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지석영

문성식 2015. 6. 14. 23:17

지석영 이 땅의 수많은 어린이들을 천연두의 위협에서 구해내다

지석영 이미지 1

서양의 종두법을 배우다

1879년 전국에 천연두가 창궐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지석영의 조카딸도 그해 사망했다. 한의학을 공부했던 지석영은 천연두의 창궐에 한의학의 무력함을 통감했다. 서양에서 실시하고 있는 종두법이라는 것을 조선의 아이들에게 시행할 수 있다면 수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3년 전 스승인 한의사 박영선(朴永善)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도쿄 순천당의원 의사에게 우두종두법을 배우고 일본인이 쓴 [종두귀감]이라는 책 한 권을 갖고 돌아왔다. 박영선은 그가 배운 종두법과 그 책을 제자들에게 강의했는데, 지석영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책을 읽고 강의를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런 지석영의 귀에 당시 부산에게 일본 거류민의 치료를 위해 의료행위를 하고 있던 제생의원 원장과 해군 군의관이 종두법을 알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난했던 지석영은 20일 동안 걸어서 부산 제생병원을 찾아가 필담으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 열의에 감복한 원장은 종두법을 가르쳐주기로 하고, 대신 지석영은 당시 일본인 거류민들이 편찬준비를 하고 있던 일본인들을 위한 한국어 사전 작업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렇게 부산에서 보낸 두 달이라는 시간은, 서양의 종두법을 배우고 서양 의학의 우수성을 확인한 지석영이 이후 서양 의학을 도입하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국문학에 관심을 갖는 기회도 만들어주었다.

가난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한학과 의학을 배우고

지석영은 1855년 5월 15일 서울 원동(지금의 낙원동)에서 지익용(池翼龍)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신분은 양반이었으나 매우 가난한 집안이었다. 아버지 지익용은 한의학에 조예가 깊었다. 한의원을 차렸으면 살림이 좀 나아졌을지도 모르지만 직접 의업에 종사하지는 않았다. 당시 의업은 중인층의 직업이었으므로 중인 취급을 받을까 염려했던 듯하다.

그러나 중인층의 한의학자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특히 당시 이름 있던 한의사인 박영선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탐구열이 매우 강했던 넷째아들 지석영을 당시 양반자제들이 다니던 서당에 보낼 형편이 안 되자 친구인 박영선에게 보내 한학과 의학을 공부시켰다.

직접 일본에 가 우두묘의 제조기술까지 습득

부산의 제생의원으로부터 두묘(痘苗, 천연두의 예방으로 쓰이는, 소의 몸에서 뽑아낸 면역물질)와 종두침, 접종기구, 일본 거류민들에게 부탁하여 구한 서양의학 서적 몇 권을 가지고 상경하던 지석영은 충청도 충주군에 있는 처가에 들렀다. 그곳에서 장인을 설득하여 두 살 된 어린 처남에게 첫 종두를 실시했고, 그 마을 어린이 40여 명에게 접종을 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우두 접종이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두묘가 제한된 양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접종하기 위해서는 두묘의 지속적인 공급이 필요했다. 접종법은 배웠지만 두묘를 제조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던 지석영은 1880년 수신사 일행에 수행원 자격으로 직접 따라나서 우두묘의 제조기술을 완전히 습득하고 돌아왔다. 귀국한 뒤에는 서울에 종두장을 차려 백성들을 계몽하면서 본격적으로 우두접종사업을 펼쳐나갔다.

우두접종 의무실시로 수많은 어린이들의 생명 구해냈으나 친일 행적으로 오점 남겨

그 무렵 지석영은 개화당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그는 우두의 실시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 혁신을 중심으로 한 선진적 개화사상을 주장한 개화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러던 가운데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개화당의 일원이자 일본 의사와 접촉하여 종두법을 수입한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다. 다행히 몸은 피했지만 종두장은 군인들의 손에 완전히 불타버렸다. 정국이 안정된 뒤 지석영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종두장을 부활시켜 계속 종두를 보급했고, 전라도와 충청도에도 우두국을 설치해 종두법을 가르쳤다.

1883년에는 정부의 개화정책 입안에 직접 참여하고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한 뒤 성균관의 서적을 거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면서 개화파가 몰락하자 지석영의 관직 생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가운데 1885년 [우두신설]을 간행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이 저술한 최초의 서양의학서이다.

1887년 지석영은 조세 등 국정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가 국왕에게 닿기도 전에 “흉악한 지석영이 우두를 놓는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구실 밑에 도당을 유인하여 모았다”는 이유로 수구파들의 탄핵을 받아 강진 신지도에서 5년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그는 다시 교동에 우두보영당을 설립하고 어린이들에게 우두를 실시했다.

세가 다시 바뀌어 1894년 개화파들이 집권하면서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지석영은 이에 적극 참가했다. 무엇보다 그의 가장 큰 공은 개화파 정부로 하여금 [종두규칙]을 제정하게 하여 전국 모든 어린이들에게 의무적으로 우두접종을 실시하도록 한 일이다. 그로 인해 19세기 말 이 땅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생명을 구하고, 마맛자국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할 수 있었다.

친일개화정권 당시 그는 형조참의에 기용되었다. 그 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들이 상륙하던 무렵, 대구 감영의 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어를 잘하는 지석영은 일본군의 통역과 길 안내를 맡는 등 동학농민운동의 토벌에 도움을 주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동래 부사가 되었다가 동래부 관찰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 토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또한 뒷날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사를 낭독한 친일 행적은 그 일생에 큰 오점으로 남는다.

한글 연구와 어린이 교육에도 큰 기여

한편, 지석영은 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약하면서, 밀 재배의 경제성을 설파하고 주시경과 함께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각자이기도 하다. 한글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표시하지 못하는 음이 없고 매우 배우기 쉬운 문자임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 연구하지 않고 민간에 맡겨버린 결과 혼륜(混淪)과 와오(訛誤)가 심하여졌다고 격렬하게 비난하며 한글을 새롭게 재정비하여 나라의 자주와 부강을 도모할 것을 건의했다. 고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05년 [신정국문(新訂國文)]을 공포했는데, 이는 지석영의 작품이다. 신정국문이 학계에 논란을 일으키자 지석영은 한글 연구를 위한 조직으로 1907년 국문연구소를 설립했고, 그가 교장으로 있는 의학교에 국문연구회를 창립했다. 주시경, 박은식 등이 이 연구회의 연구원이었다.

지석영은 또한 한글에 대한 서적으로 [언문]을 저술하는 등 한글연구와 한글운동을 전개해나가면서 한자의 뜻과 음을 한글로 표시하는 방법의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옥편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자전석요(字典釋要)]를 펴내기도 했다. 그 외 국채보상연합회 부소장, 대한자강회 평의원, 기호흥학회 부회장 등으로 활발한 사회활동도 펼쳤다.

1899년 지석영의 청원에 따라 최초의 관립의학교가 설립되었고 그는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의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공식적인 서양의학 교육기관이다. 1907년 의학교가 대한의원 의육부로 개편되면서 학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10년 사직했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뒤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은둔의 삶을 살다 1935년 2월 1일 여든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총독부에서 협력을 부탁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3․1운동 등 독립운동에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윤희진 | 역사저술가
<한국사 인물 이야기>, <제왕의 책>,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 등의 책을 썼다.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역사 인물을 찾아내고 왜곡된 인물들의 참모습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이 많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발행2011.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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