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5.jpg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의 동족마을로 빼어난 자연경관과 민속·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촌이다. 그 중 북촌택은 양진당(보물 제306호)과 함께 하회 북촌을 대표하는 규모가 큰 집으로 북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경상도 도사를 지낸 유도성이 철종 13년(1862)에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 여러 차례 보수한 것이다.

 

유난히 높고 길며 웅장한 담장으로 둘러 싸인 넓은 터에 내 ·외별당을 갖춘 여유있는 배치가 이 집의 원모습이라 하겠다. 후원(後園)의 터가 넓어서 현존건물들은 전방으로 몰려있는 격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동향집이고 그 규모가 양진당(養眞堂)과 함께 북촌(北村)의 2대가(二大家)라 불릴만큼 큰 집이다.

별당채 대문채는 길이가 7간이며 좌우의 각 3간은 모두 광과 헛간이다. 외벽은 담장과 같이 축담으로 높이 쌓고 그 위에 들창을 내어 그 외관이 장대해 보인다. 대문에서 바로 전면이 ㅁ자형 몸채이고 우편마당에 비스듬히 一자로 놓인 집이 별당채이다. 별당채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별곽으로 담장을 두른 사당(祠堂)이 있고 사당옆을 지나 안으로 더 들어간 곳이 내별당터이다. 몸채는 정면이 6간, 측면은 퇴간(退間)을 합하면 9간이 되는 완벽한 ㅁ자집이다.

이 대문간의 우편으로 큰사랑과 사랑대청(大廳)이 있다. 여기에는 “화경당(和敬堂) ”(석봉서(石峰書))편액이 걸려있다. 큰사랑은 2간방이고 대청은 툇마루 ·쪽마루를 합쳐서 2간 가량의 크기이다. 대청에는 툇마루와 쪽마루를 제외한 단간(單間) 양면에 분합들문을 달았으므로 이를 닫는다면 대청은 단간마루가 된다. 2간 사랑방은 안쪽으로 골방을 두었고 큰사랑방 뒷모서리의 단간온돌방은 서고(書庫)이자 문집판고(文集板庫)이다. 대문 왼편에는 또하나의 사랑인 “남쪽사랑 ”이 갖추어져 있다. 단간온돌과 단간마루, 2간의 퇴마루를 두었으며 온돌에는 사당 골방을, 마루 안쪽에는 큰사랑의 경우와 같은 방향에 1간의 온돌방을 두었다. 방과 마루에는 모두 사분합(四分閤)들문을 두었다. 대문을 중심으로 한 큰사랑과 남쪽사랑의 방과 마루의 배치는 큰사랑방이 2간인점을 제외하면 똑같은 좌우 상칭의 평면구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양식을 가졌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왼편의 웃방은 평소 신위(神位)를 모시는 감실이 있으며 거실을 겸해서 쓰는 방이다. 남쪽 사랑은 경우에 따라 집안 노인들이 쓰거나 오래 묵는 집안 손님이 있을 때 제공되기도 하였다.

안채는 높은 장대석(長臺石) 축대 위에 세웠으며 또 그 기둥이 고대해서 지붕도 매우 높이 올려져 있다. 안방의 위치에 꾸며진 온돌방은 전자(田字)로 사분(四分)된 4간방을 이루었다. 이러한 양통식(兩通式) 방의 배치는 종래 함경도 지방과 강원도 일부지역에 분포되어온 형식임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안방 면적의 증가에 건넌방 역시 2간으로 잡아 안대청은 약간 줄어든 것으로 짐작된다. 4간 안방의 기능은 전면 아랫방이 일상 거실(침실)이고 그 뒷방은 의농(衣籠)과 안방살림을 수장하는 일종 골방이다. 안방 옆으로 붙은 방은 소위 웃방이고 기거, 접대에 쓰이는 점에서 안방과 비슷한 기능을 갖는 방이다.

8061.jpg 이 웃방의 뒷방은 찬방이다. 이렇게 보면 전자형(田字形) 4간방은 일상 기거용이 2간이고 1간이 골방, 1간은 찬방으로 분류가 된다. 부엌은 3간이 넘는 크기이며 부엌 아랫방으로 2간 온돌이 있다. 건넌방은 2간통인데 “윗상방(上房) ”이라 부른다. 대개 아들 ·며느리의 방이다. 건넌방 앞 툇마루에 연해서 1간의 온돌방을 두었고 방 앞에는 쪽마루를 붙였다. 이방은 “아랫상방 ”이라 하여 다른 집의 경우 “안사랑 ”의 기능을 갖게 된다. 살림을 물린 노부모의 방이다. 이 방 아래는 2간의 부엌이고 2간중 아랫간은 벽을 터서 출입하게 했으며 부엌내에서는 웃간에 부엌문을 내어 별당채 마당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이 부엌에서 큰사랑의 서고(書庫)와 접하게 된다. 건넌방앞 툇마루 외벽에는 쌍여닫이 판문(板門)이 있어 사당(祠堂) 마당으로 내려설 수 있게 트고 있다. 이 큰사랑 서고와 부엌 아랫간의 2간 외벽은 하층부터 다듬질한 화강석, 기왓장을 이용한 삼중원권(三重圓圈)(반월(半月)), 그 위에 다층 전돌화장벽(畵粧壁)과 같은 와편화장벽(瓦片畵粧壁)을 쌓아 치장했으며 같은 면의 안채 지붕의 고대(高大)한 합각에도 와편(瓦片)에 의한 기하문적(幾何文的) 일종 꽃담을 연출하였다. 이같은 측면 장식은 이쪽 면이 별당의 앞마당에 면한 때문으로 생각된다. 반대편의 긴 측벽은 중허리를 판벽(板壁)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으로 그 점을 짐작할 수 있다.

8062.jpg 별당채는 몸채의 북변(北邊)과 일정한 평행으로 두지 않고 아랫벌치를 벌려서 비스듬히 대문을 향하게 하였다. 이것은 적지않은 배치상 변화이며 그 시계의 확대효과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길이가 7간의 양통(兩通)집이며 전후퇴(前後退)를 두었다. 안에서부터 양통 1간의 부엌, 3간의 온돌방, 3간의 대청으로 대별된다. 이 별당채를 이 집에서는 그저 “큰사랑 ”이라 부르고 있다. 이 큰사랑채에는 “북촌유거(北村幽居) ”, “수신와(須愼窩) ”, “석호(石湖) ”(해사(海士) 김성근서(金聲根書)등의 편액(扁額)이 걸려있다. 석호(石湖)는 이 집의 창건자 유도성(柳道性)(고종대(高宗代))의 호(號)이다. 석호(石湖)는 현소유자 영하(永夏)의 고조부로서 이미 그 선대부터 천석(千石)의 칭이 있었고 영하에 이르기까지 소위 7대천석을 누려온 터이다. 선대에는 문한(文翰)도 있어 영하의 조부는 문집을 각판으로서 남기고 있기도 하다. 별당채의 머리에는 내당과의 사이에 담장을 두고 내당후원으로 출입하는 일각문을 설치하였다. 이 일각문을 들어서면 사당신문(祠堂神門)이 마주보이고 거기서 좌회하면 내당후원에 이른다.