은 가세가 기울어짐에 따라 순창, 임실, 고부 등지로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러다 서른 살 즈음고부 마을로 들어왔다.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외에 풍수도 보고, 사람들의 길흉사에 날을 잡아주기도 했으며, 편지도 대필해주었다. 가난했으나 농사를 짓지 않았던 전봉준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택한 방법들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호남 지역은 비옥한 농토를 가지고 있었고 서해안의 풍부한 해산물까지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문제는 당시의 부패한 지방 관리들이 이 땅을 한밑천 챙기는 수단으로 여겼다는 데 있었다. 세도가 풍양 조씨 척족이었던 조병갑도 그런 인물이었다.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부임해온 뒤 온갖 노략질을 벌이자 참다못한 군민들은 관아로 달려가 소장을 올리고 억울함을 호소한 적도 있었지만, 조병갑은 이들을 난민으로 몰아 엄한 형벌로 다스렸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도 이 일에 앞장섰다가 체포되어 매 맞아 죽었다. 이후에도 백성들은 몇 번에 걸쳐 관아에 몰려가 호소했으나 욕심에 눈이 먼 조병갑은 이들을 옥에 가두고 몽둥이로 다스렸다.
참다못한 1893년 11월 전봉준을 주축으로 한 20명이 모여 고부 관아를 부수고 조병갑의 목을 벤 뒤 전주 감영을 함락할 것 등을 결의하고 사발통문을 작성했으나,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전임발령이 나 계획이 무산됐다. 그러나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이 공작을 벌여 다시 고부 군수로 부임해오자 백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고, 이 분노가 하나의 힘으로 뭉친 것이다.
민란이 동학농민운동으로 확대돼
말목장터에 모인 군중들은 전봉준의 지도 아래 고부 관아로 들이쳤다. 조병갑이 이미 달아난 고부 관아는 군중들의 함성에 파묻혔고, 관아를 점령한 백성들은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기를 나누어 가졌다. 또 곡식 창고를 열어 어려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고부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신임군수로 박원명을, 봉기를 진압하고 조사할 안핵사로 이용태를 내려보냈다. 박원명은 난을 일으킨 백성들에게 술과 고기를 먹이며 지난 죄를 모두 용서할 테니 각자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라고 타일렀다. 그 말에 많은 농민군이 해산했고 전봉준도 고부를 떠났다. 그러나 그 뒤에 나타난 이용태는 봉기 참가자와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을 줄줄이 잡아갔다. 특히 농민들이 주축이었던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전가하며 동학을 탄압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은 분노하며 다시 한번 무장봉기를 결의했다. 손화중·김개남 등 동학 접주들과 손을 잡은 전봉준은 ‘보국안민(報國安民)’을 내걸고 다시 일어났다. 1894년 5월 4일 고부군 백산면에 모인 인원은 약 1만 3,000여 명이었다. 전봉준이 총대장으로 추대되고 손화중·김개남이 총관령을 맡았다. 전봉준은 격문을 지어 봉기의 이유를 널리 알렸다.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니 그 본의가 단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기 위함인데,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한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 수령 밑에 굴욕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또한 네 가지 군율을 정했다.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 것.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할 것.
3.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깨끗이 할 것.
4. 서울로 진격하여 세도가들을 몰아낼 것.
이로써 처음에 농민들이 주축이 되었던 민란은 동학농민운동으로 확대된다. 이 무렵 동학은 온건 노선을 주장하는 북접과 개혁적인 행동 노선을 지지하는 남접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5월의 기병 당시에는 남접만 가담하고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을 따르는 북접은 기병에 반대했다.
집강소 설치하고 폐정개혁 시행
동학 농민군은 황토현 고개에서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그 기세를 몰아 봉기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장악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에서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은 정부에 증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이도록 건의했다. 그 사이 전봉준은 ‘호남 제일성’이라 불리는 전주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뒤따라온 진압군이 성을 포위하고 서울과 호남의 군사들이 원병으로 몰려들어, 정부군과 농민군은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정부의 원병 요청에 청나라 군대가 상륙했고, 청의 출병을 구실로 일본군도 인천에 상륙했다.
뜻밖의 국면에 전봉준은 자신들이 제시하는 개혁안을 수용한다면 전주성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관군도 더 이상 전쟁이 지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5월 7일 전봉준은 관군과 화약(和約)을 맺고 다음날 전주성을 나와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것이 전주 화약이다.
이 화약대로 전봉준은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했다. 본래는 관과 민이 협력해 개혁 작업을 진행한다는 취지였지만, 실제 고을의 벼슬아치들이 거의 도망가고 없는 상태에서 집강소는 농민들의 자치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농민 자치였다. 비록 호남 지방과 일부 인근 지방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농민이 자치를 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다. 또한 폐정개혁안의 내용은 “탐관오리는 뿌리 뽑을 것”, “무명잡세는 혁파할 것” 같은 농민들의 요구뿐 아니라 “종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것” 등 매우 급진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반외세를 외치며 다시 거병했으나 밀고 당해 교수형에 처해지다
그런데 조선에 상륙한 일본은 경복궁을 침범하여 친일개화파 정부를 출범시키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에는 조선 내정을 직접 간섭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 조선의 제도를 자신들이 편한 대로 고쳐나가고 있었다.
9월 초 전봉준은 삼례에 직속 부대를 집결시켰다. 이렇게 모인 농민군 4,000여 명은 스스로 의병이라 칭했다.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의미였다. 각지의 농민군은 다시 전봉준을 대장으로 받들고 손화중과 김덕명에게 총지휘 임무를 맡겼다. 이번에는 북접계도 합류해 그 세가 더욱 커졌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은 농민군이 넘기에 높은 산이었다. 공주를 공격했다가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했고, 나머지 농민군도 진압되기에 이른다. 농민군의 기세가 꺾이자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전봉준은 일단 농민군을 해산시킨 뒤 재기병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호남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개남을 찾아가기로 했다. 가는 길목에 옛 부하 김경천을 만나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현상금에 현혹된 김경천과 그의 이웃들은 잠든 전봉준을 몽둥이로 쓰러뜨리고 밀고했다.
일본군에게 넘겨진 전봉준은 살려달라고 하면 일본으로 데려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라도 들어주겠다는 제의를 뿌리치고 다섯 차례의 심문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개인적 야망이 아니라 “민중을 위해” 일어서 죽음을 앞둔 순간 목숨을 담보로 한 유혹마저 거부한 채 투쟁한 그의 삶은 “민중을 반침략, 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매우 앞서 있었던 그의 개혁안은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수용되었고, 그가 보여준 무장항거정신은 항일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관련링크 인물사 연표 보기- 글
- 윤희진 역사저술가
- <한국사 인물 이야기>, <제왕의 책>,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 등의 책을 썼다.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역사 인물을 찾아내고 왜곡된 인물들의 참모습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이 많다.
- 그림
- 장선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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