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48.jpg 백제 멸망 후 진주한 당(唐)나라의 장수 유인원(劉仁願)을 기념해 세운 비.

 

충청남도 부여군 현내면 궁북리 부소산에 세워져 있던 것을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비문의 전반부는 중간 중간이 마모되어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후반부는 더욱 심해 마지막 부분의 몇 자 외에는 완전히 마멸되어 알 수가 없다. 판독이 가능한 전반부 비문의 내용을 보면 유인원의 세계와 생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는 자(字)는 사원(士元)이고, 조음대빈인(雕陰大斌人)으로 오도독부가 설치되었을 때 낭장(郎將)으로 도성수위의 책임을 맡았다. 이 때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의 부흥운동군에 의해 도성에 포위되었다가 유인궤(劉仁軌)가 거느린 당군과 신라군에 의해 구원되기도 하였다.

생애부분 내용은 주로 그가 당나라 태종에게 발탁된 이후의 활동상과 관력을 적고 있다. 그는 645년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였을 때 뛰어난 전공을 세워 우무위봉명부좌과의도위(右武衛鳳鳴府左果毅都尉)에 제수되었다. 647년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좇아 9성철륵(九姓鐵勒)을 안무하였다.

이 후의 행적은 비문의 마멸로 더 이상 알 수 없다. 이 비는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그가 백제 옛 땅의 진수 책임자였고, 또 백제부흥운동군과의 전투 및 신라와의 관계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 데 도움을 준다.

 

비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부분은 각이 없이 둥글다. 특히 머릿돌은 여섯 마리의 용조각이 매우 사실적인데, 좌우 양 쪽에서 세 마리씩의 용이 올라가 서로의 몸을 휘감고 중앙에 있는 여의주를 서로 다투고 있다. 이는 당나라 전기의 화려한 수법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서는 이 비문을 유인원이 썼다고 하고 있으나, 이 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문무왕 3년(663)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에 비문을 새긴지 3년 후이다.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비문 중에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과 부흥운동의 중요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