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조선의 제22대왕 정조

문성식 2015. 6. 14. 23:22

정조 조선 후기 개혁과 대통합을 실현한 군주

정조 이미지 1

조선의 제22대왕 정조는 지난한 여정을 거쳐 왕위에 올라, 갖가지 개혁 정책 및 탕평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가 재위기간에 추진했던 각종 정책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왕위에 오르는 지난한 여정

조선의 제22대왕 정조, 1759년(영조35) 세손에 책봉될 때까지는 왕가의 일반적인 코스를 밟으며 순탄한 생을 살았다. 그러나 1762년 생부 사도세자(후일의 장헌세자, 고종때 장조로 추존됨)가 비극적으로 죽게 되면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지난한 여정을 거쳤다. 생부가 뒤주에 갇혀 죽던 1762년은 정조의 나이 11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영조에게 뒤주에 갇힌 생부를 살려 달라고 간청해야만 했던 어린 정조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장헌세자필첩의 일부. 장헌세자의 24∼5세의 필적.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영조는 장헌세자 사후 정조를 앞서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후일의 진종)를 후사로 삼아 왕통을 잇게 하였다. 사실 여부야 어찌 되었든 장헌세자가 죄인으로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그의 아들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계통을 바꾼다고 해서 장헌세자와 정조의 부자 관계가 부정될 수는 없겠지만, 명분상으로는 죄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허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세손이지만 세자의 지위를 가지고 생활하던 정조는 영조 말년 경인 1775년 국왕을 대신해 대리청정하다가 다음 해 영조가 승하하면서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갖가지 방해공작이 이루어져, 정후겸등이 정조를 해치려고 하였고, 그를 비방하는 내용으로 투서하거나 그가 거처하던 존현각에 괴한이 침입하여 염탐하는 사건이 이어졌다. 그리고 대리청정이 결정될 당시에는 홍인한이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이른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제기하며 세손의 권위에 흠집을 내면서 대리청정을 반대한 적도 있었다. 정조가 비록 개인적인 불행을 딛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과정은 참으로 지난하였다.

학습과 훈련을 통해 향상된 정치리더십

리더십은 천부적으로 타고나기도 하지만, 생후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향상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제왕학(帝王學)은 정치리더십을 향상시키는 학문체계라 하겠다. 제왕학은 모든 군주가 갖춰야 할 학문을 말한다. 조선시대 군주들이 학습하는 제왕학은 정치의 득실과 인물의 능력, 민생의 고락을 파악하는 현실적인 학문으로, 학습을 통해 터득한 논리는 정치 현실에서 실천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를 실현할 수 있었다. 정조의 경우도 이 같은 제왕학의 학습체계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정조는 1752년 출생 이후 원손으로 책봉된 후 왕세손->동궁->국왕 등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지위가 바뀔 때마다 교육도 내용과 격을 달리하였는데, 보양청교육->강학청교육->시강원 교육->경연교육 등의 네 개 과정이 이에 해당되었다. 성장 과정에 지속적인 교육 과정이 동반되었다. 정조는 이들 과정을 통해서 유교의 주요 경전을 비롯한 역사서와 조선시대 제왕학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성학집요]나 [정관정요] 등을 학습하였다.

정조는 이와는 별도로 할아버지 영조의 훈육도 받았다. 영조는 국왕이 신하에게 교육받는 수준에서 벗어나 국왕이 직접 학문을 연마하고 신하를 가르치려고 한 국왕이었다. 영조는 정계는 물론이고 학계까지 주도하는 군주가 되려고 하였으며, 그 이념은 유학에서 이상적인 사회라 말해지는 삼대(三代)의 군주상인 군사(君師; 군주가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기르고 가르치는 존재)였다. 영조는 보양청 단계에서부터 정조의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1757년 6살인 어린 원손을 불러 [동몽선습]을 외우게 하였고, 이듬해 경연자리에는 원손을 불러 [소학]을 외우게 함으로써 학습 진도를 점검하였다. 이후에도 영조는 수시로 정조를 데리고 경연에 참석하여 신하들과 토론하도록 하였고, 유교적 덕치와 군사로서의 국왕의 위상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후일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정조는 여러 방면에서 할아버지인 영조의 정치를 계승하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개혁과 대통합을 위하여

즉위 이후 정조는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를 홍국영을 통해 추진하였다. 동시에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 인재 육성과 학문 정치 구현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왕위에 오른 지 4년 정도 경과한 시점까지 자신의 정적들의 제거에 일단락 성공한 정조는 이후 각종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창덕궁 내 규장각. <출처 : 이근호>

우선 정치적으로는 선왕 영조를 계승, 탕평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와중에서 이른바 청류(淸流) 세력들을 끌어들였다. 영조 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노론의 우위를 주장하는 척신 세력과 이들을 타파하려는 노선인 청류를 자처하는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정조는 그동안 척신 세력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조정의 중심부로 끌어들여 이른바 탕평을 펼쳤다. 아울러 그동안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남인세력을 등용하여 정치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공개된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을 통해서 보면 그의 정적이었다고 말해지는 벽파 세력까지도 협력 세력으로 포섭하여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런 탕평책의 추진과정에서 정권의 물리력 확보를 목적으로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였다.

정조는 또한 규장각을 통해서 학문정치를 구현하며 인재 육성을 추진, 이를 위해 연소한 문신들을 선발, 교육해 국가의 동량으로 키워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학문 정치의 명분 아래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이며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다. 또한, 규장각 내에 검서관제도를 두어, 서얼신분인 이덕무·유득공·박제가등을 등용하였다. 이들은 모두 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박지원의 제자들인데,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그동안 자신들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정조는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소통을 기대하였다.

정조는 이 밖에도 지방인재 선발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정국이 주로 서울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조는 각 지역에 측근들을 파견해 과거를 시험보고, 그 결과로 여러 책자를 간행하였다. 교남(嶠南;영남)․호남․관서의 빈흥록(賓興錄) 등이 그것이다. 아울러 영남이나 호남의 인재를 포섭하기 위해 영남인물고, 호남절의록 등을 편찬하였다. 이 밖에도 상업적으로는 통공정책을 추진하였다. 통공정책이란, 금난전권의 혁파와 자유상인 즉 난전 상인의 안정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단행된 상업정책을 말한다. 기존의 특권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도성 중심의 경제권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시장공간의 확대(경강, 누원, 송파 등) 등을 도모한 정책이었다.

개혁의 총아, 화성 건설과 좌절된 개혁군주의 꿈

화성 축성에 동원된 거중기. ([화성성역의궤]에서) <출처 : 이근호>

정조가 추진한 개혁의 총결산은 아마도 화성의 건설로 모아지지 않을까 한다. 화성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이장을 계기로 조성된 성곽이었다. 정조는 화성을 단순한 군사적 기능을 수행한 성곽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곳을 무대로 자신이 개혁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를 시험하는 무대로 삼고자 하였다. 일단 축성 과정에 당시로써는 가장 선진적인 축성 기술을 도입하였고, 그가 즉위 이후 육성했던 정약용등 측근세력을 대거 투입하여 주도하게 하였다. 또한, 화성을 포함한 수원 일대를 자급자족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국영 농장인 둔전을 설치하고, 경작을 위한 물의 확보를 위해 몇 개의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선진적인 농법 및 농업 경영 방식을 시험적으로 추진하였다. 통공정책을 통해서 자유로운 상행위가 가능해져 수원 일대 상인들 유치가 쉬워졌다. 화성은 개혁의 시험 무대이자 개혁의 결과물로 응축된 그야말로 정조대 개혁의 총아였다.

그러나 이런 개혁의 산물은 만개하기도 전에 역사 속으로 퇴장하였다. 현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었다. 그의 사후 장용영이 혁파되고, 정조가 육성했던 세력들이 대거 축출되는 불운을 겪었다. 서울 중심의 벌열 세력에 의한 정치, 사회, 경제적 독점은 심화되었다.

그렇다면 정조가 꿈꾸었던 목표나 이상은 무엇일까? 정조는 스스로 군사(君師)로 자처하였다. 율곡 이이의 설명에 따르면, 태초에는 백성들이 새처럼 거처하고 생활이 도리가 구비되지 않았으며, 인문(人文)도 구비되지 못하였고, 임금도 없이 소박한 생활을 하다가 시간이 경과하면서 분란이 생겼는데, 이때 성인(聖人)이 출현하였다고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이 성인을 임금으로 삼음으로써 군사(君師)의 직책을 갖게 되었고, 이로써 백성의 생업이 편안해지고 하늘의 질서가 밝아졌다고 하였다. 유교에서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제시하는 요․순이 이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결국, 정조 역시도 선왕인 영조가 그랬던 것처럼 군사가 되기를 원했고, 개혁과 대통합을 통해 백성들의 생업이 편안해지고 질서가 잡힌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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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글쓴이 이근호는 조선후기 정치사와 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대중과 소통하려는 차원에서 [이야기 조선왕조사],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사전] 등을 출간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발행201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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