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의 전래와 천주교 박해
근대 초기 지리상의 발견과 이에 따른 탐험여행은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을 가져왔다. 이와 함께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의 학문, 즉 서학이 동양에 전해졌다. 서학은 천주교 및 서양학술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지만, 좁은 의미로 천주교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조선이 처음 서양에 관한 지식을 접한 것은 야소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1603년 연경(북경)에서 돌아온 사신들이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세계지도(양의현람도)를 가지고 온 것이 그 첫 대면이었다. 또한 1631년(인조 9) 진주사로 연경에 간 정두원은 귀국길에 등주에서 신부 로드리게스를 만나 과학기구와 서적을 얻어가지고서 귀국했다. 특히 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도 연경에 머무는 동안 중국의 서양선교사들을 접촉하면서 서양학문을 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문으로 저술된 한역 서학서가 17세기 무렵 조선에 흘러들면서 지식인들 사이에 서학이 크게 퍼졌다. 이 서학은 이후 실학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제자들 중에는 서학을 사학(邪學)으로 몰아 내치는 파가 있었던 반면, 학문적인 관심에서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려는 파도 있었다. 예컨대 신후담과 안정복은 천주교의 창조설과 불멸설을 비판하여 강력히 서학을 내쳤으나, 홍유한, 권철신, 정약전, 이벽 등은 천진암 등에서 강학회를 열고 서학을 연구하는 가운데 천주교에 귀의했다. 이처럼 외부의 전도도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예는 역사상 조선에서 처음 일어난 일이었다.
학문적인 관심에서 시작된 천주교는 1784년(정조 8)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우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교회 창설을 계기로 천주교는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으나, 한편에서는 천주교뿐 아니라 서양학문 전체를 배격하는 척사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1785년(정조 9) 을사추조 적발사건을 시작으로 천주교는 시련기로 접어들었다. 1791년 호남 진산의 천주교인 윤지충이 천주교 의식에 따라 모친상을 치른 것이 발단이 되어 이른바 진산사건으로 불리는 신해박해가 일어났다. 이승훈, 권일신, 최필공 등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리고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고 불살라지는 등 서학탄압은 더욱더 극심해졌다.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면서 명도회(明道會)를 중심으로 한 정약종과 황사영의 전교활동, 강완숙 등 여교우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조선교회는 다시 발전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801년(순조 1)에 또다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해 정월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의 금교령을 시작으로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정부는 전국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세워 천주교도를 빠짐없이 고발, 처벌하도록 했다. 이때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홍낙민 등 남인(南人)계통의 사람들과 주문모 신부, 황사영 등 모두 1백 명이 죽음을 당했으며, 4백 명이 유배를 당했다. 특히 황사영은 신유박해의 사실을 알리는 소위 ‘황사영 백서(帛書)’를 북경에 전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처형당했다.
신유박해 후 천주교는 세력을 다시 회복하는 듯했으나 1839년(헌종 5) 기해년에 다시 모진 박해가 몰아쳤다. 이 기해박해는 이전의 박해보다 더욱 광범위하고 전국적이었다. 이 박해로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가 모두 순교했다.
천주교 집안에서 신앙을 접하다
1846년 9월 16일(음력 7월 26일)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수선탁덕(首先鐸德, 첫 번째 성직자라는 칭호) 김대건(1822~1846)은 한강 새남터(지금의 노량진 백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다. 김대건은 독실한 천주교 집안출신으로, 그의 부친인 김제준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103위의 성인과 300만에 가까운 신자를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발전은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기꺼이 목숨을 바친 많은 순교자들의 피 흘림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 성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인 최초로 서양 학문을 배우기 위해 유학한 학생이며, 라틴어와 프랑스어, 중국어, 서양음악, 그림 등을 구사하고 활동한 국제인이자 여행가였다.
1836년 김대건이 신학생으로 선발되기 전까지의 어린 시절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내포 지방의 솔뫼(현재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과 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전한다. 김대건의 출생지는 일반적으로 충청도 솔뫼라고 알려져 있는데, 경기도 용인 굴암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린 시절의 삶이 정확하게 그려지지는 않지만, 김대건 집안이 솔뫼에서 세거하다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 거주지를 옮겼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김대건이 출생할 무렵, 그의 집안은 천주교 박해로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증조부인 김운조가 1814년 해미에서 옥사했고, 종조부 김종한은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대구에서 순교한 상태였다. 김대건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서울 청파로 이주하였고 이후 용인에서 거주했다. 용인으로 이주한 뒤에 그의 집안 형편은 상당히 어려웠다. 부친인 김제준은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갔고, 어린 김대건은 제대로 먹지 못해 발육 상태가 매우 좋지 못했다고 한다. 영양실조로 잔병치레하는 일이 예사였고, 그로 인한 허약함은 청년 시기까지 이어졌다. 훗날 중국에서 신학공부를 하는 동안 신부들은 김대건이 제대로 신학 공부를 마치고 사제가 될 수 있을까 염려했다고 전한다.
김대건은 집안의 영향으로 태어나자마자 천주교를 접했다. 집안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데는 백부 김종현의 영향이 컸다. 김종현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모든 가족들에게 전교하였다고 한다. 이때 증조부 김운조를 비롯하여 조부인 김택현 등이 입교하였고 조부는 1830년에 순교하였다.
마카오 유학과 신학 수업
김대건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된 것은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에 의해서였다.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프랑스 출신인 모방 신부는 1836년 1월 12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와 경기도와 충청도 등지를 돌면서 신도들에게 영세를 주는 한편, 한국 최초의 신학생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 신학교로 보냈다. 김대건은 이들 중 제일 마지막으로 선발되었는데, 그가 선발된 것은 모방 신부와 더불어 김대건의 부친인 김제준과 친한 정하상이 중간 역할을 하였다.
모방신부는 조선에 입국할 당시 신학교 설립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했던 시기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모방 신부는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내 이들을 교육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들이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1837년 6월 7일이었다. 김대건은 1842년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라틴어를 비롯한 신학교육을 받았다. 그 시기에 동료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했고 마카오에서 소요가 일어나 필리핀 마닐라로 잠시 피신하기도 하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신학생 시절 김대건은 7명의 서양신부로부터 라틴어와 철학을 비롯하여 천주교 교리를 교육받았다. 마카오의 조선신학교는 임시로 설립된 것이라 체계적이지는 않았지만, 신부들은 조선 신학생들의 자질을 높이 샀고, 교육에 애정을 보였다. 당시 초대 교장이었던 칼레리 신부는 이들 3명의 조선신학생들에 대해 “사제가 갖추어야 할 훌륭한 덕목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 최초의 신부 탄생과 순교
1842년 마카오를 떠나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할 때까지 김대건의 생애는 가시밭길이었다. 마카오를 떠나 요동에 도착한 김대건은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 1차 실패하고 중국 만주에 남아 있었다. 그가 잠시나마 조선 입국에 성공한 것은 그해 12월 27일이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청의 국경선이라 할 수 있는 책문을 넘어 꿈에 그리던 조선땅을 밟아 본 것이다.
김대건이 부제품(사제 전 단계)을 받은 것은 1844년 12월이다.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5년 1월 1일 책문에서 조선에서 온 밀사들을 만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왔다. 그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1월 15일이었다. 조선 정부는 김대건이 신학공부를 위해 조선 땅을 떠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일급 수배자 신분이었다. 비밀리에 서울에 잠입한 김대건은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 준비와 조선순교사를 집필하였다. 이어 4월 30일 11명의 교우 및예비 교우들과 함께페레올 주교를 데리러 인천을 출발하여 상해로 향했다.
조선을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한 김대건은 마침내 사제에 서품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가 탄생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서품을 받은 후 그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등과 함께 8월 31일 상해를 출발하여 10월 12일에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에 도착하였다. 이후 순교하기 전까지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오가며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었고 페레올 주교의 요청으로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그 일의 일환으로 1846년 5월 14일 황해도에서 중국 배에 편지와 조선지도를 전달하고 돌아오다가 6월 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었다. 40여 차례의 모진 고문을 받은 김대건은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다음 날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참수되었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그 시신을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조선 정부는 김대건의 시신을 파묻고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했다. 순교한 지 40일 만에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이민식을 비롯한 신자들이 그의 시신을 비밀리에 빼내 이민식의 고향인 미리내(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순교자 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페레올 주교 또한 김대건 신부의 옆자리에 안장되었다. 이어 남편과 아들을 연달아 잃고 문전걸식을 하며 고생한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아들 옆에 묻혔다.
김대건은 죽기 전 배교를 종용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도 시종일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한 번 나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 나의 소원이니, 오늘 묻고 내일 물어도 이 같을 뿐이요, 때리고 죽여도 역시 이 같을 뿐이니 빨리 때려 죽여 달라.”관련링크 인물사 연표 보기
- 글
-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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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 장선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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